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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집에서 차(茶)를 즐기는 터라, 찻잎이 떨어질 기미가 보일라치면 동네 차예관(찻집)을 찾아 새로운 차들을 수급해오곤 한다. 얼마 전에도 찻잎을 구하러 차예관에 들렀다가 '새벽 묵언차회'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졌다.
격주 토요일 6시 30분. 아직 어둑어둑한 기운이 남아있는 차예관에 모여 보이차를 마시는 모임이라고 한다. 그런데 '묵언' 차회다. 대화를 일절 금한 채 차만 마신다고 한다. 보통 차회라고 하면 옹기종기 모여앉아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며 차를 마시는 모임을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더 흥미가 생겼다.
상당히 인기 있는 프로그램인 모양이다. 예약을 하려고 보니 이미 8월 한 달이 통째로 만석이었다. 혹여 빈 자리가에 나오면 참여하기 위해 알림 설정을 해뒀는데, 차회 나흘 전쯤 예약 취소자가 나오면서 가까스로 예약에 성공했다.
막상 예약은 했지만 전날까지도 조금은 회의적인 생각이었다. 직장인에게 주말 아침이란 알람도 끈 채 늘어지게 늦잠을 잘 수 있는 소중한 시간 아니던가. 그런데 집에서 언제든 마실 수 있는 차를, 굳이 꿀 같은 아침 늦잠까지 반납해가며 마시러 갈 필요가 있을까. 가뜩이나 아침잠이 많아 일어날 자신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도 '참가비 2만 원을 허공에 날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온 몸이 긴장했는지, 평소라면 절대 일어나지 못했을 4시 반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덕분에 첫 참석부터 노쇼라는 불상사는 면했다.
차를 마시다 갑자기 눈물을 쏟다
지난 22일 토요일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차예관에 도착하니 내부는 어둡고 고요하기만 했다. 먼저 도착한 다른 참석자 역시 불 꺼진 매장 내부를 보고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문을 밀어보니 스르륵 열린다.
알고봤더니 새벽 묵언 차회는 독서와 명상을 위한 최소한의 조명만 켠다고 한다. 고요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들어서는 순간부터 소음은 자제해야 한다. 생각없이 큰 소리로 아침 인사를 하려다 분위기를 눈치채고 가벼운 목례만 한 뒤 빈 자리에 가 앉았다.

▲보이차를 내리는 모습 ⓒ 김경준
자리에 안내문이 하나씩 배포되고 특별한 선언(?) 없이 차회가 시작됐다. 이곳은 아빠와 딸이 함께 운영하는 공간이다. 아빠와 딸이 번갈아 보이차를 내리면서, 참석자들의 빈 잔을 수시로 채워줬다. 보이차를 마시는 동안 차예관에는 명상음악과 싱잉볼 소리가 흘러나오고 침향의 향기가 가득 차올랐다.

▲새벽묵언차회 안내문 ⓒ 김경준
참석자들은 차를 마시며 독서와 명상 등 저마다 할 일을 하면 된다. 다만 휴대폰 사용은 자제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른바 '디지털 디톡스'를 경험해보라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시간만큼은 휴대폰과 거리를 둔 채 잠시 속세를 잊어보기로 했다.
원래는 독서를 하기 위해 책을 두 권이나 챙겨왔지만, 한참 동안 책을 펼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고요한 분위기에 압도당해 나도 모르게 명상 아닌 명상에 빠져버린 탓이다. 누가 옆에 와서 툭툭 쳐도 모를만큼 깊은 상념에 잠긴 채 계속 차를 들이켰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독소를 배출하듯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매일 차를 마시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어서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행여 누가 볼까 싶어 얼른 티슈로 눈물을 훔쳤다. 다행히 불을 다 끈 채 각자 할 일에 집중하고 있는 터라 들키지는 않았다.

▲밤새 잠들어있던 몸과 마음을 깨우는 보이차 한 잔 ⓒ 김경준
잠시 감정을 추스른 뒤 독서를 시작했다. 사실 밤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상태라 과연 글자가 눈에 들어올까 싶었지만, 어느 순간 독서삼매에 빠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끔은 스스로 ADHD가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집중력 약한 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놀라온 집중력을 발휘해 책을 읽어내려갔다. 덕분에 몇 개월 동안 찔끔찔끔 읽으며 좀처럼 진도를 빼지 못하던 책 한 권을 완독했다.
"오늘의 새벽 묵언 차회는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오전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종료 선언'과 함께 적막이 깨졌다. 차예관에서는 직접 준비한 채소 샐러드와 두부 등으로 아침식사까지 대접했다. 이제는 각자의 시간을 끝내고 음식 앞에 도란도란 모여앉아 서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처음 참석하는 터라 조금 어색했지만, 다들 반갑게 먼저 인사를 건네주어 고마웠다. 아쉽게도 차회가 이렇게 길어질 거라 예상하지 못하고 오전에 다른 일정을 잡아둔 탓에 일찍 일어나야만 했다.

▲차회 후 함께 먹는 아침 ⓒ 김경준
새벽에 마시는 차의 효능
본격적으로 차 생활을 시작한 지 올해로 10년이 넘었지만, 이날 새벽 묵언 차회에서의 경험은 낯설고도 놀랍기만 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자기수양과 건강을 위해 차를 마신다 생각해왔지만, 사실 그동안 차를 마시는 방식이 자기수양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그저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 집에서 영화를 보면서 목을 축이는 음료 정도로 가볍게 대했기에, 차 역시 나에게 그 기운을 온전히 베풀어주지 않았던 것 아닐까. 그런데 이렇듯 온전히 차와 차를 마시는 스스로에게 집중하니, 몸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움직이는 신기한 효능을 경험했던 것이리라.
왜 다들 아침잠을 반납한 채 새벽 같이 일어나 차회에 오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차회에 오기 전 품었던 회의감도 씻겨내려갔다. 가능하다면 앞으로 열리는 새벽 묵언 차회에 꾸준히 출석하고 싶다.
새벽 묵언 차회에 한 번 참석해보는 것을 권한다. 그러나 시간과 장소의 문제로 여의치 않다면 집에서라도 간단하게 나홀로 새벽 묵언 차회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 방법은 어렵지 않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은은한 조명 하나만 킨 채, 유튜브로 명상음악을 틀어놓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나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 고요한 아침에 즐기는 차 한 잔이 여러분의 일상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지 스스로 한 번 경험해보는 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 '새벽 묵언 차회' 문의: @g.u.tea_sangdo (지유명차 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