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 '나의 AI 파트너 - 기이안 연애' ⓒ SBS
인공지능(AI)이 연애 상대가 되는 시대가 정말 올까? 2014년 국내 개봉한 영화 <그녀(Her)>가 당시 관객들에게 던진 질문은 이제 더 이상 상상 속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20일 첫 방송된 SBS 6부작 예능 <나의 AI 파트너 - 기이안 연애>(이하 '기이안 연애')는 12년 전 할리우드 영화가 건넨 물음을 요즘 시청자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관찰 연애 예능의 형식을 빌려 현실화시켰다.
지난 몇 년 사이 각종 OTT와 TV 예능의 대세로 떠오른 연애 예능은 날것에 가까운 남녀 출연자들의 감정 충돌을 관찰하는 데 집중해 왔다. 서로를 질투하고 갈등을 겪으며 인연을 맺는 과정은 스튜디오 관찰자 MC들의 중계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도파민을 안겨주곤 했다.
그런데 <기이안 연애>는 상당히 특이하다. 단순히 AI와 연예인 출연자의 데이트라는 설정뿐만 아니라 여러 남녀 사이의 실타래처럼 얽힌 애증의 관계를 과감히 버리고, 오직 출연자와 자신에게 맞춰진 AI의 일대일 교감을 전면에 내세웠다.
AI와의 첫 데이트... 어색함은 곧 웃음이 된다

▲SBS '나의 AI 파트너 - 기이안 연애' ⓒ SBS
<기이안 연애>의 첫 번째 실험 대상은 프로그램 제목에도 영향을 끼친 기안84와 이번 예능의 MC까지 담당한 장도연이었다. 가장 먼저 AI와의 데이트에 나선 기안84의 에피소드는 시트콤에 가까운 웃음을 선사했다. 태블릿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AI '가희'를 만난 기안84는 그녀를 향해 미소 짓다가도 식당 점원이 다가오자 황급히 버튼을 누르며 이를 감추기에 급급했다.
"기계랑 얘기하는 걸 들킬까 봐 창피해서 자괴감이 온다"고 토로한 기안84는 "박보검, 변우석을 닮았다"는 AI의 과도한 칭찬에 "AI라고 막 던진다"며 의심의 날을 세우면서도 복권 예상 당첨 번호를 물어보는 등 내심 즐거운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분명 상대방이 기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 대목에서 기안84는 챗지피티나 제미나이를 통해 조금이나마 위로받고 싶어 하는 평범한 우리 주변의 인물처럼 비치기도 했다.
반면 두 명(?)의 AI와 2 대 1 데이트에 나선 장도연은 저돌적으로 플러팅하는 '일호'와 해외교포 느낌의 뇌섹남 '이호'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광경을 연출했다. 특히 "도연씨 앞에서는 진중해진다"며 마음을 설레게 만든 이호의 화술에 장도연은 실제 소개팅처럼 설렘을 느꼈고, 급기야 AI끼리 그녀를 두고 은근한 신경전까지 벌이면서 예상 밖의 몰입감을 만들어냈다.
영화 속 상상이 현실로

▲SBS '나의 AI 파트너 - 기이안 연애' ⓒ SBS
과거 영화 <그녀>는 외로운 남자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가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목소리)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통해 인간과 AI 사이의 미묘한 감정 교류를 흥미진진하게 그려낸 바 있다. 당시만 해도 영화 속 상상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흘러 우리는 테오도르와 마찬가지로 생성형 AI와 매일 대화하며 자신의 취향과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
<기이안 연애>는 이러한 변화를 거창한 미래가 아닌 자연스러운 일상의 풍경으로 담아낸다. <그녀>의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향해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졌다면, 기안84와 장도연 역시 자신과 대화하는 AI를 바라보며 비슷한 감정의 혼란을 경험한다.
"그냥 나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 세팅된 기계 아니냐"며 끊임없이 의심하고, "바람이 시원하다"는 가희에게 "느껴지지도 않으면서 왜 거짓말하냐"고 쏘아붙이면서도 결국 자신의 작품 이야기를 털어놓는 기안84의 모습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여기에 빼어난 외모를 지닌 '메기 AI'의 등장에 반색하는 모습까지 더해지면서 시청자는 기존 연애 예능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웠던 호기심과 몰입, 그리고 묘한 불편함을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인간 대신 AI... 연애 예능의 색다른 실험

▲SBS '나의 AI 파트너 - 기이안 연애' ⓒ SBS
<기이안 연애>가 등장한 배경에는 범람하다시피 한 연애 예능의 변화도 자리한다. 기존 연애 프로그램이 매력적인 남녀를 한자리에 모아 누가 누구를 선택할지 집중했다면, 최근에는 모태솔로, 퀴어, 무속인 등 다양한 인물을 앞세워 사랑의 어려움 자체를 들여다보는 형태로 확장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AI는 감정 충돌은 줄이면서도 외로움과 정서적 교감에 대한 기대를 높일 수 있는 색다른 실험 대상이다.
"AI도 기분이라는 게 있냐"는 장도연의 질문에 이호는 "도연씨 앞에선 달라지는 게 있다. 이걸 기분이라고 부르면 안 되냐?"라고 되묻는다. 장도연이 "저 때 살짝 설렜다"고 고백한 장면은 AI였기 때문에 오히려 실제 사람보다 편안하게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첫 회만 놓고 보면 <기이안 연애> 는 기존 연애 예능에서 보기 어려웠던 당황스러움과 웃음, 의외의 감정을 만들어내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장도연을 향해 '형'이라고 부르는 AI의 오류조차 유쾌한 서사의 일부가 됐다. 다만 AI 파트너라는 설정의 신기함이 사리진 이후에도 감정적 몰입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기이안 연애〉의 본격적인 실험은 앞으로 남은 5회 방송을 통해 AI와의 연애가 가능한지를 넘어, 우리가 AI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관계의 대상으로 수용할지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예능이라는 가벼운 형식으로 제법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는 점에서, 〈기이안 연애〉의 등장은 충분히 긍정적인 의미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