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가 다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실패와 좌절을 겪다가 계획이 일부 변경되기도 하고 아예 폐기되기도 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애초의 계획을 바꾸지 않았다면 놀라운 작품이 탄생하지 못할뻔했을. '곤충학자 김종선과 시인 김청미가 만든'이란 부제가 붙은 <정원의 비밀>(2026년 8월 출간)이 그 한 예가 되겠다.
에세이로 분류되는 이 책을 나는 '자전적 생태 소설'로 읽었다. 만약 처음 계획대로 책 작업이 이루어졌다면 그런 느낌과 감동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의 두 공동 저자는 남매 사이다. 원래는 곤충학자인 오빠의 사진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작업이었다. 시인 동생의 몫은 오빠의 사진에 어울리는 좋은 시구를 두세 줄씩 곁들이는 정도였다.
시집 몇백 권을 뒤져 사진과 어울리는 시를 찾았고, 시인들에게 수록 동의까지 받는다. 하지만 뒤에 해결해야 할 까다로운 문제가 생기고, '남의 시를 얹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주변의 의견도 있어서 결국 방향을 튼 것이었다. 오빠가 쓴 곤충과 꽃에 대한 과학적인 글에 동생은 유명인의 시가 아닌 자신이 살아온 삶으로 문학을 입히는 작업을 하게 된다.

▲곤충학자 김종선과 시인 김청미가 만든 <정원의 비밀>(새로운눈, 2026년) 표지 ⓒ 새로운눈
이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부터 5장까지는 곤충학자 오빠가 찍은 사진과 글에 김청미 시인이 자신의 개인사와 가족사를 중심으로 인간의 삶과 곤충의 삶이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6장은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진화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공진화(coevolution)에 관한 내용을 오빠가 생물학자로서의 생각을 담았다. 동생 시인은 시집 <청미 처방전>을 출간한 약사 시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장 제목은 '나비야 약국 가자'이다. 작은멋쟁이 나비와 백일홍, 큰멋쟁이나비와 엉겅퀴, 암끝표범나비(수컷)와 배초향을 시작으로 30여 종의 나비와 꽃이 짝으로 등장한다. 나비 혼자, 혹은 꽃 혼자 출연한 사례는 없다. 곤충과 꽃과의 상생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도 진귀한 사실이라도 알아낸 듯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작은멋쟁이나비 두 마리가 분홍빛 백일홍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들이 날개 무늬는 정교하고 화려하여 마치 고대 그리스인들이 불렀던 이름처럼 자유로운 영혼(Psyche)의 상징 같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풍경 뒤에는 꽃의 꿀을 얻기 위해 중력을 이기고 끊임없이 날갯짓해야 하는 치열한 생존이 숨어 있다."-(15쪽)
사진 설명에 이어지는 첫 가족사의 주인공은 아빠다. 3남 2녀의 자식을 둔 아빠는 손 귀한 집안의 장손이며 외아들이다. 결혼하지 않으면 대학을 보내지 않겠다는 할아버지의 엄포에 못 이겨 엄마와 결혼한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찍은 약혼 자신 속 아빠와 엄마는 한 쌍의 나비 같다. 분홍빛 백일홍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한 쌍의 작은멋쟁이나비를 상상해 보시라.
"청띠제비나비는 여름이 깊어질수록 청색 띠가 더 짙어진다. 호랑나비과(科)임에도 꼬리가 없는 독특한 나비는 더 가볍고 역동적인 비행을 선보인다. 이 모습은 짜장면이라는 '맛의 신세계'를 탐하기 위해 책 속 세상을 유영하며 마침내 '찬란한 식욕'으로 세상 밖으로 날아오른 나의 모습이다. 엉겅퀴는 벌과 나비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개방된 양지바른 곳에 피어난다." -(31쪽)
나비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짜장면 얘기가 나와서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내 인생의 첫 짜장면'이란 꼭지의 글에는 기적처럼 병이 완치된 아빠가 교사 임용고시를 거쳐 여수여고 국어 선생님으로 발령이 난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어느 날, 여수 하숙집에 다녀온 엄마에게 할아버지는 아들이 어찌 지내는지 물으신다. 엄마의 대답이다.
"아범 속옷이 똥니들 운동장입니다."
*똥니: 작은 머릿니와는 다르게 크고 살이 쪘다. 주로 올 솔기 사이에서 산다.
책에는 친절하게 '똥니'에 대한 주석이 달려 있다. 엄마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당장 짐 싸서 여수로 가라"는 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랄까. 해남에서 여수 가는 버스를 갈아탈 때 엄마는 자식들을 작은 중국집으로 데리고 간다. '내 인생의 첫 짜장면'과의 황홀한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그 후 다시 짜장면 맛을 본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여수에서 돌아온 뒤였다. 해남읍에서 열리는 학교 대항 독서 경합에 나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담당 선생님이 사준 음식이 짜장면이었다. 본선에 진출해서 광주에 가니 또 짜장면을 사주었다. 그때 어렴풋이 알게 된다. 학교 대표주자가 되면 짜장면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처마 밑이나 나무 위에 잠든 철새를 잡으러 오빠들을 따라다녔다. "참새의 따뜻한 가슴이 만져져서 가슴이 콩닥콩닥 미안했지만 너무 맛있어서 포기할 수 없는 참새잡이였다"고 회상하는 장면에서 코끝이 찡해진다.
그렇게 놀다가도 집으로 돌아오면 오빠들의 심부름과 동생을 돌보는 일, 그리고 청소와 설거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네발나비는 어른벌레로 혹독한 겨울을 나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다. 그 과정에서 날개가 상해 애처로운 흔적을 몸에 새기기도 한다. 할머니가 된 시인은 이렇게 회고의 글을 썼다.
"한때는 그저 남자가 되고 싶던 작은 애벌레였지만, 이제 할머니가 되어 돌아보니 깨닫는다. 여자라는 성별을 원망하고, 남자가 되기를 꿈꾸며 몸부림쳤던 그 모든 과정이, 나를 비로소 '인간'으로 완성하는 고난의 수난이었음을."-(41쪽)
이 책에는 1970~80년대 우리가 했던 놀이나 풍경이 손에 잡힐 듯한 생생한 언어로 고스란히 복원되어 있다. 지금은 사라진 놀이나 풍광들은 사회가 진화되면서 자연스레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강한 충동이 느껴졌을 정도다.
자치기, 딱지치기, 제기차기, 구슬치기, 연날리기, 말타기 등 주로 사내아이들이 즐겨 하던 놀이를 동생 시인이 좋아한 것은 남자 형제들 틈에서 자란 탓도 있었다. 책에는 특히 딱지치기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는데 읽다가 마음이 뭉클해진 대목이다.
"진정한 딱지치기 고수는 용호상박 치열한 전투 속에 차지한 전리품들을 모조리 챙겨 집으로 가져가지 않는다. 딱지를 잃은 또래들에게 돌려주며 또다시 내일의 전투를 기약하였다."-(66쪽)
2장부터 5장까지 곤충과 꽃 이야기가 계속된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 이야기 양상이 조금씩 달라지고 깊어진다. 이 책의 여성 화자인 동생 시인이 마냥 어린 소녀 아이가 아닌 것이다. 사춘기를 겪게 되면서 작은 로맨스도 생기고 상실의 아픔도 겪게 된다. 지금은 귀여운 손주들을 둔 할머니가 되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이 책이 감동적인 것은 이런 개인사들이 곤충과 꽃들의 삶과 연계하여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일반적인 산문 형식을 벗어난 독특하고 이색적인 스토리텔링의 구조와 방식으로 통섭(統攝)의 지혜가 작동하는 '정원의 비밀'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두 구절만 소개한다. 두 문장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 상상하면서 읽어봐도 좋겠다.
"오랜 인고 끝에 얻은 인정 한마디로도 삶의 억울함을 씻어낸 인간의 서사는 '존재의 증명'이라는 점에서 "나 여기 있소" 우는 베짱이의 소리이다. 그 어두운 시간을 견뎌냈기에 단 한 번의 칭찬으로 날개를 펴고 비로소 '여성'을 넘어 온전한 '인간'으로 비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123쪽)
"시든 줄 알았던 내 안의 씨앗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것을 이기고 단단해졌다. 나는 누구의 인정도 필요 없이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데리고 온 가시 돋친 삶은 어떤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보랏빛 딴딴한 엉겅퀴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305쪽)
우리가 사는 푸른 별 지구에는 태양 빛을 근원으로 약 30만 종의 식물(꽃이 피는 현화식물, 약 28만 6000종)과 약 100만 종에 이르는 곤충이 살고 있다고 한다. 어떤 식물은 특정한 곤충만이 꽃가루받이의 역할을 하도록 진화한다. 이것이 '공진화'라고 곤충학자 김종선은 말한다.
그중 일부이긴 하지만, 사진으로나마 이 책을 통해 125종의 곤충과 꽃을 대면한 나는 어제의 나와는 다른 '나'일 것이다. 귀한 책을 만들어준 두 남매 작가에게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