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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논산시 은진면 방축4리 토끼재 논둑에 서 있는 선돌. 마을에는 이 돌이 백제와 신라의 경계를 표시하던 돌이라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전해온다.
충남 논산시 은진면 방축4리 토끼재 논둑에 서 있는 선돌. 마을에는 이 돌이 백제와 신라의 경계를 표시하던 돌이라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전해온다. ⓒ 서준석

충남 논산시 은진면 방축4리 토끼재.

면 소재지인 연서리에서 차로 10여 분 달려 나지막한 산을 넘어 마을로 들어서면 논과 밭이 이어진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농촌 풍경이다. 마을회관 앞 우물터를 돌아 200여 미터 들어가다 보면 눈길을 붙잡는 돌 하나가 나타난다.

사람 키에 가까운 커다란 돌이 논둑에 박힌 채 서 있다. 이름을 새긴 것도 아니고, 비석처럼 반듯하게 다듬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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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를 '선돌'이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서 있는 돌'이다. 한자로는 입석(立石)이라 한다.

그런데 이 돌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따라다닌다.

"백제와 신라의 경계를 표시하던 돌이다." 사실이라면 논두렁의 이름 없는 돌이 1300여 년 전 삼국의 경계를 증언하는 셈이다.

과연 그럴까.

"나도 어릴 때부터 그렇게 들었지"

마을에서 만난 방축4리 이장 박종대(73)씨는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토박이다. 선돌 이야기를 꺼내자 박 씨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어렸을 때도 선돌은 있었어요. 백제하고 신라의 경계를 표시하던 돌이라는 이야기도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지."

적어도 박 씨가 어린 시절부터 마을 어른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졌다는 얘기다. 그 이야기를 들려준 윗세대까지 생각하면 전승의 시간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

 나즈막한 산언덕 입구에 들어서면 담벼락에 토끼재라는 이름은 만나게 된다. 논산시 은진면 방축4리 로 마을 곳곳에 토끼모형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나즈막한 산언덕 입구에 들어서면 담벼락에 토끼재라는 이름은 만나게 된다. 논산시 은진면 방축4리 로 마을 곳곳에 토끼모형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 서준석

 방축4리 토끼재 마을을 둘러싼 산자락. 토박이 박종대 이장은 “어릴 때부터 산에 ‘토끼혈’이 있고 산 모양이 토끼처럼 생겨 토끼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방축4리 토끼재 마을을 둘러싼 산자락. 토박이 박종대 이장은 “어릴 때부터 산에 ‘토끼혈’이 있고 산 모양이 토끼처럼 생겨 토끼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 서준석

'토끼재'라는 마을 이름에도 옛이야기가 숨어 있다.

박씨는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고 했다. 그것은 마을로 들어오는 산의 생김새와 관련돼 있다.

"산에 토끼혈이 있다고 했어. 산 모양이 토끼처럼 생겼다고 해서 토끼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지."

풍수에서 혈(穴)은 산의 기운이 모이는 곳을 가리킨다. 옛사람들은 산의 생김새를 용이나 호랑이, 소, 토끼 같은 동물에 빗대기도 했다.

토끼를 닮았다는 산 아래 자리한 토끼재 마을. 그리고 그 앞을 오랫동안 지켜온 선돌. 오래된 지명과 돌 이야기가 한 공간에서 만난다.

하나가 아니라 두 개다

 논산시 은진면 방축4리(토끼재) 마을에는 약 70m 간격을 두고 두 개의 선돌이 남아 있다. 주민들은 과거 일정한 간격으로 여러 개의 선돌이 있었다고 전한다.
논산시 은진면 방축4리(토끼재) 마을에는 약 70m 간격을 두고 두 개의 선돌이 남아 있다. 주민들은 과거 일정한 간격으로 여러 개의 선돌이 있었다고 전한다. ⓒ 서준석

토끼재 선돌이 눈길을 끄는 것은 돌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논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선돌이 약 70m 떨어져 서 있었다.

마을을 바라보고 오른쪽 논둑에 있는 선돌은 땅 위로 드러난 높이가 약 140㎝다. 위쪽 너비는 약 30㎝, 아래쪽은 약 60㎝다. 왼쪽 길가의 선돌은 높이 약 120㎝, 위쪽 너비 약 40㎝다. 두 돌 모두 아래쪽은 땅속에 묻혀 있다.

더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한다. 예전에는 두 개뿐 아니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러 개의 선돌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러 돌이 줄지어 있었다면 '경계'를 떠올릴 만하다. 마을 사람들이 이 돌을 백제와 신라의 경계표지라고 이야기하게 된 배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해오는 이야기는 역사를 찾아가는 단서일 뿐 그 자체가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옛기록을 보면 1300여 년 전, 황산벌에서는 논산이 백제와 신라가 맞붙었던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인 660년 7월 기록에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황산으로 진군했다고 적혀 있다.

"庾信等進軍於黃山之原(유신등진군어황산지원)."

'유신 등이 황산의 벌판으로 진군했다'는 뜻이다.

계백은 결사대 5000명을 이끌고 험한 곳을 먼저 차지한 뒤 세 곳에 진을 쳤다. 백제군은 네 차례 싸움에서 신라군을 몰아붙였지만 결국 병력의 차이를 넘지 못했다.

황산벌은 오늘날 논산시 연산면 천호산과 개태사 주변 들판을 중심으로 비정된다. 토끼재에서 그리 멀지 않다.

백제 멸망 직전의 기록에는 '탄현(炭峴)'이라는 고개도 등장한다. 백제의 충신들은 신라군을 막으려면 육로의 탄현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탄현이 어디인지는 지금도 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금산군 진산면 일대가 유력 후보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고, 대전 흑석동산성 주변을 지목하는 견해도 있다.

신라군이 백제 수도 사비로 향했고 그 길목인 논산 황산벌에서 백제군과 마지막 결전을 벌였다는 것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토끼재 선돌을 백제와 신라의 국경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고대 기록에는 방축리 선돌에 관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1872년 옛 지도에도 답은 없었다

조선시대 기록으로 시간을 옮겨도 선돌의 정체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방축리가 속한 은진은 오래된 고을이다. 이 일대에는 백제 때 덕근군(德近郡)과 가지내(加知奈)가 있었다. 조선 세종 때 덕은과 시진을 합쳐 은진현이 됐다.

 1872년에 제작된 「은진지도(恩津地圖)」. 조선 후기 은진현의 산줄기와 물길, 도로 등을 그렸다. 현재까지 확인된 옛 지리지와 지도에서는 토끼재 선돌을 백제·신라 경계석으로 기록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빨간색 육각형 표시 지점이 현재 방축 4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캡쳐)
1872년에 제작된 「은진지도(恩津地圖)」. 조선 후기 은진현의 산줄기와 물길, 도로 등을 그렸다. 현재까지 확인된 옛 지리지와 지도에서는 토끼재 선돌을 백제·신라 경계석으로 기록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빨간색 육각형 표시 지점이 현재 방축 4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캡쳐) ⓒ 서준석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1872년에 제작된 <은진지도(恩津地圖)>가 남아 있다. 당시 은진현의 산과 물길, 관아와 도로 등이 그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에도 은진의 옛 모습이 전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확인되는 이들 기록과 지도에서 토끼재 선돌을 '백제·신라 경계석'이라고 기록한 대목은 찾기 어렵다.

그렇다고 국경석이 아니었다는 증거도 아니다. 오히려 궁금증은 하나 더 늘어난다.

마을 사람들은 언제부터 이 돌을 백제와 신라의 경계석이라고 이야기했을까.

73세 토박이 박종대씨가 어린 시절부터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증언은 적어도 최근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쓰러지면 제사 지내고 다시 세웠다

 1993년 논산군이 발행한 내고장 으뜸가꾸기 마을이야기에 수록된 방축4리 토끼재 마을에 있는 선돌. 왼쪽은 길가쪽에 있는 선돌이고 오른쪽은 논둑에 있는 선돌이다.
1993년 논산군이 발행한 내고장 으뜸가꾸기 마을이야기에 수록된 방축4리 토끼재 마을에 있는 선돌. 왼쪽은 길가쪽에 있는 선돌이고 오른쪽은 논둑에 있는 선돌이다. ⓒ 서준석

선돌에는 백제·신라 이야기 못지않게 흥미로운 사연이 하나 더 있다. 선돌이 쓰러지면 주민들은 그냥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제사를 지낸 뒤 다시 세웠다고 한다.

돌을 함부로 없애지도 않았다. 잘못 건드렸다가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선돌은 단순한 경계표지를 넘어 마을을 지켜주는 존재가 된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마을 입구나 길목에 돌을 세워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거나 부족한 지세를 보완하려는 풍습이 있었다. 이를 비보(裨補)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마을의 허한 곳을 돌이나 나무 등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토끼재 선돌 역시 처음부터 이런 목적으로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옛길이나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던 돌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수호신처럼 여겨졌을 수도 있다.

반대로 오래전부터 서 있던 선돌에 후대 사람들이 가까운 황산벌의 역사를 연결해 '백제와 신라의 경계석'이라는 이야기를 입혔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쪽이라고 단정하기는 아직 어렵다.

돌에는 글자가 없지만 이야기는 남았다

 왼쪽은 길가쪽에 있는 선돌이고 오른쪽은 논둑에 있는 선돌이다. 1993년에 찍은 사진과 비교해도 큰 변화는 없다.
왼쪽은 길가쪽에 있는 선돌이고 오른쪽은 논둑에 있는 선돌이다. 1993년에 찍은 사진과 비교해도 큰 변화는 없다. ⓒ 서준석

토끼재 선돌에는 글자가 한 자도 없다. 누가 세웠는지, 언제 세웠는지, 왜 세웠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의 기억은 남았다.

일흔을 넘긴 박씨는 지금도 어린 시절 마을 어른들에게 들었던 말을 기억한다.

"백제하고 신라의 경계석이었다고 했지."

그 말을 따라가다 보면 1300여 년 전 황산벌을 만나고, 백제의 옛길을 지나 조선시대 은진의 지도까지 펼쳐보게 된다.

정말 백제와 신라의 경계를 표시했던 돌일까. 아니면 토끼혈을 품었다는 산 아래 마을을 지키던 선돌에 황산벌의 기억이 더해진 것일까.

아직 답은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토끼재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돌을 특별하게 여겼고, 선돌에 얽힌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했다.

논두렁의 이름 없는 두 돌은 오늘도 말없이 서 있다.

돌에는 글자가 없지만, 그 곁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에는 토끼재 선돌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예전 마을 우물터. 지금은 작은 분수대가 마련돼 있다. 우물터 뒷쪽 200미터 부근에 좌우로 선돌이 자리하고 있다. 토끼재 마을의 상징인 토끼모형이 마을 곳곳에 있다.
예전 마을 우물터. 지금은 작은 분수대가 마련돼 있다. 우물터 뒷쪽 200미터 부근에 좌우로 선돌이 자리하고 있다. 토끼재 마을의 상징인 토끼모형이 마을 곳곳에 있다. ⓒ 서준석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논산포커스에도 실립니다.


#선돌#논산시#토끼재#은진면방축4리#논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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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시와 계룡시의 풀뿌리 지역신문인 논산포커스 기자입니다. 국가유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시민과 함께 지역신문의 가치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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