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념촬영‘광복잇길' 기림비 제막식에 참석하여 강태선(가운데) 애국지사와 기념촬영 하는 참가자들 ⓒ 고창남
80여년 전, 서슬퍼런 적국의 심장부에서 옥고와 고문을 견디며 조국의 해방을 확신했던 스무 살 청년이 있었다. 온갖 억압 앞에서도 민족의 자존을 지켜냈던 청년은 어느덧 백수를 넘긴 102세의 노투사가 되어 고향 제주의 푸른 바닷길 위에 섰다.
제81주년 광복절인 15일 오후 3시,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 일원에서 도내 유일의 생존 독립유공자인 강태선(102세) 애국지사의 숭고한 헌신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미래 세대로 잇는 '광복잇길' 기림비 제막식이 엄숙하게 거행됐다.
제주올레 1코스의 출발점이자 강태선 지사가 나고 자란 탯자리인 시흥리에서 열린 이날 행사에는 강 지사와 유가족, 지역 주민을 비롯해 고의숙 제주도교육감, 김성범 국회의원, 송영훈 제주도의회의장, 강석구 제주도보훈청장(위성곤 도지사 대독) 등 각계 주요 인사와 미래 세대 청소년 등 100여 명이 참석해 뜻깊은 역사의 첫걸음을 함께 내디뎠다.
"일본은 반드시 패망한다"… 20세 청년이 법정에서 던진 일갈
1924년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에서 태어난 강태선 지사는 15세이던 1939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낯선 타국에서 마주한 것은 식민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감내해야 했던 차별과 멸시였다. 결국 학교를 중퇴해야 했던 그는 좌절하는 대신 홀로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독학으로 지식을 쌓던 청년 강태선은 삼민주의와 민족자결주의를 접하며 나라의 자주독립 없이는 개인의 존엄도 지킬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1942년, 그는 유학생 지원호, 심종보(청수종보) 등 뜻을 같이하는 동지 5명과 함께 비밀 결사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항일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일제 사복경찰의 감시망에 걸려 1943년 9월 체포됐고, 모진 고문과 가혹한 취조를 겪어야 했다. 혹독한 탄압 앞에서도 청년의 결기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1944년 3월, 만 20세의 나이로 오사카지방재판소 피고인석에 섰을 때의 일화는 일제강점기 항일사의 빛나는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중형을 선고하는 재판부를 향해 강 지사는 "일본은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고 거침없이 사자후를 토해냈다. 일제의 전시 광기가 극에 달했던 시절, 식민지 청년이 적의 법정에서 던진 이 일갈은 꺾이지 않는 민족의 기개였다.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그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해 출옥했고, 이듬해인 1946년에야 그리운 고향 제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돌아온 지사는 평범한 일상을 살면서도 결코 독립의 참뜻을 잊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인정해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기념식수“광복의 정신을 걸음으로 잇는다”는‘광복잇길' 기림비 제막식에 참석하여 ‘황근'을 기념식수로 심는 참가자들 ⓒ 고창남
황동 발자국과 자생 '황근'… 길 위에서 살아 숨 쉬는 '기억의 연대'
자생의료재단과 자생한방병원이 주도하고 제주특별자치도, 제주도보훈청, 시흥리마을회가 뜻을 모아 조성한 '광복잇길'은 독립운동가의 얼이 깃든 지역을 찾아 그들의 삶을 도보 여행길로 재해석한 '참여형 기억 문화 공간'이다. 전국으로 이어질 '광복잇길'의 첫 번째 이정표는 강태선 지사의 숨결과 삶이 오롯이 서려 있는 고향 시흥리에 세워졌다.
이날 제막된 기림비에는 강태선 지사의 실제 발 모양을 본떠 황동으로 정교하게 제작한 '발자국 작품'이 새겨져 눈길을 끌었다. 선열이 걸어간 험난했던 고난의 길을 오늘날 우리가 딛고, 미래 세대가 그 발걸음을 이어가겠다는 다짐을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기림비 주변에는 토종 무궁화인 '황근(黃槿)'을 기념식수로 심었다. 성산·오조리 해안가 바위틈에서 거친 해풍을 견디며 한여름 광복절 즈음에 노란 꽃을 피워내는 황근은 멸종위기 야생생물이자 국내 유일의 자생 무궁화다. 모진 억압 속에서도 끝내 굴하지 않았던 독립투사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절개를 오롯이 상징한다.
'애국지사 한 명, 황근 한 그루, 미래 세대 학생 한 명'을 잇는 이 길의 취지에 공감해 문화예술계와 교육계의 온정도 이어졌다. 정예실 시인(제주어보존회 이사장)은 자작 헌정 시 '광복의 빛 사람 잇길'을 낭송해 숙연함을 더했고, 칠예술가 전용복 장인은 정성을 다해 옻칠로 완성한 강태선 지사의 초상화를 헌정했다. 대안학교인 별꼴학교 학생들과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들의 특별공연, 그리고 제주 출신 고봉조 애국지사의 유족인 안금숙 씨의 참석은 행사의 의미를 한층 두텁게 했다.
강 지사의 아들 강대성 서울제주 균형발전시민연합회 이사장은 가족을 대표해 "아버님의 뜻을 잊지 않고 고향에 이처럼 뜻깊은 길을 열어준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우리말 잊은 후손들 가슴 아파… 각별히 살펴달라" 102세 지사의 눈물겨운 호소
기림비 제막식에 앞서 이날 오후 위성곤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서귀포시 성산읍에 위치한 강태선 지사의 자택을 직접 찾아 위문품을 전달하고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했다. 마침 광복절을 앞두고 호남의 이석규 애국지사가 타계하면서, 현재 국내에 생존한 독립유공자는 강태선·오성규·김영관 지사 단 세 분에 불과하다. 제주에서는 강 지사가 유일하다.

▲강태선과 위성곤제81주년 광복절을 맞아 성산읍 강태선 애국지사를 찾아 위로하는 위성곤 제주도지사. ⓒ 제주특별자치도 제공
위성곤 지사는 "가뭄으로 걱정하던 도민들에게 광복절 단비가 내린 것처럼,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지사님께서 도민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 같다"며 "애국지사를 자주 찾아뵙고 불편함이 없도록 챙기는 것은 후대의 마땅한 도리이며, 독립유공자와 보훈 가족이 존경받는 제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에 강태선 지사는 도지사의 방문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평생 가슴 깊은 곳에 맺혀 있던 동지들과 그 후손들에 대한 애타는 심경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독립운동을 하느라 남겨진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고국을 떠나야 했고, 자식들은 낯선 타국에서 살아남느라 우리말조차 잊고 살았습니다. 그 기막힌 사정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고 아픕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어디서든 자긍심을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각별히 살펴주십시오."
백 살을 넘긴 노지사의 주름진 눈가에 맺힌 눈물은 오늘날 번영을 누리는 대한민국이 누구의 눈물과 희생 위에 서 있는지를 준엄하게 묻고 있었다.
위성곤 지사는 "선대의 거룩한 희생이 결코 후손들에게 짐이나 한(恨)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해외에 흩어진 후손들이 우리말을 배우고 민족의 뿌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실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보훈 가족의 자긍심을 지키는 데 제주도가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화답했다.
제주에서 전국으로 번져갈 기억의 길… "역사는 실천할 때 미래가 된다"
제막식 현장에 모인 지역 사회 지도자들도 '광복잇길'이 전할 역사적 가치에 한목소리로 힘을 보탰다.

▲광복잇길 기념촬영‘광복잇길 기억을 심고 미래를 잇다’는 현수막 앞에서 기념촬영 하는 참가자들 ⓒ 고창남
강석구 보훈청장이 대독한 축사에서 위성곤 지사는 "광복잇길은 선열들의 숭고한 나라 사랑 정신을 미래 세대에게 생생하게 전하는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송영훈 도의회의장 역시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숭고한 뜻을 미래로 잇는 보훈의 터전이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으며, 김성범 국회의원은 "과거의 상흔을 딛고 희망찬 내일로 나아가는 일에 국회 차원에서도 최선을 다해 뒷받침하겠다"고 약속했다.
고의숙 교육감은 "제주의 역사와 마을의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을 올곧은 민주 시민으로 키워내는 귀중한 배움의 원천"이라며 "기억은 이어질 때 역사가 되고, 역사는 실천할 때 비로소 미래가 된다"고 울림 있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번 프로젝트를 이끈 신민식 자생의료재단 사회공헌위원장은 집안 대대로 독립운동에 헌신해 온 가문의 내력을 전하며, 지난 수년간 현장에서 생존 지사들을 직접 찾아가는 방문 진료를 펼치며 느꼈던 소회를 담담히 털어놓았다. 신 위원장은 "제주 성산의 푸른 바닷가에서 뗀 작은 첫걸음이 씨앗이 되어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가길 바란다"며 "앞으로 전국 각지의 항일 유적지에 '기억의 길'을 잇달아 조성해, 국민 누구나 일상 속에서 선열들의 희생을 되새기며 걸을 수 있는 거대한 역사 순례길을 완성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광복절을 앞둔 지난 13일, 훈장을 품에 안고 카메라 앞에 섰던 102세의 청년 강태선은 우리 사회를 향해 "질곡의 역사를 견뎌온 우리가 이제는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며 서로 사랑하고 통합해 살아가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남겼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청춘을 바쳤던 선열의 발자국 위에 오늘 우리가 딛는 한 걸음, 그리고 내일의 아이들이 내딛을 발걸음이 포개질 때 비로소 진정한 광복은 완성된다. 성산의 푸른 바닷바람 속에 피어난 '광복잇길'의 노란 황근 꽃망울이 그 희망찬 미래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