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하겠습니다." "법적 책임을 묻겠습니다."
요즘 일상에서 지극히 사소한 갈등조차 쉽게 법적 문제로 비화하곤 한다. 거대한 비즈니스 계약이나 대형 범죄 현장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들이 평범한 이웃과의 대화, SNS상의 한 줄 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어김없이 등장한다. 자신에게 불쾌감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기다렸다는 듯 '법적 대응'을 들먹이는 시대다.
물론 명백한 허위사실이나 심각한 인권 침해,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다면 당연히 법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법은 억울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무조건 참고 넘어가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대화로 풀어갈 수 있는 자리에서조차 너무 쉽게 '법'부터 꺼내 드는 현실을 짚어보고 싶은 것이다.
상대방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에 대한 비판이 불쾌했다고, 혹은 자존심이 상했다고 해서 곧바로 "고소하겠다"거나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말하는 순간 소통과 대화의 문은 닫혀버린다.
그러나 갈등에는 언제나 맥락이 존재한다. 상대방의 언행이 유난히 거칠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나 역시 상대방을 자극했거나, 평소 쌓여 있던 감정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한쪽의 말과 행동만 떼어내 놓고 누가 옳고 그른지를 단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렇게 따져보면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오래된 속담은 단순한 옛말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하지만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이치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이들은 자신의 언행을 돌아보기에 앞서 상대방의 법적 책임부터 찾아내려 한다. 내가 한 말은 정당한 비판이고, 상대방이 한 말은 명예훼손이라는 식의 아전인수(我田引水)적 태도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문제는 이런 태도가 반복될수록 소통의 여지가 절대적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고 서로의 잘못을 인정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고소'라는 칼자루를 먼저 꺼내 드는 순간, 상대방은 더 이상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싸워야 할 대상이 된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무엇일까.
상식과 대화가 들어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그 빈자리를 분노와 적개심, 승패에 대한 집착이 채우게 된다. 옳고 그름은 뒷전이고 누가 이겼는지가 중요해진다. 갈등을 풀기보다 내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어떻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를 먼저 고민한다.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마저 '누가 이기느냐'의 싸움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그렇게 엄포를 놓고 말싸움에서 이기면 과연 살림살이가 나아지나?
한때는 '목소리 큰 사람이 장땡'이라는 말이 통하던 세상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모습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이 고작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말이라면, 과연 우리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태도가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의 지도층으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유리할 때는 원칙을 이야기하다가도 조금만 불리해지면 법적 대응을 꺼내 드는 리더들의 모습을 우리는 너무 자주 본다. 자신에게 유리할 때는 상식과 원칙을 말하면서, 불리한 순간에는 상대방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법을 이용하는 모습이다.
사회지도층이 작은 갈등에도 법적 책임을 운운하면 사회 전반의 분위기 역시 달라진다. 사람들은 '나도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대화보다 고소를, 설득보다 소송을, 타협보다 법적 대응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모습을 반복해서 목격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이를 하나의 '정상적인 갈등 해결 방식'으로 학습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지도층의 갈등 해결 방식이 사회 전체의 갈등 해결 방식이 되는 것이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법을 앞세울수록 사회가 더 질서 있는 곳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믿지 못하는 무법지대에 가까워질 수 있다. 법이 없는 사회만 무법지대가 아니다. 법이 있어도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작은 갈등마다 법부터 들이밀며, 상대방을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회.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더 경계해야 할 무법지대인지도 모른다.
모든 갈등을 법의 판단으로 가져가는 '정치의 사법화'와 '일상의 사법화'가 심해질수록 우리가 잃는 것은 단순히 대화와 소통의 기회만이 아니다. 서로를 믿고 한 발씩 양보하며 문제를 풀어가는 사회 구성원 사이의 신뢰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법은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
그렇다고 법이 필요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뜻이 아니다. 만연하고 남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법이 꼭 필요할 때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말이다.
요즘 뜻밖에도 스무 살을 갓 넘긴 내 아이들의 태도를 보며 존경심마저 들 때가 있다. 이 아이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작은 금전적 손실을 입었다고 해서 무조건 법적·공식적인 맞대응부터 선택하지 않는다. 손해가 크지 않다면 "그냥 잃어버린 셈 치자"며 무던하게 넘어가기도 한다. 얼핏 보면 답답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로 보일 수도 있다. 나 역시 부모로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말이 있다. 사소한 억울함을 풀겠다고 법적 공방까지 불사하다 보면, 정작 그 과정에서 치러야 할 대가는 생각보다 클 수 있다. 긴 시간과 불편한 절차, 끊임없이 이어지는 신경전, 그리고 마음에 남는 상처와 스트레스까지.
설령 재판이나 법적 절차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에게 책임을 물었다는 사실만으로 과연 내 마음까지 온전히 평화로워질 수 있을까. 재판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난 뒤 손에 쥔 것은 '승리'라는 결과 하나인데,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소중한 시간들은 과연 누가 돌려줄 수 있을지. 그래서 요즘 50대인 내가 이제 스무 살을 갓 넘긴 아이들에게 배우고 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세상의 모든 불쾌함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 갈등을 단죄하기위해 굳이 내가 법으로 풀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때로는 조금 억울해도, 조금 불쾌해도 그냥 털어낼 줄 아는 너그러움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어쩌면 성숙한 어른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싸움에서 이기는 능력이 아니라, 싸우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크게 만들지 않는 지혜인지도 모른다.
정치든 일상이든, 걸핏하면 법적 책임을 외치며 상대방을 위협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키우는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않다. 때로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한 발 물러서는 데서 진짜 어른다움이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 개봉한 신작 영화 <오디세이>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진정 강한 사람은 아니다. 싸움에서 이겼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삶의 승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잘못된 싸움에 매달리다 보면 정작 돌아가야 할 곳을 잃고, 오디세우스처럼 오랜 시간 세상을 헤매야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진짜 강함은 상대를 무릎 꿇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 발 물러설 수 있는 힘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다시 상식의 시대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이며, 지금 우리가 잊어버린 '어른다움'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