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31일 이근행 전 MBC콘텐츠전략본부장이 자신의 SNS에 'MBC의 담대한 변화를 만들어내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리며 차기 MBC 사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1991년 시사교양 PD로 MBC에 입사한 이 전 본부장은 <인간시대>, <PD수첩>, <성공시대>, <경찰청사람들>, <휴먼다큐 사랑> 등을 연출했고, 이명박 정부 초반 언론노조 MBC본부장을 역임하며 정권의 언론 장악 시도에 맞섰다.
이 전 본부장은 'MBC의 담대한 변화를 만들어내겠습니다'라는 글에서 MBC만의 품격 있는 저널리즘을 구현하겠다는 등 네 가지 구상을 밝혔다. 사장 출마 포부를 들어보고자 지난 5일 서울 당산역 인근 커피숍에서 이 전 본부장을 만났다. 다음은 이 전 본부장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공영방송 가치는 강화하되, 체질·구조는 과감하게 바꾸겠다"

▲이근행 전 MBC콘텐츠전략본부장 ⓒ 이근행 제공
- 차기 MBC 사장 공모에 출사표를 던지셨어요. 준비는 잘 돼가나요?
"지난해 8월에 방송 3법이 개정됐잖아요. 방송문화진흥회가 출범하고 차기 사장 공모까지 1년이 걸렸어요. 방송 환경이 급변하고 공영방송의 위기는 더 깊어지는 상황인데 많이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K-콘텐츠 산업의 활로를 찾는 문제, 공영방송 MBC가 신뢰를 높이고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문제 등을 깊이 고민해왔어요. 저는 '신뢰 우선(Trust first)' 원칙하에, 공영방송의 본질적 가치는 강화하면서도 본업의 체질과 구조는 과감히 바꿔야 한다는 관점에서 실행 방안들을 준비했습니다."
- 사장 출마는 어떻게 하게 됐나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한국 사회가 지금 직면한 현실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MBC의 상황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위험한 수준에 와 있다고 봐요. 경제적으로 보면 모든 분야가 양극화돼 있어요. 길을 가다 보면 빈 사무실, 폐업한 가게가 즐비하고, 인구는 주는데 청년 실업은 늘어나죠. 일부 대기업만 잘 나갈 뿐 사람들은 서로의 몫을 빼앗는 제로섬 게임 상황이고, 미디어산업 안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정치적으로는 상황이 더 심각한데, 극도로 진영화되면서 부족주의(Tribalism)와 탈진실(Post-truth)이 지배적인 현상이 됐습니다. 사람 간의 관계에는 적대와 혐오가 넘쳐나는데, 불행히도 기성 언론은 이런 상황에서 제 역할을 못 했고 팬덤에 의지한 정치 유튜버들만 기승을 부리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민주주의 공론장을 회복하는 일이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이고, 그 역할을 공영방송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아무래도 최근에 JTBC가 부도 났잖아요. 그 때문에 위기감이 클 것 같아요.
"거대 미디어 기업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걸 보여준 사건이죠. 방송콘텐츠산업의 구조적 문제와 개별 회사의 경영 문제가 함께 작동해서 발생했다고 봅니다. MBC는 지난해 영업 적자가 276억 원이었고, 그룹 전체로는 876억 원 적자예요. 핵심 콘텐츠인 드라마 경쟁력도 더 추락했고요.
회사 내에서 40대 이하 구성원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안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무기력과 비효율은 개선되지 않고 있고, 반목과 갈등은 커지고 있습니다. 누적된 문제를 방치하지 말고 드러내서 해결해야 해요. 회사 곳곳에 변화를 위한 애자일(Agile) 조직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MBC에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적극 소통하고, 과감히 실행할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조직의 화합을 이끌어내 미래를 개척할 에너지로 바꿔야 해요. 그런 마음으로 사장이라는 험난한 자리를 감당해 보려는 겁니다."
- 왜 이근행 PD가 사장이 되어야 할까요?
"저는 MBC에 PD로 입사해서 <인간시대>, <PD수첩>, <성공시대>, <경찰청사람들>, <휴먼다큐 사랑> 등을 제작했습니다. 또 권력이 MBC를 장악하려 했을 때 모두가 피하던 노조위원장 자리를 맡아 방송 독립을 지켰고요. 저는 양심을 지킨 언론인입니다. 해고된 뒤에는 독립 언론 뉴스타파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새로운 언론상을 보여드렸습니다. 회사 본부장 임원이 되어서는 지상파 방송 평가 1위와 대규모 흑자 경영을 함께 이뤘고요.
차기 경영진은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문제를 떠안게 될 거고, 한층 심화된 위기 속에서 일해야 할 겁니다. 실천도 경험도 없는 리더십은 공허합니다. 책임의 무거움은 감당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어요. 저는 그 과정에서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강해졌습니다. 개혁과 혁신으로 MBC를 다시 세울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 지금 MBC의 문제는 뭐라고 보세요?
"문제의 원인이 안팎으로 다양해서 복합 위기라고 생각해요. 권력에 의해 독립성을 위협받았고, 민주사회 공론장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콘텐츠 시장은 오래전에 디지털로 옮겨갔는데 우리는 기존 시스템에 안주했고, 글로벌 OTT의 파상공세에도 전략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리더십의 불안정성과 실행 의지 부족도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MBC만의 품격 있는 저널리즘을 구현하겠다고 하셨던데 어떻게 구현할 생각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품격 있는 저널리즘은 '객관적 사실에 충실하며', '차별화되고 영향력 있으며', '시청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뉴스입니다.
방법으로는 첫째, 팩트체크를 한층 더 강화하는 것입니다. 둘째, 심층 탐사보도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 국가 위상에 맞게 우리 시각에서 국제 뉴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기후·환경 변화나 지역 소멸 같은 공동체 문제도 정치 문제 못지않게 비중 있게 다뤄야 하고요. 셋째, 시청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 즉 책무성(Accountability)에 충실하는 겁니다. 시민사회의 의제를 반영하고, 취재·보도의 투명성을 높이고, 오보에는 신속하고 정직하게 대응하는 것입니다.
가짜뉴스와 딥페이크는 앞으로 더 정교해질 겁니다. 이제는 사실을 전하는 것을 넘어 사실을 가려내는 힘을 시민과 함께 키워야 해요. 미디어 리터러시를 공영방송의 중요한 책무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가 2023년 발표한 조사에서 MBC가 신뢰도 1위를 차지했지만, 한편으로는 친민주당 성향이란 평가도 있어요.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은 어떠세요?
"MBC가 신뢰도 1위이면서 동시에 불신도 또한 높다는 게 이 문제의 복잡성을 보여준다고 할까요. 12.3 내란 이후 정치 뉴스 비중이 커지면서 편파성 문제가 더 부각된 측면도 있어요. 인상 비평적으로 친민주당 성향이라 보시는 분들도 계실 거고, 진영화된 정치 환경 탓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평가든 겸손하게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봐요.
제 경험적 판단으로는 MBC 보도가 정권을 가리지 않고 비판해왔어요. 오히려 기계적 균형이나 양비론적 태도가 오랫동안 비판받아왔잖아요. 근래에 'MBC가 관점 있는 뉴스를 표방한다'고들 하는데, 관점은 다양할 수 있기 때문에 독단으로 흐르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외부 크리에이터 적극 양성, 콘텐츠 생태계 복원하고 상생의 축으로"

▲이근행 전 MBC콘텐츠전략본부장 ⓒ 이근행 제공
- MBC를 IP Factory & Creative Network로 변신시키겠다고 하셨잖아요. 이것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한 번 방송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가치와 수익을 창출하는 콘텐츠 자산이 IP예요. 저작권이죠. 제가 콘텐츠전략본부장으로 편성과 광고를 총괄하면서 절실히 느낀 게,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권리를 우리가 갖지 못하면 남는 게 없다는 거였어요. 반대로 <복면가왕>은 우리가 권리를 가진 콘텐츠라서 20개국에 팔리며 지금도 수익을 만들어옵니다.
그러려면 콘텐츠 기획 역량이 높아져야 하고, 원천 IP를 확보하는 조직은 전문화돼야 해요. 개별 콘텐츠의 가치와 수익성을 계산하고, 목표와 보상을 분명히 해야 IP가 축적되고 확장되는 선순환이 만들어집니다. 대작 드라마도 필요하지만 MBC가 강점을 가진 포맷과 프랜차이즈에 집중하는 게 현실적이고요.
Creative Network에는 두 가지 뜻이 있어요. 안으로는 권한을 아래로 넘기고 창작자 중심의 스타트업 같은 조직으로 바꾸자는 거고, 밖으로는 외부와 적극 협력해서 자원과 수익을 나누자는 뜻이에요. 저는 '사람이 곧 IP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크리에이터를 기르고 영입하고 지켜야 그 안에서 슈퍼 IP가 탄생합니다."
- 어떻게 데려올 건가요?
"밖에 있는 유능한 크리에이터가 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하는 거예요. MBC라는 조직이 창작자들을 존중하고, 일할 수 있는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성과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원칙은 내부 구성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돼야 하고요."
- MBC가 무너진 콘텐츠 생태계를 앞장서 복원하고 상생의 중심축이 되겠다고 했는데 지금 넷플릭스나 유튜브로 시청층이 옮겨가는 데 이걸 어떻게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오징어 게임>,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파친코>의 성공은 착시를 불러오고 있어요. 우리 콘텐츠 생태계의 현실은 처참합니다. 드라마 제작 편수는 매년 줄고 있고, 작가와 배우, 스태프들은 대부분 놀고 있어요.
넷플릭스와 디즈니가 던져주는 제작비를 놓고 우리끼리 무한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합종연횡이 왜 있었겠어요. 선판매 방식으로 선택적, 부분적으로 협력하고 남는 재원을 가성비 있는 드라마, 예능 텐트폴, 고품격 다큐멘터리 등에 투자하면 됩니다. 창작자들에게 일할 기회를 더 주고, 각 장르에 맞는 수익 구조를 만들면 돼요. 생태계 복원 없이는 K콘텐츠의 미래도 없습니다. 생태계가 복원되면 시청자들도 돌아올 수 있어요.
상생과 관련해서는 비정규직 문제, 외주제작사 문제, 지역 MBC 문제가 핵심입니다. 지금까지 MBC가 이 문제들에 대해 나름 노력해왔지만 더 전향적이고 적극적일 필요가 있어요. MBC가 기존 인식을 바꿀 정도의 파격적인 조치를 하면 사회 전체적으로 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ESG 경영이고 MBC의 공적 책임이라고 봅니다."
- MBC가 글로벌 콘텐츠 시장에서 Next K-culture를 선도하겠다고 하셨는데 복안은 무엇인가요?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대중문화에서 MBC의 역할을 되찾는 것입니다. 한국 대중음악의 등용문을 만든 건 MBC예요.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가 그랬고, 지금은 <쇼! 음악중심>이 그렇습니다. 요즘 '한국판 코첼라' 같은 대형 음악 축제를 만들자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 경험과 역량을 가진 곳이 바로 MBC예요.
둘째, 문화적 다양성을 책임지는 겁니다. 세계의 좋은 공영방송은 저마다 역할이 있어요. 영국 채널4는 <블랙미러> 같은 작품을 처음 세상에 내놓은 방송사예요. 돈이 되면서도 사회가 던져야 할 질문을 콘텐츠로 만든 거죠. MBC도 한국 사회에서 문화적 다양성과 실험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게 공영방송이 존재하는 이유고요.
셋째, K-culture 융합의 선도자가 되겠습니다. 한류는 K-드라마에서 시작해 K-팝, K-푸드, K-뷰티까지 콘텐츠에서 상품경제로 확장됐어요. 그런데 K를 '한국만의 것'으로 좁게 보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예전엔 MBC도 한일, 한중 합작 드라마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OTT들이 하고 있어요. 이제 'K'는 국적이 아니라 만드는 방식과 수준을 뜻해야 합니다. AI의 발전은 언어적 장벽을 허물고 있고요. 중동·남미·아프리카 등 신흥 시장 창작자들과 '함께 만들고 함께 나누는 콘텐츠', MBC가 앞장서겠습니다."
- 사장이 된다면 꼭 하고 싶은 건 뭔가요?
"지금 MBC에 부족한 건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 구성원들은 자율과 창의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최고의 콘텐츠를 만들어 왔어요. 부족한 건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지면서 반목과 갈등이 생겼거든요.
이제 구성원들이 서로 믿고 마음껏 만들 수 있게 하겠습니다. 모든 일은 사람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상호 신뢰는 조직의 기초이고, 인화는 성과를 만들고 지속시키는 원동력이에요. 사장이 된다면 그 노력을 임기 내내 지속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북의소리>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