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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에 시달린 여름이기에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 때면 '때가 되면 다 때가 온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참고 견디면 결국에는 살만해진다는 가르침에 위로받는다.
헉헉 숨이 막히는 한여름 속에서도 마음에 시원한 바람이 불 때가 있었는데 바로 배롱나무를 마주할 때였다. 눈이 부시게 빛나는 그 아름다운 꽃송이에 취해 잠시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어느 때부터 내가 여름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가 될 만큼 배롱나무의 매력에 푹 빠졌다.
더위 잊을 만큼 아름다운 나무

▲하늘빛과 어울린 배롱나무가 선명하다. ⓒ 한현숙
여름이면 어김없이 피어나고, 지고 피고를 반복하며 뜨거운 여름을 이겨내는 나무, 100일 동안 피고 지는 그 시간 따라 벼도 익어간다는 백일홍, 배롱나무를 알게 된 후 나의 여름이 풍성해졌다.
배롱나무는 '자미화(紫薇花)'로 불릴 만큼 보랏빛이 흔하지만, 붉은 꽃, 흰 꽃도 많다. 반질반질한 나무줄기가 원숭이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끈하다 해서 '원숭이 미끄럼 나무', '간지럼 나무', '백양수'로 불리고 전라도에서는 쌀이 나올 때까지 피는 나무라 하여 '쌀나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 곳곳에 분포되어 장관을 이루는데 특히 소쇄원, 식영정을 비롯해 고창 선운사, 강진 백련사, 경주 서출지등이 배롱나무 군락지로 유명한데, 개인적으로 담양 후산리의 명옥헌을 잊을 수 없다.
뜨거운 태양 아래 무심히 후산길을 걷다가 모퉁이를 돌자 맞이한 배롱나무 무더기. 말문이 막힐 정도로 장관을 이뤄 꽃잔치였다. 꽃들의 향연과 꽃비로 떨어져 연못가를 수놓은 꽃송이들은 8월의 더위를 싹 잊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렇게 나는 배롱나무를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여름이면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관심을 기울이니 이미 곳곳에 배롱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공원에서, 아파트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송이들을 나만 모른 채 지나치고 있었다.
더운 여름에도 강아지와의 산책을 거를 수 없어 그나마 볕이 약한 아침에 산책했는데, 7월말 8월초라 불리는 휴가철 내내 나는 배롱나무와 피서를 즐기고 있었다. 강아지와의 산책, 매미 소리, 마음을 감싸는 음악 그리고 배롱나무가 있었다.
우리 아파트 곳곳에 몇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름다운 배롱나무가 서 있었다. 매끈한 가지 끝에 송이송이 여린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더운 여름을 이겨내고 있었다. 붉은 꽃만 아니라 보라색, 흰색 꽃송이를 품은 배롱나무가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씰룩거리는 강아지 엉덩이를 보며, 눈앞에 펼쳐진 배롱나무의 아름다움을 취하니 이보다 큰 행복이 없었다. 자연이 주는 호사를 마음껏 누리며 몸과 마음을 챙길 수 있었다.
이후 배롱나무를 아직 모르는 이에게 이 나무의 아름다움을 역설하는 사람이 되어 지인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우연히 들른 카페의 배롱나무에 취해 여름 내내 그 카페를 찾았다. 송이송이 떨어져 풍성함을 잃어가는 것조차 자연의 섭리라 여기며 배롱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묵직하게 다가오는 꽃

▲우연히 들른 카페에 배롱나무가 장관이다. ⓒ 한현숙
시인 도종환의 '목백일홍'을 읊어보면 배롱나무가 더 가까이 다가온다.
목백일홍 (도종환)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석 달 열흘을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며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 올려
목백일홍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 없이 꽃잎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아파트에 자리잡은 배롱나무, 송이송이 귀엽고 화사하다. 무더위가 짙어질수록 선명해지는 꽃빛깔이 기특하다. ⓒ 한현숙
배롱배롱 되뇌다 보면 어느새 경쾌한 발음이 나무줄기를 타오르는 듯하다. 가식 없이 매끈하게 다듬어진 줄기를 따라 피어올라 쌀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꽃분홍빛 꽃이 모였다니 더없이 기특하고 야무진 꽃송이다.
피는 꽃, 지는 꽃 말없이 석 달 하고도 열흘 삼세번이나 힘을 내어 서로 어울리며 붉게 물들어가니 더 믿음직스럽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모든 수고를 위로하고 아주 천천히 다음 계절이 올 때, 익어가는 벼에 고개 숙일 시간을 마련하고 나서야 제 소임 다했다는 듯이 빛나는 자리 내어주니 참으로 눈물겹고 묵직하게 다가오는 꽃이다.
다음 여름에도 배롱나무가 있어 설레는 마음일 것이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 자연이 가르치는 섭리에 마음이 건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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