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우아한 목기시대>(시대의창)를 펴낸 이정환 KBS PD. ⓒ 이정환
물에 가라앉는 나무도 있다고? 나무는 항상 물에 뜬다고 생각해왔는데 고정관념이었다. 밀도가 촘촘해서 부피에 비해 무게가 많이 나가는 나무는 물에 가라앉는다. 이정환 KBS PD가 어느 날 목공방에서 자신의 상식을 깨뜨리는, 물에 가라앉는 나무 한 조각을 만났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믿었던 생각을 뒤집어보게 하는 하나의 물음이 됐다.
그 물음이 30년 넘게 방송국에서 일한 그를 '도시나무꾼'으로, 주말마다 목공방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회사에서는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고, 공방에서는 나무를 자르고 깎고 사포질했다.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좇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을 만지고 다듬었다. 그가 만든 목공예품에는 '목기시대(木器時代) urban woodworker Anton'이라는 글귀가 새겨진다. 안톤(Anton)은 '안토니오(Antonius)'를 뜻하는 그의 가톨릭 세례명이다.
이정환의 <나의 우아한 목기시대>(시대의창)는 PD와 도시나무꾼, 그 두 삶 사이에서 태어난 책이다. 책의 제목과 표지만 보면 목공 에세이 같다. 그러나 읽다 보면 목공의 재료가 되는 목재, 그 목재를 제공하는 살아있는 나무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교양서라는 생각이 든다. 그 나무들의 속성은 물론이고 현실과 역사에 맞닿아 있는 이야기들까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문득, 이 책은 결국 한 사람이 지천명(知天命)과 이순(耳順) 사이에서 자기 삶의 결을 다시 되돌아보는 기록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스스로를 '도시나무꾼'이라고 자처하는 그는 50대가 되어서야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늘 "나를 봐달라"고 외치지만, 나무는 한 번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를 묵묵하게 지키고 있을 뿐.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나이에 접어들면서 그는 나무와 주파수를 맞추기 시작했다.
상처를 치유하는 나무, 도끼를 부수는 나무

▲이정환 KBS PD가 회원으로 활동하는 목공방.
ⓒ 이정환
'목기시대(木器時代)'?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를 지나온 인류가 정작 나무와 함께 살아온 시간에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는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어쩌면 저자가 말하는 목기시대는 역사책의 한 시대 구분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자신에게 도착한 삶의 시기일 수도 있겠다. 그 목기시대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오랜시간 '그림(화면)'을 보여주는 PD라는 직업 성향이 책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나무를 설명할 때 단순히 사전에서 나무의 이름과 특징을 찾아 옮겨놓는데 머물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손으로 만지고, 톱으로 잘라보고, 사포질을 해서 오감으로 체험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직접 경험이 아니면 간접 체험이라도 끄집어낸다. 그리고 "왜 이 나무는 이럴까?"라는 물음표를 던진다. 그러다보니 나무 하나를 설명할 때도 질문이 과학으로 갔다가 역사로 옮겨 가고, 종교와 신화를 넘나들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다.
유창목(癒瘡木)을 설명할 때도 그렇다. 한자로는 '상처를 치유하는 나무'로, 영어권에서는 '생명의 나무(Lignum Vitae)'로 불린다. 이 나무는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나무 가운데 하나다. '얀카 경도'라는 생소한 단어가 등장하고, '도끼를 부수는 나무'라는 별칭을 소개한다. 그리고 나무의 단단함을 바라보다가 '인간은 왜 강함을 좋아하고 약함을 두려워 하는지' 물음을 던진다. (※ '얀카(Janka) 경도'는 목재가 눌림과 흠집에 얼마나 잘 견디는지를 재는 국제 표준 지표다.)
'얀카 경도' 수치가 낮은 소프트우드도 있다. 저자는 오랫동안 단단한 하드우드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부드럽고 여린 나무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소프트우드라고 해서 가치가 낮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유럽가문비나무처럼 진동을 잘 전달하는 나무는 스트라디바리와 같은 명품 바이올린의 상판으로 쓰였다.
하드우드와 소프트우드처럼 단단함과 부드러움은 비단 목재의 성질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그리고 빨리 자라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오랫동안 겉으로 드러나는 성장을 멈춘 듯 보이는 나무도 있다는 걸 알려준다. 그러한 시기를 '유형기(幼形期)'라고 부르며 사람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성장이 멈춘 것 같지만, 사실은 뿌리를 다지는 시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 말대로 그에게 "목공방은 작업장이 아니라 생각의 공작소"였다.
십자가의 나무와 미국 대통령 책상 '레졸루트 데스크'

▲이정환 KBS PD가 만든 목공예품들.
ⓒ 이정환
저자는 공방에서 손을 움직이면서 생각을 멀리 보낸다. 성경 속 십자가는 무슨 나무였을까? 노아의 방주는 어떤 나무로 만들어졌을까? 한글 성경 뿐만이 아니라 영어 성경과 라틴어 불가타 성경까지 동원하고, 구글 위성지도로 공간까지 들여다본다. 늦깎이 가톨릭 신자인지라 종교적 호기심까지 더해진다.
예수의 십자가는 무슨 나무일까? 산딸나무라는 주장, 사시나무라는 주장을 살펴본 뒤 저자는 예루살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곧게 자라며 비교적 가벼운 나무라는 개연성 있는 조건을 따져 '사이프러스(측백나무)'를 떠올린다. 여러 종류의 사이프러스 중에서도 '이태리 편백(Italian cypress)'을 지목한다. 하나의 나무를 찾기 위해 여러 언어별 성경과 지리, 식물의 분포와 당시의 생활 조건까지 함께 살펴본다.
저자는 물음표(?)를 달고사는 교양다큐 PD 출신답게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즐긴다. TV 프로그램을 만드는 PD지만, 이 책을 보면 라디오 PD의 감성이 느껴진다. 텍스트와 오디오는 비디오보다 상상의 제약이 훨씬 덜하다. 읽는 사람, 듣는 사람의 '여백'을 생각한다. 그리고 언론인이라면 갖게 되는 일정정도의 편집증도 이 책에서는 미덕으로 작용한다.
이 책에는 단순한 나무의 역사가 아닌, 나무와 역사를 접목하는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참나무를 따라가면 유럽의 대항해시대가 나온다. 단단하고 질긴 오크는 거대한 범선을 만드는 데 쓰였다.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에 놓인 대통령 책상 '레졸루트(Resolute) 데스크'에 이르면, 한 그루의 나무가 국제관계의 역사와 만난다. 영국의 북극 탐사선 HMS(Her Majesty's Ship) 레졸루트호의 선체였던 오크가 영국 여왕의 명으로 책상으로 재탄생했고, 영국이 보내준 선물이 미국 대통령을 상징하는 '레졸루트 데스크'가 되는 과정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흔히 볼 수 있는 가로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가로수가 어느 순간 역사적 기록이 된다. 우리나라 가로수의 역사에서부터 여의도와 진해의 벚나무, 일본이 미국에 선물한 벚나무와 워싱턴의 벚꽃 축제까지 이어진다. 나무 한 그루가 도시의 풍경을 넘어 국제정치와 식민지의 기억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소나무에 대한 '삐딱한 시선'도 재미있다. 한국인에게 소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다. 정신문화의 상징이자 '나무 중의 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저자는 이 익숙한 믿음에 슬쩍 태클을 건다. 궁궐과 전통 건축에 실제로 어떤 나무가 쓰였는지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이야기와 다른 장면이 나타난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유명한 배흘림기둥이 소나무가 아니라 느티나무라는 사실도 그 가운데 하나다.
상처와 세월을 견뎌낸 '스폴티드 우드', 우리의 삶은?

▲이정환 KBS PD가 펴낸 <나의 우아한 목기시대>(시대의창) 표지.
ⓒ 이정환
이 책은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의 틈을 계속 건드린다. 원목과 MDF를 구분하는 법, 비싼 월넛을 흉내 낸 가구, 고무나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목재의 실체처럼 생활과 맞닿은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과 맞물린다. 어떤 나무가 좋은가를 묻는 순간에는 가격과 등급, 경도와 용도가 등장한다. 목재에도 '사장과 임원', '부장급' 같은 계급이 있다는 저자만의 표현은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된다.
정보와 역사적인 사실을 넘나들면서도, 인문학적 성찰을 담은 에세이의 성격도 놓치지 않는다.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진주를 품는 조개 이야기처럼, '상처받은 나무'에 관한 이야기다. 나무는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때로는 그 상처를 그대로 품은 채 자란다. 그렇게 썩어가는 과정에서 '곰팡이가 그려놓은 무늬를 품은' 스폴티드 우드(spalted wood)가 탄생한다. 먹감나무의 검은 무늬 역시 그러한 상처와 세월을 견뎌낸 흔적이다. 상처가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무늬다.
저자는 나무의 상처에서 인간의 삶을 본다. 심리학자 스티븐 조지프의 '외상 후 성장(PTG)' 개념이나 깨진 도자기를 금으로 잇는 일본의 킨츠기, 서리 맞은 포도로 빚는 아이스와인과 곰팡이 핀 포도로 만드는 귀부 와인의 사례에서 '상처를 이겨낸 흔적'이 훈장이 된 먹감나무와의 공통점을 찾아낸다. 그리고 말한다. 망가진 것이 반드시 실패한 것은 아니며,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전에는 없던 가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30여 년 방송사 PD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을 바라보면서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 직업 특성상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를 사로잡은 건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들이었다. "나무를 보면 하늘이 보인다"는 말도 관념적인 얘기가 아니다. 목재로서의 나무를 바라보면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다. 나무의 결을 보고, 상처를 보고, 가격과 경도를 따지게 된다. 그러나 살아있는 나무를 보려면 시선을 위로 해야 하고, 나무가 뻗어가는 방향을 따라가다 보면 하늘이 보인다.
책을 덮을 때쯤 저자는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느 계절을 지나고 있는가. 아직 자라는 중인가. 잠시 멈춰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아니면 지나온 상처가 어느새 당신만의 무늬가 되어 있는가'를. 그리고 넌지시 제안한다. '당신의 원픽 나무'를 하나 정하고 계속 바라봐 보라고. 무슨 나무인지, 무슨 꽃을 피우는지, 무슨 열매를 맺는지, 그리고 잎이 다 떨어진 나무의 몸은 어떤지. "그럼 그 나무의 이야기가 들릴 것이고, 그 나무를 품고 있는 하늘도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나의 우아한 목기시대>(시대의창)를 펴낸 이정환 KBS PD. ⓒ 이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