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치러진 지난 2025년 11월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에 마련된 고사장에서 수험생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가히 AI의 시대다. 영역과 분야를 가리지 않고 해법과 결론이 AI로 수렴되고 있다. 이러다 AI가 국가 경제뿐만 아니라 환경 문제와 기후 위기, 식량난 등 지구촌이 직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를 구원할 날도 머지않은 듯싶다. AI는 이 시대의 '종교'다.
최근 교육부와 국가교육위원회가 중고등학교에 서논술형 시험을 도입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중·고등학교 내신을 절대평가로 바꾸고, 수능에 서논술형을 도입해 나가는 방향이다. 현재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대국민 공청회를 갖는 등 공론화 과정을 진행 중이다. 이르면 내년 초 서논술형 수능 및 대입 제도 개편을 골자로 한 최종안이 나올 예정이다.
기존의 선다형 시험이 아이들의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력 신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비롯됐다. 여론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제 서논술형 시험의 도입은 '이재명표 교육개혁'의 알짬처럼 여겨지고 있다. 워낙 민감한 정책이어선지 전면 적용 시기는 미정이다.
'새롭지 않은' 서논술형 시험 도입, 우려스러운 건
기실 서논술형 시험이 새삼스러울 건 없다. 학교마다 이미 정기 시험에서 일정 비율로 출제되고 있다. 이곳 광주의 경우엔 교과별로 서논술형 문항을 30% 이상 출제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정부의 방침은 선다형 문항을 점차 줄이고 서논술형 문항으로만 시험을 치르려는 것처럼 보인다.
서논술형 시험이 선다형 시험보다 교육의 본령에 부합한다는 걸 부인하는 이는 없다. 오랫동안 선다형 시험이 보편화하면서 '찍어서 맞히는 것도 실력'이라는 우스갯소리를 아이들은 '진리'처럼 받아들인다. 정확하게 알지 못해도 맞힐 수 있고, 시험 당일의 운에 따라 고득점도 가능하다. 결국 점수와 진짜 실력이 정비례하지 않는 '줄 세우기' 시험으로 전락했다.
적어도 서논술형 시험은 요행을 바랄 수 없다. 출제된 내용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거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면 백지 답안을 제출할 수밖에 없고, 그 숫자도 의외로 많다. 서논술형 문항을 줄곧 출제해 왔지만, 채점하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던 건 그들의 '도움'이 컸다.
그런데, 뜬금없이 AI를 활용해 채점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흘러나오고 있다.
지난 11일 열린 수능 서논술형 평가 도입과 절대평가 전환을 공론화하기 위한 현장 토론회에서 이민석 국민대 소프트웨어학부 교수(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교육인재분과장)는 "그동안 서논술형 평가를 확대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공정한 채점 기준과 막대한 시간·비용, 채점자 간 편차 때문"이었다고 짚으며, "그러나 여러 교육청의 실험 결과 AI의 채점 결과가 사람보다 훨씬 공정하다는 데이터가 나오고 있다"고 언급했다.
서논술형 시험이 전면 시행되면 교사의 채점 부담이 늘어날 것이므로, AI를 통해 교사의 업무 과중을 줄일 수 있다는 거다. 이는 교원단체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AI로 '초벌 채점'을 하고, 출제 교사가 '재벌 채점'을 해서 공정성과 교육적 의미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겠다는 복안이다. 교사가 작성한 모범 답안과 세부 채점 기준을 AI에 학습시킨 뒤 채점하면 큰 문제가 없을 거라 자신하는 모양새다.

▲AI 채점 소식을 접한 순간, 우리 정부가 'AI 만능론'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AI생성 이미지) ⓒ 오마이뉴스
서논술형 시험에 대한 AI 채점 소식을 접한 순간, 우리 정부가 'AI 만능론'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탈자 등 명백한 오류라면 몰라도 AI의 채점 결과를 교사가 뒤집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교사에겐 결과에 따른 민원과 법적 책임을 AI에게 미루는 게 '안전한' 선택이다.
더욱이 수백 명의 답안지에서 일일이 오류를 찾아내야 할 정도로 허술하다면, 굳이 AI에게 '초벌 채점'을 맡길 필요도 없다. 100% 오류가 없다는 보장 없이는 무턱대고 AI에 채점을 맡기긴 어렵다. AI에 채점을 맡기는 순간 교사의 '재벌 채점'은 요식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AI로 채점한 점수를 받아 들고 흔쾌해하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교육은 교사와 아이들의 만남을 전제로 한 행위이며 시험도 엄연한 교육의 일환일진대, AI가 좌지우지하는 교육이 과연 교육일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회의가 든다.
아무리 교사와 아이들, 학부모 사이에 불신이 팽배해 있다고는 하지만, 교사보다 AI를 더 신뢰하고 의존하는 건 만신창이가 된 우리 공교육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지금도 아이들은 교사의 수업보다 AI의 설명을 더 신뢰한다. AI 의존에 있어서 이미 위험수위에 다다르고 있다.
AI를 통해 채점한다는 건 서논술형 시험의 교육적 취지를 훼손하는 일이기도 하다. 만약 기존의 선다형 시험처럼 점수를 매겨 줄 세우는 목적이라면 더더욱 안 될 말이다. 본디 시험이란 교사와 아이들 각자가 출제 문항을 사이에 두고 성취 기준을 확인하고 대화하는 기회다.
서논술형 시험의 장점은 특정한 정답이 없는, 곧 다양한 정답이 나올 수 있는 문항의 출제가 가능하다는 데 있다. 그러나 AI가 채점에 개입한다고 상정하면 출제하기가 힘들어진다. AI는 명확한 기준과 용어, 개념이 제시되어야만 채점을 위한 사전 학습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AI 만능론'에서 벗어나길
'고려 말 공민왕이 추진했던 반원 개혁 정책은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만약 그의 정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안착했다면 이후 50년 동안 어떠한 역사가 전개되었을지 추론하여 800자 내외의 짤막한 '대하소설'을 작성하시오.'
오래전 이런 서논술형 문항을 출제한 적이 있다. 공민왕의 반원 개혁 정책은 성취 기준의 맨 앞자리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내용이고 보면 주제야 낯설 게 없지만, '대하소설'을 써보라는 제시어에 다들 화들짝 놀란 눈치였다. 당장 시험 도중 대하소설이 뭐냐는 질문이 빗발쳤다.
물론, 글자 수 외에 정책의 내용이 명확히 제시되고, 가상의 등장인물은 불가하다는 등의 몇몇 조건을 붙이기는 했다. 아이들은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고, 역사 '덕후'조차 시간이 부족하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도 시험이 끝난 후 모두가 흥미로운 경험이었다며 서로의 답을 비교해 보곤 했다.
어렴풋하지만, 답을 작성한 대부분에게 후한 점수를 준 걸로 기억한다. 인물의 이름을 틀리게 적고, 사건의 순서가 맞지 않아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아이들의 발상은 엉뚱하리 만큼 기발했고, 영화의 시나리오를 흉내 낸 것도 있었다. 답안에 아이들 각자의 학업 역량은 물론, 성격까지 고스란히 묻어났다.
요즘처럼 수행평가 1점에도 목숨 거는 시대엔 엄두조차 못 낼 시험이었다. 그땐 자기 점수에 대해 불만을 표출한 아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시험으로 인해 아이들과 더욱 친해졌고, 다음에도 그런 식의 문제를 출제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출제 교사로서 뿌듯한 순간이었다.
만약 이 문제의 답안을 AI가 채점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선 정확한 채점을 위해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가령 800자는 100점, 700자는 90점, 600자는 80점… 이런 식으로. 또, 정책과 인물이 몇 명 제시되었느냐에 따라 점수를 차등하는 것도 불문율일 테다.
과연 AI는 아이들의 기발한 상상력을 '공정하게' 채점할 수 있을까. 또, 과거처럼 시험 답안을 대조해 가며 서로의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을까. 분명한 건, AI가 기준에 맞춰 엄격하게 채점한다고 해서 아이들의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력이 길러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부디 정부는 'AI 만능론'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특히 교육에서 AI는 자칫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AI가 답안을 채점하는 상황이라면, 아이들은 굳이 교사의 수업을 들을 까닭이 없다. 고작 교사의 업무 부담을 더는 차원의 문제로 접근해선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