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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하나가 취소되어 다음 일정 사이에 시간이 남았다. 원래부터 가려고 마음먹고 있던 전시였는데, 그렇게 갑자기 가게 되었다.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인상주의를 넘어: 르누아르, 드가, 고흐, 마티스, 피카소>다.
미국 디트로이트 미술관의 소장품 52점을 통해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야수주의와 표현주의, 입체주의로 이어지는 근대미술의 변화를 보여주는 전시다. 이름만 들어도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화가들이 모여 있다.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전경《인상주의를 넘어》 전시가 열리고 있다. ⓒ 최수안
좋아하는 그림은 너무 많았다. 그런데 전시장에 가도 계획대로 그림을 보게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날 전시를 보면서 머릿속에 남은 것은 광대를 그린 세 작품이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흰 피에로'(1901~1902), 파블로 피카소의 '할리퀸의 얼굴'(1905), 그리고 조르주 루오의 '광대'(약 1907)가 모두 한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본 이 세 광대는 모두 달랐다.
가장 먼저 만난 르누아르의 '흰 피에로'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요란한 분장의 광대와는 조금 다르다. 흰 옷을 입고, 흰 모자를 쓴 아이와 같은 피에로는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작품은 르누아르가 20세기에 들어선 뒤 그린 어린이 초상 가운데 하나다. 광대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아직 가면보다 얼굴이 먼저 보이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작품 옆 캡션을 보고서야 오늘 알았다. 섬세한 이 그림은 훗날 프랑스 영화계의 거장이 된 르누아르의 아들 장 르누아르를 그린 작품이다. 아버지는 피에로의 모습으로 아들을 그렸다. 순수함과 동심을 가진 어린 아이의 모습이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흰 피에로》(The White Pierrot)1901~1902, 디트로이트 미술관 소장. 이미지 출처: Artvee ⓒ 퍼블릭도메인
조금 더 걸어가 루오의 '광대'를 만났다. 르누아르의 피에로와는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다. 뾰족한 모자와 굵고 거친 선, 강렬한 색으로 그려진 얼굴에는 웃음이 없다. 화려한 광대의 차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웃음보다 피로와 쓸쓸함이 먼저 다가왔다.
루오의 작품에는 광대와 곡예사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의 광대는 단순한 서커스 공연자라기보다 화려한 외양 뒤에 감춰진 인간의 고독과 슬픔을 보여주는 존재로 자주 읽혀왔다. 그런 설명을 굳이 읽지 않더라도, 이 광대 앞에 서면 이상하게 웃음보다 그 뒤에 있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피카소의 '할리퀸의 얼굴'이 걸려 있다. 분위기가 또 다시 달라진다. 1905년 피카소가 이른바 '장밋빛 시대'에 접어들어 서커스 단원과 곡예사, 할리퀸을 반복해서 그리던 시기다. 피카소의 할리퀸은 정면을 바라본다. 그러나 얼굴에는 웃음이 없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광대의 표정보다는 조용히 입을 다문 한 사람의 얼굴이 먼저 보인다. 사람을 웃기는 사람이 입을 다물자 비로소 그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르누아르의 그림에서는 광대의 옷보다 어린아이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루오의 광대에게서는 화려한 차림 뒤의 피로와 쓸쓸함이 느껴졌고, 피카소의 할리퀸은 웃음을 거둔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다른 세 얼굴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는 같았다. 아무도 웃고 있지 않았다. 한 전시 공간에서 세 광대의 얼굴을 차례로 보고 있으니, 광대라는 인물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 엉뚱하게도, 얼마 전 본 연극 때문이었을까. 셰익스피어가 떠올랐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서 광대는 왕이나 귀족처럼 권력을 가진 인물은 아니지만, 농담과 노래를 빌려 다른 사람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말을 한다. 왕이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 때 진실을 말한 신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켄트 백작은 리어가 코델리아를 내치고 왕국을 나누려는 순간 왕의 판단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추방당한다. 바른말의 대가는 컸다.
그런데 광대는 다르다. 그는 리어가 자신의 권력과 왕국을 두 딸에게 나눠준 일을 거듭 비웃는다. 농담하고 노래하며 왕의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때로는 리어 자신도 광대나 다름없다는 식으로 조롱한다. 그런데도 그는 왕의 곁에 남는다. 1막 5장에서도 리어는 광대와 함께 길을 떠난다. 고너릴은 그런 그를 '면허받은 광대(all-licensed Fool)'라고 부른다. 원문에도 실제로 등장하는 표현이다.
왕 앞에서 진실을 말하고도 곁에 남을 수 있는 사람이 충신도 현자도 아닌 광대라는 사실은 묘하다. 물론 광대의 '면허'가 무엇이든 말해도 된다는 완전한 면책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담과 노래, 우스운 옷과 과장된 말투는 정면의 충고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실을 전달하게 해준다.
켄트는 진실을 정면으로 말했다가 추방당했다. 광대는 같은 왕의 어리석음을 농담으로 바꾸어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광대의 가면은 진실을 완전히 안전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 진실이 왕의 곁에 조금 더 오래 머물 수 있게 했던 것은 아닐까.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인상주의를 넘어》미술관 입구 ⓒ 최수안
그 생각을 하고 나니 오늘 본 세 광대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르누아르의 흰 피에로. 루오의 슬픈 광대. 피카소의 무표정한 할리퀸. 화가들은 광대가 웃는 순간보다 웃음이 사라진 뒤의 얼굴을 그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때 비로소 가면 뒤의 사람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 세 작품은 모두 디트로이트 미술관(DIA) 소장품으로, 미술관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르누아르 《흰 피에로》 — dia.org/collection/white-pierrot/58285
피카소 《할리퀸의 얼굴》 — dia.org/collection/head-harlequin/57088
조르주 루오 《광대》 — dia.org/collection/clown/59921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