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국제PJ파사건'의 1심 재판장이 당시 피고인이었던 여운환 대표에게 최근 보낸 편지. ⓒ 오마이뉴스 구영식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편지의 수신인은 1990년대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에 의해 '호남 최대 조폭조직 국제PJ파 두목'으로 구속 기소됐던 여운환(73) 아름다운컨벤션 대표이고, 발신인은 '검사 홍준표'가 구속 기소했던 여 대표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 이아무개 전 판사다. 판결로부터 34년이 지났긴 하지만, 유죄 판결을 내린 재판장이 피고인에서 직접 편지를 보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앞서 <오마이뉴스>는 지난 2017년 10월 25일과 26일 이틀 동안 광주에서 1990년대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에 의해 '호남 최대 조폭조직 국제 PJ파 두목'으로 구속 기소됐던 여운환 대표를 인터뷰해 20회로 연재한 바 있다. 당시 인터뷰에서 여 대표는 "모래시계 검사는 완전히 조작되고 날조된 영웅담일 뿐이고, 그렇게 조작되고 날조된 영웅담을 통해 여당·야당 대표, 경남도지사, 대선후보 등으로 승승장구했다"라며 '모래시계 검사 신화'를 격하게 비판했다. 이에 홍준표 전 대표 측은 "검찰(검사)이 불의한 깡패 세력을 소탕한 사건"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1심 재판장 " 판결이 부당하다는 주장은 피고인 또는 검사만이 할 수 있는 것"

▲1992년 '국제PJ파 사건'의 1심 판결문. 여운환 대표는 "자금책 겸 두목의 고문급 간부"로서 폭력조직에 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 오마이뉴스

▲1992년 '국제PJ파 사건'의 1심 판결문 중 일부. 여운환 대표는 "자금책 겸 두목의 고문급 간부"로서 폭력조직에 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 오마이뉴스
이아무개 전 판사는 지난 1992년 5월 18일 여운환 당시 백제호텔 대표에게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이 전 판사는 "폭력을 목적으로 하는 범죄단체인 자칭 국제PJ파를 구성 (중략) 피고인들이 경영하는 유흥업소인 호텔 오락실, 나이트클럽 등의 영업활동을 보호받는 대가로 위 단체의 유지를 위한 자금지원과 위 단체가 관련된 폭력 사건의 수습 대책 등을 의논하는 업무를 하는 자금책 겸 두목의 고문급 간부로 가입"(1심 판결문)했다고 판시했다. 여운환 대표가 당시 운영하고 있던 국제관광호텔 오락실의 영업 활동을 보호받는 대가로 국제PJ파에 자금을 지원하고, 국제PJ파와 관련된 폭력 사건의 수습 대책을 의논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여 대표를 국제PJ파의 "자금책 겸 두목의 고문급 간부"라고 규정했다. 이는 홍준표 검사(광주지검 강력부)가 여 대표를 '국제PJ파의 두목'으로 기소한 것과는 상당히 다른 판단이었다.
그렇게 1심 판결을 내렸던 이 전 판사가 지난 6월 여 대표에게 A4 두 장짜리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근무하던 사무실로부터 선생님의 소식을 듣고 원하시는 답변을 드리기가 어려워 장기간 망설이다가 하루빨리 제 생각을 정리하여 알려드리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어 이제야 이 글을 쓴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 전 판사는 "제가 법률사무에서 손을 놓은 지 근 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제 생각이 100%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형사 사건의 재심 제도는 한 마디로 유죄 인정의 핵심적 증거가 된 증언이나 서류가 허위 또는 위조되었다는 것이 판결 확정 후에 밝혀진 경우 당해 사건의 피고인은 구제되어야 마땅하다"라며 "따라서 재심 신청을 위하여서는 유죄라고 인정된 범죄 사실에 대한 증거가 위조 또는 위증이었다는 점을 주장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를 제출하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 전 판사는 "선생님의 사건을 맡아 심리하였던 저로서는 이미 판결로써 저의 의견을 표시하였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그에 대하여 부당하다고 말할 자격이 없고, 그 판결이 부당하다는 주장은 피고인 또는 검사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전 판사는 "따라서 선생님께서 제의하신 의견(변호사 선임이나 양심선언 요청-기자주)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고, 그에 대한 정당성 여부를 다투는 것은 오로지 선생님께서 하셔야 할 몫인 것이다"라며 "이 점에 대하여는 유능한 법률실무가로부터 조언을 받기 바란다"라고 조언했다.
이 전 판사는 "위와 같은 결론은 제가 보름 넘게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고, 저에게는 선생님을 도와 드릴 어떠한 방법이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할 뿐이며 이러한 저의 심정을 깊이 헤아려 주기 바란다"라며 "짧은 글이나마 선생님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고, 유능한 법률가를 만나시어 소망하시는 결과를 얻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라고 편지를 끝맺었다.
이 전 판사의 편지는 재심 제도의 원칙론을 언급한 것이긴 하지만 여 대표가 지난해 두 번째 재심을 청구한 이유에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어 보인다. 여 대표는 국제관광호텔 폐쇄등기부 증명서, 국제관광호텔 영업의 경력 사실증명원, 신라당 폐업사실 증명 등을 '새로운 증거'로 제시하며 홍준표 검사가 범죄 시점으로 특정한 '1986년 말경'에는 국제관광호텔 오락실이 개업조차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지난해 재심을 청구한 바 있다.
실제로 여 대표는 당시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에서 호텔오락실이 아닌 '신라당'이라는 대형 제과점을 운영하고 있었다(1986년 4월~1989년 7월). 여 대표가 제시한 증거들에 따르면, 국제관광호텔은 지난 1988년 12월 28일 영업허가를 받고 다음 해인 1989년 1월 24일 소유권보전등기를 마쳤으며, 지난 2003년 12월 22일 폐업했다.
여 대표도 최근 기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92년 당시 사건 담당 재판부 재판장이 자신이 내린 판결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듯한 양심의 글을 답장으로 보내왔다"라며 "사법부에서 극히 이례적인 일로서 가장 주목되는 증거라고 여겨진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여운환 대표 "저의 선임 요청을 허락해 달라… 어렵다면 양심선언이라도"

▲지난 1995년 방영된 SBS 드라마 ‘모래시계’는 최고 시청률 64%를 기록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배우 박상원이 강직하고 정의로운 강우석 검사역을 맡았는데, 강우석 검사의 모델은 ‘홍준표 검사’로 알려졌다. 본인도 선거 등에 나와 “모래시계의 모델이 되었던 검사”라고 홍보해 왔다. 하지만 드라마 대본을 쓴 송지나 작가는 나중에 “그분은 ’모래시계‘를 집필할 때 취재차 만났던 여러 검사 중 한 분일 뿐”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 SBS 드라마 ‘모래시계’ 포스터.
앞서 지난 4월 28일 여 대표는 이 전 판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수사 검사였던 홍준표 검사는 저에 대하여 국제PJ파라는 범죄단체를 조직하고, 우두머리로 활동하여 온 흉악무도한 범죄자라는 혐의를 씌워 엄벌해 달라고 징역 15년을 구형하였다"라며 "(그러나) 법원은 결국 검찰의 공소사실을 배척하면서도 난데없이 검찰의 편이 되어 1986년 말경 제가 운영하고 있는 호텔 오락실의 영업활동을 보호받는 대가로 '공소의 김0용'이 조직하고 우두머리 수괴로 활동하고 있던 국제PJ파에 조직 유지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고 그들의 폭력 사건에 수습 대책을 의논하는 업무를 하는 '자금책 겸 두목의 고문급 간부'로 가입한 것을 인정하였다"라고 지적했다.
여 대표는 "(하지만) 제가 국제PJ파 조직원들을 통틀어서라도 단돈 10만 원도 지원한 사실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폭력사건 수습대책을 의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라며 "국제PJ파의 행동대장으로 수배 중이었던 박0화의 허위진술만을 유일한 유죄 증거로 인용하여 저에게 징역 5년 형을 내린 것이다"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어 여 대표는 "그나마 이와 같은 유죄 증거로 사용된 박0화의 검사 작성 진술조서와 법원의 공판기일 전 증인신문조서는 허위의 사실들로 꾸며졌을 뿐만 아니라 위헌 법률에 기인하여 조작까지 되었던 것"이라며 "대법원에서조차 박0화의 검사작성진술서와 공판기일 전 증인신문조서를 (증거로) 사용하는 것은 위법하다고 분명하게 판시되어 있다"라고 강조했다.
여 대표는 "1심 법원으로부터 검찰의 공소사실(국제PJ파 우두머리 혐의에 대해서-기자주)는 범죄의 증명이 없다고 하여 무죄선고되었고, 확정된 이후에도 당시 수사검사였던 홍준표씨가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국민들을 상대로 감언이설과 유언비어를 계속하여 만들어냈고, 저는 어쩔 수 없이 흉악무도한 폭력조직인 국제PJ파 우두머리 수괴로 남아 있어야 했다"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심지어 홍준표 검사는 저를 SBS 드라마 '모래시계' 속의 흉악한 조폭두목역으로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낙인찍히게 만들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여 대표는 "1992년 5월 18일 내려진 잘못된 판결 하나 때문에 (폭력조직의 우두머리라는) '주홍글씨'가 덧씌워졌다는 점에서 홍준표씨의 영광은 온전히 변호사님(이 전 판사)께 바쳐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라며 "그는 변호사님께 은혜를 받았다"라고 꼬집었다.
여 대표는 "저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인 행정공증서류와 헌법소원 심판 청구서를 동봉한다"라며 "이제라도 실체적 진실이 밝혀져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억울함 속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고 싶다, 저의 선임 요청을 기꺼이 허락해 주시고, 그것이 어렵다면 당시의 상황들을 양심선언을 통하여 바로잡아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두 차례의 재심 청구 기각… "호텔 오락실이 없었다면 자금을 지원할 수도 없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이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홍 전 시장은 지난 4월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뒤 탈당하고 미국 하와이에 머물렀다. ⓒ 연합뉴스

▲국제관광호텔의 폐쇄등기부 증명서. 국제관광호텔은 1988년 영업을 시작해 2003년 문을 닫았다. 여운환 아름다운컨벤션 대표가 국제PJ파에서 활동하며 국제관광호텔 오락실 영업을 보호받고 있었다는 1986년에는 국제관광호텔이 없었던 것이다. ⓒ 오마이뉴스
여 대표는 지난 2017년 "한 검사의 비뚤어진 영웅심에 아직도 폭력 조직의 두목이라는 억울한 누명 속에 살고 있다"라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고, 그는 지난해 다시 재심을 청구했다.
두 번째 재심 청구에서는 국제관광호텔 폐쇄등기부 증명서, 국제관광호텔 영업의 경력 사실증명원, 신라당 폐업사실 증명 등이 '새로운 증거들'로 제시됐다. 1심 재판부가 여 대표가 국제관광호텔 오락실의 영업 활동을 보호받는 대가로 국제PJ파에 자금을 지원하고 폭력사건 수수대책을 논의했다고 판결했는데, 홍준표 당시 광주지검 강력부 검사가 범죄 시점으로 특정한 '1986년 말경'에는 국제관광호텔 호락실이 개업조차 하지 않았다는 증거들이다. 국제관광호텔은 범죄 시점보다 2년이나 늦은 지난 1988년 12월에서야 영업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광주고등법원은 "이 사건 추가증거가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5호의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할 수도 없다"라고 판단하며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5호는 "유죄의 선고를 받은 자에 대하여 무죄 또는 면소를, 형의 선고를 받은 자에 대하여 형의 면제 또는 원판결이 인정한 죄보다 경한 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때"를 재심 이유로 규정하고 있다.
광주지검은 법원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백번 양보하여 설령 피고인의 주장과 같이 피고인이 1986년 당시 국제호텔 오락실 영업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피고인의 자금지원' 및 '폭력사건 수습대책 의논' 등 폭력조직 고문으로서의 역할 및 공범관계가 부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며 "따라서 피고인이 주장하고 있는 재심 사유는 '재심 대상 판결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의 개연성이 인정되는 경우'라 볼 수 없다"라고 재심 청구 기각을 주장했다.
이러한 검찰의 의견서는 법원의 재심 청구 기각 결정에 상당부분 반영됐다. 특히 이 검찰의견서를 제출한 엄희준 검사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1부장과 대검 반부패기획관, 인천지검 부천지청장을 지내는 등 '윤석열 사단'으로 분류된다. 특히 부천지청장 재임 시 '쿠팡 퇴직금 미지급 사건'을 불기소(무혐의 처분)하라고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광주고검 검사로 좌천됐다.
한편 여 대표는 최근 기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1986년 말경 즉 범죄 일시에 국제관광호텔이 존재했냐, 안 했냐다"라며 "영업 중인 호텔 오락실을 보호받기 위해 폭력 조직에 가입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 호텔 오락실이 없어졌다면 보호받는 대상은 아예 없어서 자금을 지원할 수도 없다고 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여 대표는 "그렇다면 더 이상 죄를 물을 수도 없고, 죄가 성립될 수도 없다"라며 "그만큼 엉터리 판결이 어쩔 수 없이 급조된 것이 분명하다"라고 주장했다.

▲여운환 아름다운컨벤션 대표가 지난 2017년 10월 25일 광주의 한 호텔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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