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포해전을 그린 모습으로 옥포대첩기념관에서 촬영했다. ⓒ 오문수
옥포대첩기념관에 그려진 두 장의 합포해전 현장 지도 중 어떤 지도가 사료와 부합할지가 논란이다.
지난 열흘전(7.31)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함대가 맨 처음 출전해 대승을 거둔 옥포대첩기념관을 방문했다. 전투 현장이 그려진 그림에 이어 천·지·현·황 화포와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고 위층으로 올라가니 합포해전 현장을 그린 두 장의 지도가 있었다.
그런데 두 장의 지도를 보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순신 장군이 보고한 <임진장초>에는 '합포'가 분명히 하나인데 전시관에 그려진 합포 지도는 두 개였다. 궁금증이 일어나 자세한 전말을 조사하고 상반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의 의견을 들어 누구의 의견이 옳은가를 알고 싶어 비교 분석했다.
이순신 함대의 합포해전 현장은 어디일까?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좌우수영 수군은 궤멸되었고 5월 4일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으로 구성된 전라좌수영의 이순신 함대가 첫 출전에 나섰다. 원균이 이끄는 경상우수영 함대(판옥선 4척, 협선 2척)와 합세한 이순신 함대는 1592년 5월 7일 정오에 옥포 앞바다에서 일본의 대선 13척, 중선 6척, 소선 2척 등 26척을 분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옥포대첩이 끝난 직후인 1592년 5월 7일 오후 4시경 이순신 함대가 거제도 북단에 위치한 영등포에 정박하던 중 척후장의 급보를 받았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바다에 일본의 대선 5척이 지나가고 있다"
소식을 들은 이순신 함대는 곧바로 추격을 시작해 웅천땅 합포(合浦)에 이르렀다. 그러자 다급해진 일본 수군은 배를 버리고 웅천땅 합포에 상륙했다. 이순신 함대는 5척의 왜수군 배를 분멸했다. 이 전투가 이순신 함대의 두 번째 전투인 합포해전이다.

▲옥포대첩기념관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합포'가 마산으로 그려진 지도이다. ⓒ 오문수

▲옥포대첩기념관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합포'가 웅천(진해)으로 그려진 지도이다. ⓒ 오문수

▲'합포'가 마산이라는 주장과, 진해 학개(합포)라고 주장하는 주요쟁점 ⓒ 오문수
15일간 요트를 타고 이순신장군의 행적을 뒤따르다
임진왜란 해전사에 관심이 많은 필자와 일행 6명은 2024년 5월 22일부터 6월 12일까지 율리안나 요트를 타고 15일 동안 이순신 해전지를 탐사하였다. 여수를 떠난 율리안나호(5~6노트)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싸웠던 칠천도, 당항포, 가덕도, 거제 마리나 등지에서 숙박하며 전투 현장을 돌아본 후 전투 중 산화한 조선 수군들의 명복을 빌었다.

▲2년전 (2024.5.22~6.12), 이순신 장군 해전지 탐사에 나선 필자 일행이 율리안나호 요트를 타고 15일간( 항해하며 유적지를 탐방했다. 선상에 앉아있는 이가 필자이다. ⓒ 오문수
2024년 5월 25일, 필자 일행이 탄 요트가 당황포를 떠나 부산 가덕도 방향으로 향하던 중 의심나는 지역이 있었다. 이순신 함대의 두 번째 전투지인 합포는 어디일까? 마산? 진해 웅천땅? 당시의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재조명해 보았다.
1592년 5월 7일, 이순신 함대는 거제 송미포를 출발해 천성·가덕으로 가던 중 정오경에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전라좌수군 척후장들이 신기전을 쏘아 급변을 보고하므로 옥포만으로 나아가 첫 전투를 벌였다.
조선 수군은 일본 군선 30척을 맞아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일본 군선 26척을 당파 후 분멸했다. 해전 종료 후 영등포(거제군 장목면 구영리) 앞 바다로 물러나 진을 치던 중 신시 무렵(오후 4시경) 척후선으로부터 적의 대선 5척이 지나간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에게 추격하게 했다. 조선 수군이 추격하자 일본 함대는 힘을 다해 싸우면서 도망하다가 웅천땅 합포에 이르러서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갔다. 조선 수군은 적선들을 모두 분멸하는 전과를 거두고 밤중에 이동하여 창원 남포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합포해전지가 마산 합포라고 주장하는 이봉수의 주장을 보면 영등포에서 왜선을 추격해 마산 합포에서 분멸한 후 창원땅 남포에서 밤을 지냈다고 했다. 반면 웅천 합포라고 주장하는 제장명은 이순신 함대가 웅천땅 합포에 도착하니 왜적들은 육지로 올라가 버려 사도첨사 김완 등이 왜선 5척을 분멸한 후 창원땅 남포에 도착해 진을 치고 밤을 새웠다고 했다.
1592년 5월 7일 정오경 옥포해전 현장에서는 천·지·현·황의 화포 소리와 일본 수군의 조총소리가 난무했을 것이다. 옥포 앞바다에서 26척의 왜선이 불타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면 가덕도 천성에 주둔한 왜군이 식별 가능하다. 옥포에서 가덕도까지의 거리가 16.9㎞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근 바다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을 보고도 왜군이 마산 합포 방향으로 가는 게 가능할까?

▲옥포대첩 당시 조선수군이 사용한 천지현황 화포와 각종 무기 모습으로 옥포대첩기념관에서 촬영했다. ⓒ 오문수
제장명 교수는 판옥선의 속도를 시속 3노트라고 설명했다. 해서 시속 3노트를 가정해 두 가지 해전 상황을 추정해 보았다.

▲판옥선의 속도를 시속 3노트로 가정해 두 해전지 까지 걸린 시간을 추정했다. ⓒ 오문수
송미포를 떠난 조선수군이 옥포에 도착해 12시경부터 2시간여 격전을 치르고 영등포에 도착한 시간은 신시(오후 4시경)다. "왜선 다섯 척이 지나간다"는 보고를 받고 추격에 나선 조선수군이 마산 합포에서 왜선을 불태우고 남포에 도달하는 데 걸린 거리는 35㎞이다. 반면 영등포를 떠나 웅천땅 합포에서 왜선을 불태운 후 남포로 돌아오는 데 걸린 거리는 15.3㎞이다.
옥포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조선 수군이 12시간여를 걸려 노를 저어 항해했을까? 아니면 9시간여 노를 저어 항해했을까?
제장명..."합포해전지는 진해 학개(합포)"
제장명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순신장군이 창원땅과 웅천땅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충무공전서의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의 장계 내용이다.
" 웅천땅 합포앞바다에 도착하니 왜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사도첨사 김완 등이 왜 대선 5척을 당파하여 불태워 없애니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밤중에 노를 재촉하여 '창원땅 남포앞바다(至昌原地藍浦前洋)'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밤을 새웠습니다"
제장명 교수는 안방준의 <은봉전서> 부산기사 내용에서 왜수군이 창원마산포를 떠나 원포에다 배를 버리고 달아났다고 했다.
"<임진장초>에 '웅천땅 합포'라 하였으므로 진해시 행암동 '학개'를 가리킵니다. 한자로는 '鶴浦'로 쓰며 소리 내면 '합포'가 되므로 '合浦'로 표기해 마산의 옛 이름과 혼동됩니다. 원포는 진해 합포이며 현재 진해 합포는 법정동으로 원포동에 속해 있습니다"
다음은 <은봉전서> 부산기사 내용이다.
"因進過栗浦 至永登浦暫停船 而立滴倭船九艘 自昌原馬山浦 向熊川之薺浦 追而迫之 賊棄船于院浦而走 又焚之其 夕次于猪島"
계속 나아가 율포를 지나 영등포에 이르러 잠시 배를 정박하였다. 때마침 왜선 9척이 창원의 마산포에서 웅천의 제포로 향하는 것을 보고 추격하니 적들은 원포에다 배를 버리고달아났다. 그래서 또 그 배들을 불태우고 저녁에 저도에 머물렀다"
또한 <이충무공전서> 「장계1」 '당포파왜병장' 기록이다.
"初八日昌原地馬山浦 安骨浦 薺浦 熊川等處踨探見船定送而出陣昌原地甑島藍浦洋中"
"초8일에 창원땅 마산포, 안골포, 제포, 웅천 등지로 적의 종적을 찾기 위한 탐견선을 정해 보내고, 창원땅 증도와 남포 바다 가운데 나가 진을 쳤습니다"
제장명은 "<이충무공전서>를 보면 이순신이 마산 합포를 창원땅 마산포라고 명시하고 있다"고 했다
마산 지명 변천사를 보면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합포로 불렸고 조선시대 태종 8년(1408년)에 의창현과 회원현이 통합되어 창원부가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합포'와 함께 '마산포'라는 명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구한말에 제작된 일본해군지도 ⓒ 오문수
제장명은 또한 구한말 일본 해군이 제작한 지도를 예로 들어 웅천 학개(합포)가 진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제장명 교수의 설명이다.
"구한말에 제작된 일본해군지도이다. 일본 해군이 1899년에 측량을 시작하여 1904년에 발행한 해도 모습으로 '합포말(Hakke Kutsu)'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해도를 보면 일본 해군이 해전지인 합포를 현재 학개 위치에 그대로 표기했다. 이것은 오늘날 제작된 것이 아니고 조선 시대 말기, 즉 구한말에 제작된 것이라는 데서 의미가 크다. 합포라는 지명이 존재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에다 '합포말(Hakke Kutsu)'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영문 명칭은 '학개(Hakke)'이다.
마산과 진해의 '합포' 위치 논란을 바라보는 필자는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이순신 함대가 옥포와 합포. 적진포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것이 분명하고 이순신 장군이 '창원땅 마산포', '창원땅 남포', '웅천땅 합포' 라고 지칭하며 창원(마산)과 웅천(진해)의 위치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