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12월 7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장성 보직 신고 및 삼정검 수치 수여식에서 김계환 해병대사령관의 삼정검에 수치를 달아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채해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의 핵심 뇌관인 이른바 'VIP 격노설'을 두고 군 수뇌부의 조직적인 은폐 정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김계환 전 해병대 사령관과 정종범 전 부사령관 등 군 지휘부는 법정과 국회에서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구체적인 통화 녹취록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파장이 일고 있습니다. '격노설'을 덮기 위해 직속 부하인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을 거짓말쟁이와 망상가로 몰아가려 했던 군 수뇌부의 치부가 3년 만에 낱낱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폭로하면 핵폭탄"… 녹음 파일로 드러난 'VIP 지우기' 모의
그동안 김계환 전 해병대 사령관은 여러 차례 진행된 국회 출석과 군검찰 조사 과정에서 "박정훈 대령에게 VIP 격노설을 언급한 사실 자체가 없다"라며 의혹을 강하게 부인해 왔습니다.하지만 지난 10일 JTBC 보도를 통해 공개된 통화 녹취록에 따르면, 김 전 사령관의 이러한 진술은 모두 철저하게 계산된 거짓말이었습니다.
2023년 8월 당시 김 전 사령관과 문연철 해병대사령부 방첩부대장이 나눈 대화에는 이들이 어떻게 사건을 은폐하려 했는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문 전 부대장이 "정훈이가 V(VIP) 내막을 알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면서 "쓴다면 핵폭탄이다"라고 우려하자, 김 전 사령관은 "근거가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답했습니다. 이는 박 전 단장이 외압의 실체를 폭로하더라도 물증이 없다면 그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겠다는 조직적 모의 정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김 전 사령관은 박 전 단장을 향해 "이 XX, 녹음 파일이 하나도 없다"라며 안도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박 전 단장에게 녹음 파일이 없으니 자신들이 입을 맞추면 진실을 덮을 수 있다고 맹신한 셈입니다.
은폐를 위한 이들의 행동은 무척 치밀했습니다. 문 전 부대장이 "방첩사에서 VIP에 대해 더 알려 하지 말고 있는 것도 오늘부로 다 지우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하자, 김 전 사령관 역시 "나도 아까 장관님에게 지시받은 걸 내가 지시한 걸로 얘기했다"고 화답했습니다. 통화 다음 날, 두 사람은 해병대 공보정훈실장을 외부 참치집으로 따로 불러내 "기자들에게 쓸데없는 소리 하고 다니지 말라"며 철저하게 입단속을 시킨 사실도 특검 조사를 통해 확인됐습니다.
결국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부터 해병대 사령관, 방첩사까지 총동원되어 윤석열 전 대통령의 격노 사실을 조직적으로 지우려 했다는 물증이 드러난 것입니다.
법정에 선 2인자도 "모른다" 오리발… 모해위증 고발된 뻔뻔함

▲2024년 7월 18일, 정종범 당시 해병대 부사령관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 요청 국민동의 청원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남소연
이러한 조직적 은폐와 입맞춤은 재판 과정에서도 버젓이 이어졌습니다. 수사 외압 의혹의 핵심 증거 중 하나인 이른바 '정종범 메모'를 작성한 정종범 전 해병대 부사령관은 박 전 단장의 항명 혐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사실을 은폐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정 전 부사령관은 2023년 7월 31일 이종섭 전 장관이 소집한 긴급회의에 직접 참석해 "누구누구 수사 언동 안 됨"이라는 수사 외압성 지시를 받아 적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재판에서 "언론 보도를 보고 VIP 격노를 처음 알았다"라며 "사령부 내에 소문도 없었고 사령관으로부터 단 한마디도 들은 적이 없다"고 진술했습니다. (관련기사:
[단독] 박정훈 재판서 "VIP 격노 못 들어"... 해병대 2인자, '모해위증' 고발 당해)
이에 해병대예비역연대는 정 전 부사령관을 국방부 조사본부에 모해위증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고발인 측은 "대통령 격노 여부는 박 전 단장의 유무죄를 가를 핵심 쟁점인데, 이를 잘 아는 정 전 부사령관이 불이익을 줄 목적으로 거짓말을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부하를 벼랑 끝으로 몬 것은 지휘관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박 전 단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던 군검사들은 영장 청구서에 "대통령 격노설은 박정훈의 망상에 불과하다"라고 적시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최근 1심 재판부가 해당 군검사들의 허위공문서 작성 혐의에 대해 "다소 과장된 표현일 뿐 허위 의식이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라며 무죄를 선고했지만, 당시 군 조직 전체가 합심해 진실을 말하는 박 전 단장을 '망상가'로 낙인찍으려 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중앙지역군사법원이 9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군 형법상 항명 및 상관명예 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 해병대수사단장 박정훈 대령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선고공판이 끝난 뒤 박정훈 대령이 응원나온 시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이정민
수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진실을 은폐하려던 자들의 굳건했던 카르텔은 '포렌식'이라는 과학적 물증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VIP라는 단어조차 꺼낸 적 없다"던 해병대 지휘관들은 뒤에서는 VIP 언급을 지우라며 증거 인멸을 공모했고, 법정에 선 2인자는 언론을 보고 알았다며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심지어 군 수사기관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군인을 망상가로 매도했습니다.
한 사람의 분노를 덮기 위해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군 수뇌부가 부하를 모함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인 이번 사태는 해병대의 명예를 밑바닥까지 추락시켰습니다. 끝까지 'VIP 격노설'을 부인해 온 해병대 지휘부의 민낯이 드러난 이상, 이제 남은 것은 철저한 진상 규명과 지위 고하를 막론한 엄중한 법적 책임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독립언론 '아이엠피터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