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남편과 나는 일찍부터 퇴직 후 도시를 떠나 시골로 자리를 옮겨 밭농사를 지으며 여유 있는 인생 2막을 살아보자고 계획했었다. 처음부터 고향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관련기사 :
귀농 2년차, 이제야 마음의 뿌리를 내리는 기분). 주말이면 서울에서 가까운 지역을 돌아다니며 현장도 보고, 실제 매물이 있는지 확인해 답사도 했지만, 인생이 늘 계획대로만 흘러가는 건 아니었다. 결국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밭농사를 지으며 변경된 계획 속에서 나름의 재미를 찾고 정착을 위해 분투하는 적응기를 거치고 있다.
사실 인생 2막에 밭농사를 주된 계획으로 세운 이유는 먹거리 때문이었다. 아무리 첨단 기술이 발달하고 AI가 모든 걸 알려주는 세상이라도 결국 인간은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다. 아무리 의료 기술이 날로 좋아지고 있다고 해도, 내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좋은 식자재를 공급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오랜 소신이었다. 그렇게 식자재에 관심을 가지면서 내 손으로 직접 씨를 뿌리고 작물을 키워보고 싶다는 열망이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땀 흘리며 밭농사를 짓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과일, 채소로 가득한 밭
밭에는 우리 가족들의 기호에 맞는 선호도를 고려해 작물들을 심었다. 콩, 참깨, 들깨, 팥, 옥수수, 땅콩, 부추, 대파, 토마토, 오이, 가지, 상추, 고추, 감자, 고구마, 대파, 참외, 단호박, 도라지, 무화과, 블루베리, 자두, 사과, 배, 감, 포도, 복숭아나무… 딱 우리 가족들이 먹을 만큼만, 그리고 유실수는 욕심부리지 않고 한두 그루씩만 정성껏 심었다. 그야말로 우리 밭은 과일·채소 가게인 셈이다.
그런데, 올해 유난히 눈길을 끄는 작물이 있었다. 올해 봄, 씨앗을 사러 종묘사를 간 적이 있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수량성이 좋고, 과육이 두꺼운 맷돌 호박' 이라는 문구와 정겨운 호박 사진이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30년 전 첫 아이를 낳았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시어머니가 출산하고 온 며느리의 붓기를 빼는데 좋다며 창고 깊숙이 보관해 두었다가 소중하게 꺼내 전해 주셨던 바로 그 호박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얘들이 맷돌호박으로 변하길 기다렸다. ⓒ 김희
그러나 사실 그때 호박을 받아 들었을 때는 '이 누렇고 큰 호박을 어떻게 먹는 거지?'하고 난감했던 '웃픈' 기억이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그 호박 사진을 보니 평생 농사만 짓던 주름 가득한 손으로 막내며느리를 위해 전해 준 투박한 마음의 기억이 소환되어 가슴 깊숙한 곳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그래. 이거다. 올해는 이걸 심어보자.'
밭 자락 끝에 복수박, 참외, 단호박, 그리고 '맷돌 호박'이라고 적힌 글자와 사진을 확인하고 나란히 심었다. 30년 전 출산 붓기는 아니지만, 세월 만큼이나 넉넉해진 지금의 붓기라도 좀 빠져줄까 내심 기대를 품고, 이제는 노련해진 주부의 솜씨로 근사한 호박죽 한그릇 쑤어낼 생각에 호기로운 자신감마저 생겼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밭 자락 호박을 심은 곳에는 내가 알던 호박꽃이 많이 피었다. 멀리서 '호박꽃이 폈구나. 그럼 곧 열매가 맺히겠는데…' 하고 기대를 품었다. 그러고 한참 시일이 지나 밭 자락을 가보고는 남편과 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둘이 동시에 "어? 이게 맷돌 호박이야?" 했다. 복수박, 참외, 단호박은 그동안 키워봐서 맺히는 열매의 모양을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맷돌 호박'은 처음 심어본 것이었다. 색깔이 전부 흰색이다.
"여보. 이게 그 누렇게 큰 내가 아는 그 호박이 되는 거야?"
"몰라. 나도 이런 건 처음 보는데… 이게 맷돌 호박이 맞나?"
일단 열매가 맺혔고, 다시 한번 씨앗 봉지를 확인해봐도 분명 '맷돌 호박'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호박 수확 시기가 다가왔다. 하지만 그 하얀색 호박은 시어머니가 내게 전해준 호박 모양으로 변하지 않았다.
즐거운 요리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단호박을 전부 수확하고도 우리는 흰색과 핑크빛을 띠면서 우리가 아는 호박으로 변하지 않는 이 희귀한 호박을 어찌할 줄 모르다가 호박 수확 적기 신호를 확인하고는 지난 7일 일단 수확했다. 뭐든 물어보면 다 알려준다는 AI에게 사진을 찍어 물어봤더니, 이 녀석들의 정체는 서양 호박 품종으로 '백설단호박' 과 '분홍단호박'라고 답했다.
이제나저제나 '맷돌호박'으로 누렇게 변하길 기다렸건만. 하지만 이내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해졌다. 이름이 뭐 중요한가, 이 무더위에 잘 자라준 기특한 호박이지 않나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전혀 모르던 새로운 호박도 알게 되었고, 찾아보니 흔히 우리가 말하는 단호박보다 훨씬 당도가 높고 과육이 부드럽다고 했다.

▲후숙과정을 거쳐야 당도가 높아 맛있게 먹을수 있다. ⓒ 김희
종묘사에서 씨앗 봉지를 처음 봤을 때, 그리고 호박씨를 밭 자락에 정성스럽게 심을 때, 오래 전 따뜻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시어머니와의 추억을 되살려본 것으로도 충분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또 다른 추억과 호박을 얻었으니 값진 성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수확을 마친 호박들은 지금 후숙하고 있다.
요즘 나는 후숙 기간이 끝난 호박으로 어떤 요리를 할까 즐거운 고민에 빠져있다. 그리고 내년 봄에는 꼭 우리 밭 자락에 진짜 누렇고 둥글넓적한, 어머니가 내게 안겨준 맷돌 호박을 심어볼 작정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