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좌충우돌 헝가리 여행기'를 마무리할 때가 됐다. 출발 당일부터 마지막 날까지 돌발 상황이 계속돼 힘들었지만, 나름 재미있고 의미 있었던 보름간이었다. 어차피 여행이란 낯선 환경 속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을 전제로 하는 여정 아닌가. 돌발 상황은 여행의 상수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아무래도 여행기의 마지막은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정리하는 내용이 좋을 성싶다. 스마트폰에 담긴 사진들을 다시 꺼내 보며 기억을 더듬는다. 그때그때 수첩에 남긴 메모도 사진의 도움 없이는 그 의미를 되살리기 어렵다.
어떤 곳이 인상적이었는지는 온전히 개인 취향 차이다. 내게 감동을 준 곳이라고 해서 다른 이들에게도 그랬을 거라 단정할 순 없다. 언제, 누구와 함께 갔는지가 더 중요한 요인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여행을 떠나온 목적과 각자의 가치관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테다.
부다페스트에서 머물렀던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고 내내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 내륙 도시여서 습하지 않아 견딜 만했지만, 햇볕이 피부에 닿으면 따갑다기보다 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아팠다. 한여름이라는 계절적 요인도 여행지의 감동을 반감시키거나 배가할 것이다.

▲치타델라 성곽에서 내려다본 부다페스트 전경. 다뉴브강을 사이로 왼편에는 부다 왕궁이, 오른편에는 국회의사당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 서부원
부다페스트를 떠나는 날 공항에서 역대급 가뭄과 폭염으로 다뉴브강의 수위가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는 뉴스가 들렸다. 헝가리의 원전이 가동을 멈춘다는 기사도 봤다. 카페와 식당은커녕 지하철조차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렸는데, 괜스레 미안해지기도 한다.
부다페스트를 떠나며 내겐 보석 같았던 세 곳을 소개한다. 바쁜 걸음의 단체 관광객들이라면 들르기가 쉽지 않겠지만, 개인이나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에겐 '이름 석 자의 명예를 걸고' 추천한다. 그렇다고 순전히 나만의 기준에 따른 것이니, 가서 실망했다고 나무라진 마시기를.
물론, 열 시간도 넘게 날아와서 부다페스트의 이른바 '3대장'이라는 국회의사당의 야경과 부다 왕궁, 어부의 요새를 빼놓기가 어렵긴 할 테다. 다만, 이들은 거칠게 말해서 '사진이 잘 나오는 핫스폿'일 뿐이다. 단언컨대, 그곳들에선 부다페스트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없다.
치타델라와 자유기념탑
가장 먼저 가볼 곳은 겔레르트 언덕 위에 세워진 철옹성, 치타델라(Citadella)다. 낮에 가도 좋고, 노을 지는 저녁 무렵에 가면 더 좋다. 해발고도라고 해 봐야 200m 남짓에 불과한 '뒷동산'이지만, 온통 평지인 부다페스트 시내 전체를 막힘없이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치타델라는 요새라는 뜻의 헝가리어다. 전쟁이 워낙 잦았던 터라 헝가리인들의 방어용으로 구축한 성곽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1848년 헝가리의 독립 혁명이 실패한 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대가 몇 해 뒤 헝가리인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쌓은 '반란 진압용' 요새였다.
치타델라의 '가치'는 탁 트인 경관에만 있지 않다. 성곽의 동쪽 끝에 세워진 '자유 기념탑'을 빼놓을 순 없다. 여성이 종려잎을 들고 선 형상으로, 부다페스트 시내 어디에서도 눈에 띌 만큼 우뚝하다. 이 기념물이 겪어야 했던 다사다난했던 역사가 곧 헝가리의 현대사여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헝가리를 나치에서 해방시켜 준 소련군을 향해 감사를 표한 기념물이었다가 사회주의 몰락 후 헝가리의 독립과 자유, 번영을 기리는 상징물로 탈바꿈했다. 정면에 새겨놓았던 러시아어도 떼어 냈고, 이름도 '해방 기념탑'에서 '자유 기념탑'으로 바꿨다.
기실 헝가리의 현대사는 '변절'로 점철됐다. 옛 헝가리 왕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나치와도 손을 잡았고, 나치가 패망하자 '해방군' 소련의 압제를 용인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엔 소련과 '손절'하며 서구화를 추진했다. 그 역사의 산증인이 바로 '자유 기념탑'이다.

▲'자유 기념탑'으로 탈바꿈한 '해방 기념탑'의 모습. 소련 해방군에 감사를 표했던 러시아어를 떼어낸 자리에 헝가리의 자유와 번영을 기리는 글귀를 붙여 놓았다. 가운데 양각한 십자가가 생뚱맞다. ⓒ 서부원
기실 '자유 기념탑'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도 권력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기득권층의 속내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하지만 헝가리의 민중은 역사의 변곡점마다 혁명으로 맞섰고,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을 감시할 목적으로 식민 모국의 군대가 세운 치타델라에 '변절'의 기념물이 서 있다는 게 참으로 얄궂다.
다뉴브강가의 신발 기념물
두 번째로 추천하는 곳은 국회의사당 옆 다뉴브강을 따라 놓인 녹슨 신발 기념물이다. 치타델라와 함께 찾는다면 더욱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나치의 패망을 눈앞에 둔 1944년 겨울, 나치의 잔당들에 의해 유대인을 비롯한 수많은 민중이 학살된 현장이다.

▲다뉴브강가의 신발 기념물. 헝가리의 나치 잔당에 의해 유대인을 비롯한 수많은 헝가리인들이 집단 학살된 현장이다. 뒤로 보이는 관광 유람선과 부다 왕궁의 모습이 외려 처연하게 느껴진다. ⓒ 서부원
더욱 안타까운 건, 헝가리인 권력자에 의한 헝가리 민중의 집단 학살로, 그들로선 떠올리기 꺼리는 역사다. 나치에 부역한 집권 세력이 패전에 분풀이하듯 저지른 만행으로, 당시 다뉴브강에 수장시킨 숫자만 1만여 명을 헤아린다. 그래선지 이곳엔 외지인 관광객들이 대부분이다.
기념물이 왜 하필 신발일까. 이곳에 서면 누구나 떠올리게 되는 질문이다. 여느 곳 같으면, 사실을 기록한 기념 표석을 세웠을 것이다. 그 기막힌 사연을 알고 나면, 전 세계에서 이보다 더 적실한 역사 기념물은 없다는 확신이 든다. 가히 역사 기념물의 표본으로 삼을 만하다.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강'을 직접 느껴보기 위해 모래톱으로 내려간 사람들의 모습. 그들은 이곳이 집단 학살의 현장이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까. 왼편으로 국회의사당이 보이고, 오른편으론 부다 왕궁과 어부의 요새가 보인다. ⓒ 서부원
처형 직전 신발을 벗기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들이 신고 있던 가죽 신발을 '재활용'하기 위해서다. 물자의 조달이 어렵던 전쟁 통에 가죽 신발은 귀한 자산이었다. 집단 학살이 자행되는 와중에도 '경제적 실리'를 챙기고자 했던 그들의 행태 앞에서, 인간의 속물성과 잔인성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보게 된다.
강변에 놓인 수십 켤레의 신발을 찬찬히 살펴보노라면 누구라도 울컥하게 된다. 젊은 여성이 신었을 하이힐도 있고, 기껏해야 대여섯 살 아이의 앙증맞은 신발도 있다. 뭉뚝한 작업화와 끈 달린 샌들, 한 뼘짜리 운동화를 모아 놓은 건 일가족이 함께 몰살당했다는 사실을 형상화한 듯하다.
그곳에 서면 다뉴브강 건너로 화려한 부다 왕궁과 마차시 성당, 어부의 요새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지만, 아름답게 보이기는커녕 처연한 느낌을 준다. 그 건물들은 당시의 참혹한 학살을 지켜보았을 테니 말이다. 풍경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본다는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과 광장
마지막으로 손꼽는 곳은 예나 지금이나 부다페스트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성 이슈트반 대성당이다. 지금도 부다페스트 시내에선 대성당의 종탑 높이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위상을 지니고 있다. 명실공히 헝가리 역사의 시작을 상징하는 역사적 건축물이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과 광장의 모습. 이날은 광장 한복판에서 이란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 서부원
대성당이 품고 있는 역사와 상징성도 중요하지만, 정작 이곳을 추천한 까닭은 따로 있다. 모든 관광객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대성당 내부의 건축적 화려함과 전시된 성 이슈트반 왕의 오른손 미라 때문만도 아니다. 그 이유는 대성당 내부가 아니라 건물 밖에 있다.
대성당 정면에는 작은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성 이슈트반 테르(ter)'로 명명된 이곳은 여느 곳과는 다른 '쓰임새'가 있다. 참고로, 광장이라는 의미의 '테르'는 부다페스트 대부분의 지하철역 이름에 붙어 있는데, 그만큼 시내에 광장이 많이 조성되어 있다는 뜻일 테다.
대성당 앞 광장에서는 시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아마도 도심 한복판이라는 접근성에다 종교 공간이라는 '배경'이 작용한 걸로 보인다. 규모로 치면 큰 저택의 앞마당 정도지만, 사람들은 이곳에서 저마다 피켓과 현수막에 자신의 주장을 적어 목청을 돋웠다.
짬이 날 때마다 마실 다니듯 광장을 찾았지만, 여느 곳에선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주민들과 더위를 잠시 피하려는 관광객들뿐이었다. 언뜻 이곳에서만 시위가 허용되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홀로 피켓을 들고 선 1인 시위도 있었고, 흔드는 깃발로 보아 이란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도 있었다.
아무리 넓고 화려해도 박제화한 광장에선 현지인들의 삶을 느껴볼 수 없다. 그곳들에선 현지 여행 기념사진을 찍는 일이 전부다. 모르긴 해도, 오늘도 대성당 앞 광장에선 누군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함께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