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기사 : 퇴사 후 떠난 울릉도 여행, 9달을 기다려준 숙소에서 이어집니다)
한 시간쯤 자고 숙소를 나왔다. 해가 지려면 아직 3시간쯤 남았다. 여름 불볕더위는 괴롭지만 일찍 날이 밝고 밤이 늦게 오는 건 좋다.
숙소가 있는 곳은 저동항 근처. 지난번 왔을 때 도동항에서 저동항 방향으로 난 행남해안산책로 초입만을 걷다 돌아가야 해서 무척 서운했다. 한 시간쯤 소요된다는 산책로를 이번에는 저동항에서 도동항 방향으로 이동한다.
본격 산책로 탐방 전, '촛불 바위'가 있는 반대편 방파제길을 걸었다. 오른쪽에서 볼 때는 반가사유상처럼 길고 넓적한 귀에 입술을 다문 부처상과 닮았다 싶었다. 왼쪽에서 보니 '촛불 바위'의 또 다른 이름인 '효녀 바위'의 전설처럼 바다에 나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어느 날 아버지의 빈 배가 떠밀려온 것을 발견한 딸의 망연자실한 얼굴 같기도 했다. 잠시 울컥.
경이로운 화산섬, 울릉도

▲저동항의 '촛불 바위'의 다른 이름은 '효녀 바위' ⓒ 이명주
250만 년 전쯤 바다 아래 화산이 여러 차례 폭발하면서 만들어졌다는 화산섬 울릉도. 다시 말해 바닷속에서 용암이 계속 분출되고 굳기를 반복해 거대한 산이 만들어졌고, 지금 내가 보고 걷고 있는 이 땅은 그 산의 정상 부분이라는 것. 250만 년이라니, 글로 읽고 말은 하지만 마치 신을 얘기하듯 인간의 것이 아닌 시간. 그러나 산책로를 둘러싼 거대하고 경이롭고 위태롭게도 초월적으로도 보이는 자연의 풍경에서 신의 존재를 수긍하듯 섬의 역사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행남해안산책로 ⓒ 이명주
바위 절벽을 깎아 놓은 직선과 완만한 아치형 다리를 여러 개 지나니 이번엔 90도 각도의 소라 계단이 서 있다. 자연도 놀랍지만 사람도 다른 차원에서 놀랍다. 나 같은 사람은 평생 나보다 훨씬 영리하고 의지가 굳건한 이들이 만든 기술 문명에 기대어 산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에 비행기를 띄우고 바다에 배를 띄우고 산꼭대기에 길을 놓는 일은 아니라도, 나는 나로써 이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그런 기여를 하는 사람이 '어른'이라 불릴 만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한다.

▲90도 각도로 선 '소라계단' ⓒ 이명주
바다와 맞닿은 산책로에 이어 섬인 걸 모르면 내륙의 깊은 산 속 같기도 한 숲길이 나왔다. '혼자라 좀 무서운데' 싶은 찰나, 운동복 차림의 슬로우 조깅을 하는 듯한 젊은 여성이 땀을 흘리며 달려왔다. 위험하거나 무섭다는 생각은 무지나 편견이 만들어낸 허상인 경우가 많다.
'쉼터로 오세요'란 작은 표지판 앞에선 양 갈래 길이 나뉘어져 있는데, 어느 쪽이 도동항 방향인지 헷갈려하며 왼쪽을 선택했다. 그러다 곧 아래서 걸어오는 현지인으로 보이는 중년 부부가 "이 길은 막혔다"며 돌아가라 알려줬다. 알듯 모를듯한, 대부분은 전혀 모르고 아는 것은 적은 불완전한 섬 안에서 나의 위치가 지금 내 삶의 자리 같기도 했다.

▲울창한 숲 안에 있으면 바다 한가운데 섬이란 실감이 안 난다. ⓒ 이명주
행남해안산책로 탐방을 마치고 도동항에서 저동항으로 다시 돌아오니 해가 지고 길가와 상점들에 조명이 켜져 있었다. 한낮엔 텅 비어 쇠락해 보였던 울릉수협 위판장에도 먹거리 포차와 테이블, 의자들이 들어서 주황색 불빛과 사람들도 채워져 있었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신들의 음식점 거리가 밤이 되는 장면이 떠올랐다.

▲저동항의 울릉수협 위판장 ⓒ 이명주
[7월 31일]
자고 일어나니 등 전체가 쑤신다. 갈비뼈, 겨드랑이를 포함해. 어제 만보기 앱에 기록된 걸음 수만 약 2만 보였다. 오늘은 독도! 지난해 처음 보러 왔다가 하늘이 허락해주지 않아 못 보고 돌아간 곳. 실제로 보면 어떤 모습일지, 어떤 마음일지 예상이 안 된다.
그건 그렇고, 하루 더 울릉도에 묵을지 떠날지 결정을 해야 한다. 섬 한 바퀴 버스 투어도 하고 싶고, 마침 지금 있는 저동항에서 '해변가요제'가 열린다는데 그 또한 궁금하다. 저동항여객터미널에 독도를 가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서 전날 포항여객선터미널에서처럼 놀랐다.
내가 살면서 한 번도 하지 않았거나, 할까 말까 오래도록 망설이던 일을 막상 해보면, 이미 그 일, 그 길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목격한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깊은 새벽에 나가보니 일하고 운동하고 노는 사람들이 가득할 때보다 더 각성이 된다.

▲같은 날 독도를 방문한 사람들 #DokdoIsKoreanTerritory ⓒ 이명주
어머니께 고양이들을 부탁하고 온 것을 결국 후회하고 있다. 날도 덥고 당신 일도 늘 바쁘신 양반이, 해지고 하루 한 번씩만 집에 와 달라는 내 당부이자 요청은 무시하신 채 어젯밤에 이어 오늘 아침에도 들렀다고 문자로 알리셨다(한 번 더 하루 한 번이면 족하다 말씀드렸고, 당신도 그러겠다 하셔 놓고는 이날 오후 4시에 또 한 번 들르신다). 여러 방식으로 말씀드려도 당신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끔 원망 조로 "(해)줘도 지랄" 식으로 말씀하신다. '모든 걸 다 주니까 떠난다'는 말은 남녀 관계든 부모 자식 관계든, 어느 관계에서나 멀어짐의 이유가 될 수 있다. 이 불통이 오래도록 의아하고 슬펐는데, 이젠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을 택해야겠다. 내 나이 마흔여덟, 어머니 당신은 일흔이 넘으셨으니.
독도행 배 출발. 기상 악화 등 변수가 없다면 대략 1시간 반 소요 예정. 1시간 전 먹은 멀미약이 효과를 발휘하는지 눈이 감긴다. 내 두려움의 이유는 상당 부분 사람에 대한 불신과 기술에 대한 무지가 만든다는 생각. 동시에 각각의 개인은 자신의 직업을 포함해 일상의 역할에 자기 양심과 능력, 책임을 다 해야 하고, 모든 개인들은 더불어 사는 다른 개인 즉 타인들을 존중하고 응원하는 것이 결국 내가 속한 사회, 나의 안전을 지켜주고 발전시킨다는 생각까지 이어진다.

▲독도는 울릉도와 한몸, 형제 같은 느낌이다. #DokdoIsKoreanTerritory ⓒ 이명주
독도 도착. 마침내 TV에서만 봤던 바로 그 독도가 현실로 와닿는다. 배가 접안 하는 동안 독도경비대원들이 손을 흔들며 환영해준다. 울릉도와 한 몸, 혹은 형과 동생처럼 느껴지는 작은 섬. 이 섬 하나를 두고 두 나라 사람들이 그토록 길고 질긴 갈등을 겪고 있음을 섬은 알 리 없겠지.
울릉도로 돌아와 섬을 나갈 배편 예약을 위해 해운회사에 전화를 거니 '12시부터 13시는 점심시간'이란 안내가 나오고 자동 종료된다. 여객터미널로 직접 갔다. 섬을 들어가고 나가는 배는 하루 한 번 뿐이고, 인터넷 기상 정보를 보니 내일 '흐림' 구간이 일부 있다. 지난번 처음 왔을 때 겪었던 '풍랑주의보'의 불안이 떠오른다.
내일모레부터 변경할 수 없는 중요한 일정이 있고, 마침내 독도도 보았으니 이번 여정은 1박 2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언젠가 다시 오면, 그때는 다른 계절에 와서 아직 못 본 사동항을 둘러봐야겠다.

▲'오징어 내장탕' ⓒ 이명주
이번 울릉도·독도 여행의 피날레는 멋진 점심으로 장식하기로 하고 신중하게 식당과 메뉴를 골랐다. 첫 번째 선택은 1인분 2만 원이나 하는 '홍합밥'이었지만, 보통 식사 2인분 가격이라도 1인분은 안 판다고 하셔서 포기. 첫날 와서 먹으려던 '오징어 내장탕'에 끝까지 미련이 남아서 출입문 밖에 손님들 여행 가방이 가득한 식당에 들어가 물어보니 흔쾌히 1인분도 판다 하셨다. 덕분에 '오징어 내장탕'의 호기심은 풀었는데, 그 맛은 참으로 익숙한 콩나물 들어간 김칫국의 그것이었고, 차이는 단단 쫄깃한 식감의 오징어 몸통 대신 잇몸으로 눌러도 사르르 녹듯 으깨져 넘어가는 내장이 소량 들어있다는 것.
오후 7시 56분.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탑승했다. 여행을 시작할 때처럼 기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 이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