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넘쳐나지만 마음까지 닿지는 못하는 시대다.
지역 협력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회의에 참석할 때면, 우리의 토론 문화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을 마주하곤 한다. 조심스럽게 꺼낸 소신 있는 의견은 때로 다른 생각에 대한 반대나 비판으로 받아들여진다. 누군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고, 상대를 설득하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회의장은 어느새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인다.

▲누가 옳은가를 결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으려는 것이다 ⓒ 김영사
통섭의 과학자 최재천 교수의 <숙론>(2024년 5월 출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성급한 결론이 아니라 충분히 듣고, 깊이 생각하며, 함께 답을 찾아가는 '숙론'이라고 말한다. 숙론은 상대를 이기기 위한 토론이 아니라, 더 나은 해답을 찾아가는 성숙한 과정이다.
숙론은 상대를 제압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나와 상대의 생각이 다른지 숙고해 보고 자기 생각을 다듬으려고 하는 행위다. 서로 충분히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인식 수준을 공유 또는 향상하려 노력하는 작업이다. 숙론은 '누가 옳은가'가 아닌 '무엇이 옳은가'를 찾는 과정이다. -19쪽
책에서 가장 가슴에 와닿은 문장은 "정답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이고, 말하기보다 듣기"라는 메시지였다. 평생 생태계를 연구해 온 저자는 자연의 다양성이 생명을 지탱하듯, 사회 역시 서로 다른 의견이 공존할 때 비로소 건강해진다고 설명한다. 다른 생각은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더 좋은 결론으로 나아가기 위한 귀중한 자산인 셈이다.
이 책의 장점은 거창한 이론에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정치와 교육, 조직문화, 일상의 갈등까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숙론이 왜 필요한지 차분하게 풀어낸다.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이해하려는 태도가 공동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수많은 예시가 증명해 준다.

▲말하기와 글쓰기에 가장 훌륭한 자료는 읽기가 제공한다. ⓒ 김영사
최근 체납관리단 일원으로 현장을 누비며 만나는 이들의 삶은 책 속의 문장을 현실로 끌어왔다. '체납'이라는 단어 뒤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닌, 저마다의 아픈 사연이 숨어 있었다. 질병으로 생업을 잃은 사람, 사업 실패 후 재기를 꿈꾸는 사람, 가족을 부양하느라 몸도 마음도 병든 사람…. 버거운 삶의 무게를 짊어진 이들의 이야기는 매일같이 내 가슴을 울리는 작은 종소리가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왜 세금을 내지 않았을까?"라는 질문부터 던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숙론>을 읽은 뒤 내 질문은 달라졌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상대를 함부로 판단하기보다 먼저 귀 기울이는 일, 당장 정답을 내놓기보다 사정을 이해하려 애쓰는 일이야말로 저자가 말한 '숙론의 시작'임을 현장에서 매일 배우고 있다.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의 삶도 돌아보게 되었다. 가족과의 대화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글을 쓸 때조차 나는 얼마나 상대의 말을 충분히 들었을까. 좋은 글 역시 독자를 설득하려 하기보다 먼저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이 순식간에 답을 내놓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러나 AI가 결코 대신할 수 없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마주 앉아 경청하고 고민하는 깊은 시간일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숙론은 다소 느린 과정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사회적 신뢰를 가장 빠르게 회복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갈등이 일상이 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조직에서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 그리고 더 좋은 글을 쓰고 깊은 관계를 맺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숙론>은 단순한 토론 기법을 넘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삶의 태도를 일깨워준다.
말을 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잘 듣는 일인지도 모른다. 조금 천천히 말하고, 한 번 더 상대의 뜻을 헤아리는 것. 어쩌면 숙론은 넘쳐나는 말 속에서 잃어버린 마음의 거리를 다시 좁히는 가장 따뜻한 대화법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