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한 남한강 위로 떠 있는 시루섬과 시루섬 출렁다리 전경. 뙤약볕 아래 잔잔한 물결을 품은 남한강 한가운데, 1972년의 뜨거운 서사가 깃든 시루섬이 조용히 누워 있다. ⓒ 김지영
지난 3일, 수통을 가득 채운 얼음물마저 금세 미지근해지는 섭씨 37도의 가마솥 더위가 충북 단양 전체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숨을 들이 쉴 때마다 뜨거운 열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 드는 한여름, 발걸음이 향한 곳은 충북 단양읍 증도리에 위치한 시루섬 출렁다리였다.
단양의 명물로 새로이 놓인 시루섬 출렁다리로 걸어가자, 보랏빛 철골 구조물 아래로 남한강의 잔잔한 물결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찌는 듯한 뙤약볕 아래서 바라보는 강 풍경은 하염 없이 평화롭고 고요해 보였지만, 눈앞에 펼쳐진 푸른 섬 시루섬은 사실 54년 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처절한 인간애가 펼쳐진 곳이었다.
다리 입구에 다다르자 안내판에 새겨진 '시루섬의 기적'이라는 여섯 글자가 묵직하게 가슴을 울렸다. 지금은 충주댐 건설로 대부분이 수몰 되어 푸른 잡목만이 빽빽하게 덮인 작은 섬이지만, 1972년 그날 이곳은 44가구 250여 명의 주민이 정답게 살아가던 풍요로운 마을이었다.
1972년 8월 19일, 남한강이 섬을 덮치던 밤

▲푸른 수풀로 덮여 있는 시루섬 본체의 모습. 1985년 충주댐 준공 이후 대부분이 수몰되어 지금은 녹음이 우거진 습지 섬으로 남은 시루섬. ⓒ 김지영
현장 안내판과 언론 보도 등을 참고해 시간을 54년 전으로 되돌려 본다. 1972년 8월 19일, 태풍 '베티'가 한반도를 강타하며 단양 지역에는 하루 동안 407.5mm라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부었다. 상류의 상진대교가 무너져 내리고 남한강 물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면서, 시루 모양을 닮았던 시루섬 전체가 서서히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 250여 명은 거칠게 몰아치는 흙탕물을 피할 곳을 찾아 헤매다 섬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높이 6m, 지름 5m 크기의 아담한 콘크리트 물탱크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위층 철판 면적은 불과 6평(약 19.8㎡) 남짓. 그 좁디 좁은 공간 위로 198명의 사람이 빽빽하게 올라서야 했다.
청년들은 물탱크 가장자리에 서서 서로의 팔을 굳세게 끼고 인간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 굳건한 팔 틈 사이로 노약자와 외지에서 누에를 치러 왔던 소녀들을 안쪽으로 들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센 비바람과 폭우가 몰아쳤고, 발밑에서는 누런 흙탕물이 물탱크 턱 밑까지 차올라 소용돌이쳤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균형을 잃고 넘어지면 198명 모두가 강물로 휩쓸려 내려갈 극한의 절체절명 순간이었다.
그 아수라장의 밤, 서른세살이었던 최옥희씨는 갓 백 일이 지난 어린 아기를 안고 물탱크 위 밀집한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하지만 밀려 드는 사람들의 무게 속에서 아기는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밀집해 있던 19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동요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튿날 새벽 4시, 14시간의 지옥 같은 사투 끝에 마침내 구조를 위한 배가 도달하고 물이 빠졌을 때야 비로소 사람들은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시대를 향한 경종

▲남한강 위를 횡단하는 시루섬 출렁다리의 웅장한 자태. 보랏빛 출렁다리가 과거의 아픈 기억과 오늘의 평화를 잇는 기하학적 궤적을 그리며 뻗어 있다. ⓒ 김지영
시루섬 출렁다리를 걸으며 아득한 강물을 내려다본다. 1985년 충주댐이 들어서면서 그날의 물탱크는 차가운 물속으로 깊이 잠겼지만, 6평 남짓한 공간에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서로를 지켜냈던 마음 만큼은 여전히 이 남한강 물결 위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듯하다.
문득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풍경을 되돌아보게 된다. 각자도생과 개별화가 미덕처럼 여겨지고, 조그만 불편함도 참지 못해 타인을 쉽게 배척하는 현대 사회에서 시루섬의 기적은 우리에게 묵직한 물음을 던진다.
6평 철판 위에서 나이 어린 소녀들과 노약자를 가운데로 밀어 넣고 가장자리에서 서로의 팔을 괸 채 밤을 지새웠던 시루섬 청년들의 연대, 그리고 마을 전체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슬픔을 가슴 깊이 묻어야 했던 어머니의 숭고한 침묵. 그것은 단순한 과거나 시골 마을의 옛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함을 지켜낼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인문학적 유산이다.
강물은 흐르고, 삶은 계속된다

▲충북 단양 시루섬 출렁다리 ⓒ 김지영
37도의 더위도 출렁다리 한가운데서 불어오는 서늘한 강바람 앞에서는 잠시 기세를 꺾는다. 다리 건너편으로 이어진 숲과 남한강의 푸른 물빛이 어우러져 한 폭의 수묵화를 그려낸다. 비록 그날의 흔적은 물 아래 가라앉았지만, 단양군이 마련한 생태탐방교와 기념 공간들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지워지지 않을 감동을 선물한다.
여행이란 단순히 아름다운 풍광을 관람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땅이 품고 있는 기억의 켜를 겹겹이 젖혀보고, 그곳을 살다 간 이들의 숨결과 조우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의 의미일 것이다. 이날 시루섬 출렁다리 위에서 거닌 발걸음은 타인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숭고한 희생의 가치를 다시금 깨닫는 소중한 여정이 되었다.
길을 돌아서며 다시 한번 조용히 시루섬을 바라본다. 펄펄 끓는 여름 볕 아래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그 강물 위에 깃든 어머니의 마음은 오늘도 이 세상을 따뜻하게 보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