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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에르몰라오 파올레티, <포셔의 마음을 얻은 바사니오>, 19세기 후반개인 소장 (위키미디어 커먼즈). 상자를 고른 뒤의 장면이다. 왼쪽 장 위에 상자들이 놓여 있고, 그 옆에 납 상자에서 나온 포셔의 초상이 세워져 있다. ⓒ 퍼블릭 도메인
지난 7월 29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연극 <베니스의 상인>을 봤다. 무대에서 <베니스의 상인>을 처음 본 것은 스무 살 즈음이었다. 나는 셰익스피어 '덕후'다. 영국에 사는 동안 무대에 셰익스피어가 걸리면 일단 극장을 찾아갔다. 그중에서도 <베니스의 상인>은 유독 자주 만났다. 한국에서도 다른 프로덕션이 올라올 때면 찾아가 보았다. 이 작품과 수십 년에 걸쳐 여러 번 만난 셈이다.
그런데 볼 때마다 다른 연극이 되어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이 변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제목의 '베니스의 상인'은 안토니오다. 샤일록은 상인이 아니라 고리대금업자다. 그런데 이 극을 본 사람들은 대체로 샤일록을 기억한다. 제목이 가리키는 사람과 관객이 보는 사람이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던 셈이다.
20대의 나는 포셔가 너무 멋졌다. 남장을 하고 법정에 들어서서 살 한 파운드를 내놓으라는 샤일록(Shylock) 앞에 조금도 밀리지 않던 인물.
"자비란 강요될 수 없는 것. 하늘에서 내리는 부드러운 비처럼 떨어진다."
자비에 관한 저 유명한 연설을 하고도, 그 자비가 거절 당하자 포셔는 태도를 바꾼다.
"잠깐, 이 계약서는 피를 한 방울도 주지 않는다. 적힌 것은 '살 한 파운드'뿐이다.
그러니 계약대로 살만 가져가라."
샤일록이 내세운 법으로 그를 제압하는 포셔의 총명함. 그때 나는 안토니오 쪽에 서 있었다. 내게 포셔는 셰익스피어가 만든 가장 영리한 여성 중 하나였다.

▲존 에버렛 밀레이, <포셔>, 188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위키미디어 커먼즈)이 그림에는 법정이 없다. 샤일록도, 안토니오도, 방청객도 없다. 기둥 하나 앞에 붉은 법복을 입은 포셔가 혼자 서 있을 뿐이다. ⓒ 퍼블릭 도메인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같은 장면에서 다른 것을 본다. 그날 법정이 샤일록에게 내린 판결이다. 베니스의 법은 샤일록의 재산 절반을 안토니오에게, 나머지 절반을 국가에 넘기도록 했다. 공작은 그의 목숨을 살려 주고 국가에 귀속될 몫을 벌금으로 낮출 여지를 주었다.
안토니오는 자신에게 돌아온 절반을 맡아 두었다가 샤일록이 죽은 뒤 로렌초와 제시카에게 넘기겠다고 했다. 대신 두 가지 조건을 붙였다. 당장 기독교로 개종할 것. 죽은 뒤 남은 전 재산을 딸 제시카와 로렌초에게 넘길 것. 공작은 이 조건을 따르지 않으면 사면을 거두겠다고 했다.
그리고 법정의 사람들은 그것을 자비라고 불렀다. 자비를 그토록 아름답게 설교하던 입들이 한 사람에게서 재산과 신앙을 거두어 가면서 말이다. 자비란 강요될 수 없는 것이라던 바로 그 법정에서, 자비라는 이름의 처분이 강요됐다.

▲리처드 스머크, <베니스의 상인 4막 1장, 재판 장면>, 1815년 이전 제작.로얄 셰익스피어 컴퍼니 컬렉션 (위키미디어 커먼즈). 이 극을 그린 그림 가운데 군중이 이렇게 많이 들어간 것은 드물다. 자비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모두 이 안에 있다. ⓒ 퍼블릭 도메인
셰익스피어가 이 베니스의 법정에서 어느 편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는 샤일록에게 이런 대사를 주었다.
"당신들이 찌르면 우리도 피를 흘리지 않소? 간지럽히면 웃지 않소? 독을 먹이면 죽지 않소? 그리고 당신들이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면, 우리라고 복수하지 않겠소?"
이 연극을 처음 봤을 때의 나는 이 대사를 흘려들었고, 지금의 나는 이 대사에서 연극이 다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희극의 악역으로만 밀려날 수도 있었던 인물에게 작가는 극에서 가장 아픈 항변을 쥐여 주었다.
이번에 내가 본 무대는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다른 자리에서 보게 하는 연출이었다. 극은 군무와 노래로 시작했다. 흥겨운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흥겨움 한가운데서 한 사람이 가면을 쓴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고 있었고, 이윽고 그가 무대로 걸어 나왔다. 샤일록이었다.
악인은 누가 만들었는가. 첫 장면부터 그 질문이 걸려 있었다. 박근형 배우가 연기한 샤일록이 그 질문을 끝까지 끌고 갔다.
덧붙이면, 나는 샤일록을 옹호할 생각이 없다. 그는 돈 대신 살을 고집했고, 빌린 돈의 몇 배를 갚겠다는 제안을 거듭 거절했고, 법정에서 칼을 갈았다. 그를 딱한 사람으로만 읽는 것도 그를 악당으로만 읽는 것 만큼이나 이 극을 좁게 만든다. 내가 달라졌다고 느낀 지점은 샤일록이 옳으냐가 아니다. 그를 이긴 방식이 자비라고 불렸다는 사실이다.
400년 동안 무대에서 내려온 적이 없는 이야기. 셰익스피어가 쓴 이 작품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변한 것은 나다. 고전이 위대하다는 말은 결국 이런 뜻인지도 모른다. 좋은 작품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이 서 있는 자리를 비춰 준다.
20대의 나는 자비를 설파하는 영민한 포셔를 보았고, 지금의 나는 그 자비가 과연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 본다. 그때는 이기는 사람이 보였고, 지금은 잃는 사람도 보인다. 그사이 내가 무엇을 지나왔는지, 연극이 나에게 알려 주는 셈이다.

▲마우리치 고틀리프, <샤일록과 제시카>, 1876 (위키미디어 커먼즈)법정 바깥의 그림이다. 재판의 판결도 아니고 곧 떠날 딸을 안고 있는 아버지다. 원화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사라져 지금까지 행방이 확인되지 않은 작품이다. ⓒ 퍼블릭 도메인
<베니스의 상인>을 그린 화가들은 대체로 재판정을 그렸다. 붉은 법복의 포셔, 칼을 든 샤일록, 술렁이는 방청석. 무대에서 가장 볼 만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폴란드 유대계 화가 마우리치 고틀리프는 법정 바깥을 그렸다. 재산도 신앙도 아직 잃지 않은 샤일록이, 곧 자기를 버리고 떠날 딸을 안고 있는 순간이다. 그림 속에서 딸은 이미 아버지를 보고 있지 않다. 아버지는 검은 옷에 싸여 캔버스의 어둠이 되고, 딸은 흰 옷을 입어 빛이 된다. 두 사람은 이미 다른 색에 속해 있다.
화가는 스무 살 무렵, 뮌헨 미술아카데미에 다니던 때에 이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았고, 몇 년 뒤 스물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스무 살에 그는 이 극에서 잃는 사람을 먼저 본 셈이다.
이번 무대에서 내가 본 샤일록은 그 얼굴에 가까웠다. 판결이 내려지고 샤일록이 법정을 걸어 나갈 때, 이긴 사람들 쪽이 아니라 샤일록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베니스의 상인>에는 또 하나 유명한 장면이 있다. 금, 은, 납 세 개의 상자가 나온다. 포셔에게 청혼하러 온 사람들은 그중 하나를 골라야 하고, 포셔의 초상이 들어 있는 상자를 고른 사람은 포셔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된다.
모로코 왕자는 금 상자를 골랐다. 가장 귀한 사람에게는 가장 귀한 것이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뚜껑을 열자 해골이 들어 있었고, 텅 빈 눈에 두루마리가 하나 꽂혀 있었다. 거기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반짝인다고 해서 다 금은 아니다. 겉모습에 이끌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팔았다.
예전의 나는 이 장면을 그저 재미있는 대목 정도로만 생각했다. 상자를 잘못 고른 사람이 망신을 당하고 퇴장하는 장면에서 마음껏 웃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 두루마리가 모로코 왕자 한 사람에게 하는 말로 읽히지 않았다. 그 법정에서 가장 반짝이던 것은 '자비'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상자를 열었을 때 샤일록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자비가 아니라 가장 가혹한 법이었다.
몇 년 뒤에 이 극을 또 보게 되면, 나는 또 다른 상자를 열게 될지도 모르겠다.
* 셰익스피어 인용문은 원문을 바탕으로 필자가 직접 옮겼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와 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