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 엄정지서 민◯◯(6.25 당시 27세) 순경은 밤이 이슥해지자, 동료 경찰들과 의용 경찰, 그리고 우익청년단체 단원들을 이끌고 엄정면 유봉리로 향했다. 초가을 저녁이라 쌀쌀하기는 했지만, 등과 목덜미에서는 땀이 줄줄 흘렀다. 지서가 있는 면 소재지에서 유봉리까지 12km나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서에서 유봉리 초입까지는 트럭을 타고 이동했지만, 큰길에서 마을까지의 소로길은 걸어야만 했다. 유봉리는 엄정면 최북단에 위치한 마을로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과 충북 제천시 백운면에 인접해 있다. 또한 유봉리는 산악지대에 위치한 곳으로 6.25 전후에 화전민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이렇다 보니까 큰길에서부터 마을까지 걷는 데만 한 시간가량이나 걸렸다.
유봉리 수풍말에 들어선 일행들은 김흥태 집을 들이닥쳐 "김흥태 나와"라고 소리 질렀다. 하지만 지방 좌익의 우두머리 격인 김흥태는 군경이 들어왔다는 소리에 이미 몸을 피한 상태였다. 경찰이 찾던 당사자가 없자 민◯◯은 김흥태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처를 연행했다. 김흥태 가족을 포함해서 수풍말에서 수십 명의 노인과 여성, 아이들이 막고개로 연행되었다.
민◯◯은 "빨갱이 새끼들은 씨를 말려야 해. 너네들은 나를 원망하지 말고, 너네 자식과 남편이나 원망해"라며, 소총으로 맨 앞줄에 있는 이를 향해 쏘았다. 이를 시작으로 경찰들은 마구잡이로 총질을 해댔다.
총질이 그치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죽창과 낫, 칼로 마구 쑤셔댔다. 1950년 9월 말, 충북 충주시 엄정면 유봉리의 막고개 달빛 아래서 벌어진 '피의 제전' 이었다(<오마이뉴스> 2018.3.26. 매일 밤 지서 순경이 마을에 올라온 이유)
우익 인사들이 연판장 돌려
이토록 UN군 수복 후 충주 엄정면 괴동리, 유봉리, 가춘리 등 엄정면 일대에서는 경찰과 우익단체의 부역 혐의자에 대한 즉결 처형이 진행되었다. 엄정면 심◯◯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학살된 이들이 약 400명에 달한다고 한다.
학살된 이들은 마을 인민 위원장과 민청 위원장, 여맹 위원장, 파출소원의 가족들이었다. 인공 시절 완장을 찬 당사자는 대한민국 군경이 수복한다는 소식에 월북하거나 타지로 도망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진 이들은 인공 시절 감투 쓴 이들의 부모나 아내, 어린 자식들이었다. 이른바 대살(代殺)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엄정지서의 체포 대상 영순위는 인공 시절 인민 위원장을 맡은 김복룡이었다. 엄정지서에서는 경찰을 급파해 김복룡을 체포해 지서 유치장에 구금했다.

▲김복룡 ⓒ 김광영
김복룡 본가에서는 형 쌍룡과 아내 홍음전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사시나무 떨듯 긴장했다. 엄정면 곳곳에서 부역자들에 대한 인간 사냥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기 때문이었다. 면 인민 위원장을 하다 지서에 연행되었기에 살아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기에는 애초에 글렀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정작 김복룡 자신은 담담했다. 자신이 우익 인사를 직접 죽이거나 학살을 배후 조종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 남에게 해코지를 하기는커녕 우익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해 주었다. 그런 처신으로 인민군 점령기와 후퇴기에 인민 위원장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김복룡의 진심은 인공 시절 반대편에 있었던 우익 인사들의 행동으로 곧바로 증명되었다.
면 소재지인 용산리와 이웃 마을인 미내리에서 김복룡 석방 연판장이 돌았다. 연판장을 돌린 이들은 지역 유력 인사와 우익 청년들이었다. 허진이 주도했으며 6.25 전에 면장이었던 김씨도 연판장에 도장을 찍었다. 인민위원장 석방을 위한 유력 인사와 면민들의 연판장에 엄정지서장은 당황했다.
하지만 전후 복구 과정에서 유력 인사들의 협조를 받아야 할 처지가 된 지서장으로서는 연판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김복룡은 유치장에서 풀려났다. 후일 밝혀진 일이지만, 김복룡은 지서 유치장에서 중대한 결심을 한 듯했다. 대한민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빨갱이라는 주홍 글씨를 지워야만 한다는 점이다.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장남 김화영을 우익 집안에 결혼시키고 입대를 자원시키기로 한 것이다. 김화영 약혼녀의 작은 외삼촌이 1947년도에 김복룡 집을 부순 엄정면 서북청년단장 남◯◯ 이었다. 어떻게 보면 극우 반공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략적 결혼이었다.
오해가 부른 참극?
석방된 김복룡은 한편으로는 장남 화영의 약혼과 입대를 추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에서 뽑는 일등기관사에 취업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우선 도민증을 발급받아야 했다. 신청한 도민증이 충주에 와 있어 다음 날이면 엄정 집에 도착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하필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겨울 피난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김복룡은 도민증 받기 하루 전날 피난짐을 싸 충주로 향했다. 그가 이렇게 부랴부랴 짐을 싼 것은 장남 화영의 군 입대날이 도민증 받기 하루 전인 1951년 1월 6일로 잡혔기 때문이다.
도민증은 충주경찰서에 가서 직접 받을 요량이었다. 장남 화영의 입대 시간 때문에 충주로 향하는 가족의 대열은 두 팀으로 나뉘었다. 화영(당시 22세)과 그의 동생 광영(당시 7세)이 먼저 출발했고 김복룡·홍음전 부부와 막내아들 병영이 뒤를 따랐다.
복룡이 아들 일행과 1차로 만나기로 한 목행교는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더군다나 미군 폭격으로 목행교가 끊어져 피난민들이 얼어붙은 강 위로 걷고 있었다. 목행교 앞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이 어그러지자, 화영은 강을 건너 동생 광영을 강변의 바위 옆에 남겨두고 부모님을 마중 나갔다.
20분 만에 돌아온 화영은 부모님을 만나지 못해 진이 빠져 있었다. 화영과 광영은 20리(8km) 길을 걸어 화영의 약혼녀 집으로 갔다. 2차로 만나기로 한 거기에도 복룡은 없었다. 아들을 찾으러 나갔다는 것이었다. 그 어긋남이 부자지간을 영원히 떼어 놓은 일이 될 줄은 당시에는 꿈도 꾸지 못했다.
아들을 찾으러 간 복룡이 호암저수지 근방을 지나갈 때였다. "김복룡. 꼼짝 마!" 당황한 그에게 다가온 이는 현역 군인인 이◯◯이었다. 이◯◯은 이효승씨 행랑채에 살던 이의 자식이었다. 이효승은 후일 1956년도 제2회 지방선거에 충북도의원에 당선되게 되는 이다.
이◯◯은 김복룡을 근처 논으로 끌고 가 다짜고짜 총 방아쇠를 당겼다. 수복 후 엄정지서에서도 석방된 김복룡이 너무나 허무하게도 이승을 하직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이◯◯은 왜 김복룡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까?

▲학살 터김복룡 학살 장소. 당시에는 일대가 논이었다. ⓒ 김광영
이◯◯의 아버지가 UN군이 수복하기 직전 후퇴하는 인민군과 지방 좌익에게 학살되었다. 휴가를 나온 이◯◯은 그 소식에 분개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저 사람이 엄정면 인민 위원장을 했던 김복룡이여"라는 소리에 김복룡을 잡아 죽인 것이다. 김복룡이 김삼룡의 형이란 것도 당연히 알았을 터였다.
김복룡이 자기 아버지 학살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김복룡이 우익 인사 여럿을 살려 준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빨갱이'에 대한 증오심이 물불 가리지 않게 한 것이다. 이는 김복룡의 죽음이 이◯◯의 단순한 오해가 빛은 참극인지, 이성을 잃은 광란의 폭력인지를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등수 바꾸면 안 되겠니?", 병영의 가슴에 난 이날의 상처
남로당 총책 김삼룡 집안의 불행은 김삼룡과 그의 형 김복룡의 죽음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김삼룡의 맏형 김쌍룡은 동생들의 연이은 불행에 화병을 얻어 1952년 12월 세상을 하직했다.
김삼룡의 두 동생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행방불명되었다. 김삼룡의 동생 김동식과 김순만이 그런 경우이다. 김삼룡의 막냇동생 김순만(1918년생)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각종 씨름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그는 백중날 때마다 엄정면에서 벌어진 씨름대회에서 우승한 스타였다.
심지어 인천 전국 대회에서도 우승을 했다. 그런 청년 장사가 6.25가 발발하자마자 김삼룡의 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행방불명되었다. 동식과 순만은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으로 대한민국 군경에게 학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삼룡의 바로 아래 동생 봉룡(1912년생)의 인생 역정 역시 만만치 않다. 봉룡은 형 복룡(1905년생)과 함께 인공 시절 엄정면 인민위원회에서 일을 했다. 형 복룡이 원만한 성격이었다면 동생 봉룡은 원리 원칙대로 일을 집행해 남들의 원성을 산 경우였다. UN군 수복 후 봉룡은 자식 둘을 남겨두고 경상북도 청도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이름을 바꾸어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전직 경찰을 했던 봉룡의 큰동서가 청도에 은신하고 있던 봉룡을 신고하겠다는 것이다. 불고지죄를 두려워한 이가 자신의 가족을 신고하는 행동은 박정희 정권 아래서는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복룡의 아들 광영은 작은아버지 봉룡이 자수하도록 권유했다. 봉룡이 자수하면서 인공 시절 부역 행위는 공소시효 기간인 10년이 지나 처벌되지 않았다. 한편의 소동은 반공 시대의 우화(偶話)였다. 자식이 부모를, 동생이 형을 신고하는 시대는 이승만·박정희 시대에 빈번한 일이었다.
좌·우 이념대립과 국가 폭력, 이에 따른 연좌제의 상처는 김삼룡 대에 끝나지 않았다. 김삼룡의 조카 대에까지 이어졌다. 봉룡이 청도로 가면서 남겨둔 자식 중에 딸 희자(1940년생)가 있었다. 홍음전이 조카 희자를 거두었지만, 희자 얼굴에는 늘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경찰의 미행과 감시가 따랐기 때문이다.
'꼬마 경찰'이라는 별명을 지닌 이가 툭하면 희자를 찾아와 "네 아버지 어디 있냐? 집에 다녀갔지?"라며 윽박질렀다. "아버지를 신고하지 않으면 모두 죽여버리겠다"며 협박하기도 했다. 경찰의 협박을 이겨내지 못한 희자는 17세의 나이에 충주군 엄정면 백운암으로 출가했다. 1957년도였다.
복룡의 막내아들 병영(1946년생)에게도 시대의 불운은 벗겨가지 않았다. 엄정면 충원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할 때였다. 교장이 병영에게 "등수 좀 바꾸면 안 되겠니?"라고 했다. 즉, 전교 2등을 한 아이를 1등 한 것으로 바꿔 대학 진학에 유리하게끔 하려고 한 것이다. 병영은 어차피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병영의 가슴에 난 이날의 상처는 아버지가 6·25 때 학살된 것만큼이나 컸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노동자·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 모든 이가 평등하게 사는 사회를 꿈꾸었던 김삼룡의 꿈은 깨졌다. 그의 일가도 파멸되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주홍 글씨는 자식 대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제라도 국가가, 우리 사회가 김삼룡 일가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를 어루만져주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