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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
산토도밍고에 위치한 오자마 요새. 1496년, 바르톨로메 콜럼버스가 남부 해안 오자마 강(Rio Ozama) 하구에 누에바 이사벨라(Nueva Isabela)를 건설한다. 이 정착지는 이후 오늘날의 산토도밍고(Santo Domingo)로 발전, 아메리카 최초의 지속적 유럽 도시가 된다.
▲산토도밍고에 위치한 오자마 요새.1496년, 바르톨로메 콜럼버스가 남부 해안 오자마 강(Rio Ozama) 하구에 누에바 이사벨라(Nueva Isabela)를 건설한다. 이 정착지는 이후 오늘날의 산토도밍고(Santo Domingo)로 발전, 아메리카 최초의 지속적 유럽 도시가 된다. ⓒ 이안수

2025년 6월, 푸에르토리코를 방문 후 다시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돌아갔다.

목적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8월 3일 스페인 팔로스에서 출발해 대서양을 건너 도착한 히스파니올라 섬(오늘날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섬) 중 우리가 직접 접근 가능한 첫 정착지인 히스파니올라 섬의 유적지를 답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기함 산타 마리아가 좌초된 곳인 산타 마리아 비치와 좌초된 산타 마리아의 목재로 세운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유럽인 기지인 라 나비다드(La Navidad)의 경우, 아이티 공화국의 치안 불안으로 한국 정부가 여행금지국으로 지정한 상태였으므로 방문이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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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곳은 콜럼버스가 1493년 두 번째 항해 때 세운 아메리카 최초의 공식 유럽인 정착지인 도미니카 공화국의 라 이사벨라(La Isabela)였다. 아이티와의 국경이 가로막지 않았다면 라 나비다드와는 차로 3시간쯤의 거리였다.

두 대의 모터사이클 라이더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당도한 라 이사벨라는 국립 역사공원으로 지정되어 잘 정비되고 관리되고 있었다.

유적지 내의 박물관과 콜럼버스의 집터, 최초의 교회, 묘지, 요새 흔적 등을 유적지 관리 공무원으로부터 안내받고 질병, 허리케인, 식량 부족, 원주민과의 갈등으로 인해 불과 몇 년 뒤 남쪽의 산토도밍고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들었다.

콜럼버스의 집터에서

라 이사벨라 콜럼버스의 집터에서 대서양의 거친 바람과 파고 너머의 유럽쪽을 바라보았다. 중세적 세계관을 무너뜨리고 근세 세계 체제를 열었던 시대의 초입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의 항해로 촉발된 대서양 횡단 항로는 유럽인의 지리적 상상력을 완전히 바꾸었다. 유럽 경제의 급격한 성장을 이끌어 세계적 자본주의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수천 년간 이어온 문명들이 수십 년 만에 붕괴되는 엄청난 비극과 오늘날 이 대륙에서 이어지는 구조적 문제들의 시작이기도 했다.

카리브해의 타이노족은 1492년 이후 불과 수십 년 만에 거의 사라졌고 아메리카는 식민지와 착취의 공간으로 변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집(Casa de Colon) 유적. 콜럼버스가 1493년 두 번째 항해 때 세운 아메리카 최초의 공식 유럽인 정착지인 도미니카 공화국의 라 이사베라 역사 공원내에 있다. 사진은 콜럼버스가 실제로 거주했던 저택의 외벽 기초 부분이며, 짚으로 만든 지붕은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집(Casa de Colon) 유적.콜럼버스가 1493년 두 번째 항해 때 세운 아메리카 최초의 공식 유럽인 정착지인 도미니카 공화국의 라 이사베라 역사 공원내에 있다. 사진은 콜럼버스가 실제로 거주했던 저택의 외벽 기초 부분이며, 짚으로 만든 지붕은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 이안수

라 이사벨라 방문 후 몬테크리스티(Monte Cristi)에서 며칠을 머무는 동안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인구 감소와 문화적 파괴를 촉발한 사건이기도 한 콜럼버스의 항해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매년 10월 12일의 '콜럼버스 데이'가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에서 논쟁이 되면서 일부 지역에서 '원주민의 날'로 바꾸어 기념하게 된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항해 업적 중 하나였던 그의 항해가 아메리카의 기존 정치·종교·언어 체계를 급격히 무너뜨리고 식민지 사회로 재편되는 시작이었음에 대한 시각의 반영인 셈이다. 콜럼버스 개인 또한 '발견자'에서 '침략자와 파괴자'로 인식이 전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이티 옆에 있으면서도 갈 수 없게 된 아이티에 대한 관심은 더 커졌다.

1492년 이전 히스파니올라 섬은 타이노족이 섬 전체에서 여러 추장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살던 사회였다. 1492년 당시 약 30만~300만 명으로 추산되던 인구는 콜럼버스 도착 후 스페인 식민지가 건설됨으로써 질병·폭력·노예화로 1514년 약 2만 명으로 감소하고 58년이 지난 1550년에는 일부 혼혈 후손 외에는 사실상 소멸되었다(스페인 식민지 기록과 후대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확인된 사실이며, 이는 아메리카 원주민 역사에서 가장 급격한 인구 붕괴 사례 중 하나다. -기자 주).

비극의 시작

오늘날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 간의 관계는 국경·이주·경제 문제로 불안과 반감이 앞선다. 도미니카 국경 마을에서는 아이티 얘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나를 적대시한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이주민 증가와 그로 인한 치안 불안, 일자리 경쟁 등을 생계 위협으로 인식하는 분위기였다.

콜럼버스의 상륙이 오늘날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분열과 대립의 뿌리를 제공했다. 히스파니올라 섬을 스페인 식민지로 만든 이후 식민 통치자들이 들여온 질병과 노예화로 원주민 사회가 붕괴하면서 타이노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자 노동력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아프리카 노예가 대체 노동력으로 대규모 유입됨으로써 섬의 인구 구조와 문화가 급격히 변화되었다.

유럽 식민 경쟁이 심화되면서 결국 섬은 1697년 리스위크 조약으로 스페인령(동쪽, 도미니카)과 프랑스령(서쪽, 아이티)으로 나뉘었고, 이 식민지 분할이 현대까지 이어진 갈등의 단초가 되었다.

이후, 1804년 노예 반란으로 아이티가 프랑스로부터 독립,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 탄생, 1822~1844년 아이티의 도미니카 점령, 도미니카 독재자 트루히요 국경 지역 아이티인 대규모 학살, 1960~1980년대 아이티인들의 도미니카 이주·노동 갈등에 이어 도미니카의 추방 정책, 아이티계 후손들의 국적 박탈, 국경 장벽 건설, 국경 봉쇄와 추방이 지속되어오고 있다.

1492년 콜럼버스의 히스파니올라 섬 상륙 이후 섬은 비극의 역사를 계속 써오고 있다.

학살의 강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 간의 긴장 관계를 좀 더 깊이 파악하고 두 나라 간의 정치, 경제적 긴장과 냉각 상태가 두 나라 삶에 어떤 모습으로 투영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싶었다.

두나라는 북쪽 끝인 도미니카 공화국의 페피요 살세도(Pepillo Salcedo)에서 남쪽 끝 페데르날레스(Pedernales) 지역까지 섬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국경이 두 나라를 양분하고 있다. 아내와 나는 육로 약 390km에 달하는 국경을 따라 이동하면서 주요 국경도시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학살의 강'을 따라 세워진 아이티와의 국경 철책. 대서양 연안의 만사니요 만과 아이티와 국경을 이루는 다하본 강의 하구에 만들어진 도미니카 쪽의 철책 장벽이다.
▲'학살의 강'을 따라 세워진 아이티와의 국경 철책.대서양 연안의 만사니요 만과 아이티와 국경을 이루는 다하본 강의 하구에 만들어진 도미니카 쪽의 철책 장벽이다. ⓒ 이안수

차량을 렌트하지 않고 이 계획이 실현 가능할지를 확인하기 위해 숙소를 몬테크리스티에 둔 채 버스와 택시를 이용해 페피요 살세도를 방문했다.

리스위크 조약 이후 확정된 아이티와의 국경 최북단 도시로 다하본 강(Río Dajabón)을 중심으로 벌어진 1937년 파슬리 학살의 주요 무대로 아이티인을 색출하고 학살했던 지점 중 하나였다.

대서양 연안의 만사니요 만과 국경선인 다하본 강의 하구를 답사했다. 다하본 강은 아이티 쪽에서는 마사크 강(Rivière du Massacre)으로 불리며 프랑스어로 '학살의 강'이라는 뜻이다. 식민지 시기의 유혈 충돌과 파슬리 학살이 아이티인들에게 남은 역사적 기억이 강 이름에 투영된 것이다.

긴장된 마음으로 국경을 살폈다. 깊은 상처를 각인한 강의 이름과 달리 현재는 사람들이 강을 건너 오가고 있었고 페피요 살세도의 장날마다 아이티 사람들이 농산물, 수공예품, 의류 등을 가지고 와 판매하고 식료품, 의약품, 가전제품 등을 의류 같은 것을 사서 간다고 했다.

다하본 국경 시장, 장날에는 국경이 없다

다음 방문지는 다하본(Dajabón)이었다. 도미니카 공화국 북서부 국경 도시로 다하본 강을 사이에 두고 아이티의 오완민트(Ouanaminthe)와 맞닿아 있으며 다하본 다리가 두 나라를 연결한다. 아이티 쪽에서는 이 다리를 '학살의 강 다리'라고 부른다.

다하본의 가장 큰 특징은 국경시장(Mercado Fronterizo de Dajabón)이다. 월요일과 금요일이 공식 장날이고 목요일과 일요일은 프리마켓이 열리지만 규모나 운영방식은 크게 변화가 없다.

이날은 국경 검문소가 임시로 열려 수천 명의 아이티인들이 합법적으로 도미니카 쪽 시장으로 넘어와 물건을 거래한다.

이런 특이한 방식이 국경 시장은 2021년 도미니카와 아이티 정상간 국경 관리·무역·이주 문제를 다루는 공동 선언 발표를 통해 국경시장 운영의 근거가 마련되고 시장 운영을 지속적으로 관리·감독할 필요성에 따라 국경 무역 상설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 배경에는 양국의 절실한 이해관계가 있다. 아이티 주민들에게는 장날 개방 없이는 수천 가구의 생필품 확보가 어려워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이었고 도미니카 측 국경 상인들에게는 아이티인들의 구매력이 지역 경제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익원이기 때문이다.

불법입국?

우리가 다하본 국경시장을 방문한 날은 2025년 6월 8일, 일요일로 프리마켓이 열리는 날이었다. 공식 장날 못지않게 장이 열리고 장꾼들이 왕래하고 있었다.

다하본 강의 국경 다리 위 검문소. 도미니카?공화국?북서부?국경?도시인?다하본은?다하본?강을?사이에?두고?아이티의?오완민트와?맞닿아?있다.?다하본의?가장?큰?특징은?국경시장이다.?월요일과?금요일은 공식?장날이며 목요일과?일요일에는 프리마켓이?열린다.?이날들은?다리 위?국경?경계선?검문소?문이?열리고?아이티?사람들이?합법적으로?왕래하며?활발한?교역이?이루어진다.
▲다하본 강의 국경 다리 위 검문소.도미니카?공화국?북서부?국경?도시인?다하본은?다하본?강을?사이에?두고?아이티의?오완민트와?맞닿아?있다.?다하본의?가장?큰?특징은?국경시장이다.?월요일과?금요일은 공식?장날이며 목요일과?일요일에는 프리마켓이?열린다.?이날들은?다리 위?국경?경계선?검문소?문이?열리고?아이티?사람들이?합법적으로?왕래하며?활발한?교역이?이루어진다. ⓒ 이안수

우리는 아이티의 상황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국경시장 메인 건물을 지나 다하본 강의 다리 중앙의 국경 경계선 검문소까지 갔다. 영어에 능숙한 국경시장에서 만난 아이티 소년이 앞장서서 국경 상황을 설명하면서 우리를 안내했지만 인파에 묻힌 상황이라 머리에 짐을 인 장꾼들과 오토바이·차량 사이로 떠밀려 가듯 나아갔다. 신분확인이나 통제도 없었다. 우리는 다리 중앙의 국경 철문에서 소년과 작별하고 돌아섰다. 국경 철문은 완전히 개방되어 있고 아이티 주민들은 자유롭게 오가고 있었다.

우리는 다리 차선을 건너 아이티 쪽에서 나오는 쪽 차선을 따라 다시 다하본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국경경비대원에 의해 국경 검문소 막사로 안내되었고 여권 제시를 요구받았다.

문제는 우리가 장터의 복장한 상황에서 여권 분실을 우려해 숙소에 여권을 두고 영문운전면허증만 소지하고 있었다. 입국심사관이 물었다.

"당신들은 아이티에서 입국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답했다.

"아닙니다. 국경시장을 방문하고 도미니카 측 국경다리를 잠시 걸었을 뿐입니다."

상황 설명을 들은 입국 심사관은 검문소 건물의 사무실로 우리를 데려갔다.

"합법적으로 입국한 한국인 여행자도 국경시장이 도미니카 공화국 쪽에서 열리므로 자유롭게 국경시장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장날에는 아이티 주민들이 합법적으로 넘어오지만, 외국인이 아이티 쪽으로 임시 입국하려면 정식 입국 절차가 필요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사관의 설명 후 우리에 대한 추가 질문과 확인 후 우리는 다시 다하본 시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 눈에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개방된 국경을 오가는 모습으로 보였던 것은 국제시장까지만이었다. 아이티인들은 다하본 시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비자가 필요했고 국경 검문소 막사는 그들의 도미니카 진입을 막는 차단선이었다.

영문운전면허증을 통한 우리의 합법적인 도미니카입국을 확인하는 것으로 여권을 소지하지 않은 것을 양해 받았다. 심사관의 관용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지없이 국경에 묶이고 말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모티프원의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


#도미니카공화국#아이티#국경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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