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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파주 헤이리 마을을 다녀오는 길에 잠시 들렀던 출판도시. 콘크리트와 세련된 조형물이 조화를 이루는 건축물의 모던함과 '지혜의 숲'이 전해준 깊은 매력에 빠져 "머지않은 날에 여유를 갖고 다시 오리라" 다짐하며 돌아섰던 기억이 있다. 파주 출판도시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온갖 종류의 출판사가 각자의 철학을 담은 건축물로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는 곳, 바로 '책'이라는 매체가 지닌 오랜 깊이를 오감으로 경험하게 하는 사유의 공간이었다.
휴가의 마지막 날이나 다름없었던 지난 30일. 오전에는 그간 미루어 두었던 병원 치료와 집안 정리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오후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다. 쉬는 날의 시간은 왜 이리도 빠르게 흐르는지 마음이 급해졌다. 며칠 전부터 마음 속으로 찜해 두었던 파주행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서둘러 차 열쇠를 챙겨 들고 파주로 달렸다.
출발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걱정이 앞섰다.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각이었기에 불안해하는 나에게 운전을 하던 남편이 말했다.
"북카페에서 시원한 차 한 잔 마시고 오면 되지요. 다음에 시간 넉넉하게 다시 오면 되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헐렁해서 더 정겨웠던 공간, 하지만…
마침내 목적지 중 하나였던 '효형출판 북카페 눈'에 도착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공간은 아담했다. 서가가 책으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서가는 여유가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뜰의 풍경이 평화로웠다.

▲효형출판 북카페 눈. 파주 출판도시 산책의 첫 목적지였던 효형출판 '북카페 눈'의 정갈한 외관. 마감 시간이 다 되어 차 한 잔의 여유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 홍영미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삼복 더위의 열기를 식히며 출판사에서 펴낸 책 한 권 옆에 두고 따뜻한 차 한 잔 기울이는 호사를 꿈꿨건만, 마감 시간이 다 되어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다고 했다. 시원한 음료를 손에 쥐었지만 아쉬움이 밀려왔다. "좀 느긋하게 오자" 해놓고 또 이렇게 급하게 와버렸으니 말이다. 결국 차 한 잔의 여유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출판도시의 골목을 구석구석 걸으며 담소를 나누고, 아이스크림도 하나 입에 물고, 손에 든 커피까지 멋스럽게 어울리는 산책을 즐기고 싶었다.
비록 이번에도 '여유 있는 산책'은 실패로 끝났지만, 테라스에서 사진 한 컷을 남기며 마음을 달랬다. 다음에는 정말 하루를 통째로 비워 이 골목 저 골목, 이 건물 저 건물을 하나하나 뜯어보리라 다짐하면서.
마감 직전에 마주한 뜻밖의 온기 그리고 최고의 선물
테라스에서 아쉬움을 접던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이쿠, 이러다 책박물관도 문 닫는 거 아니야?'
부랴부랴 '열화당책박물관'으로 달려갔다. 예상대로 이곳 역시 마감 직전이었다. 몇몇 관람객이 박물관 구석구석을 둘러보거나 2층 뮤직 라운지에서 낮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안내해 주시는 분께 다가가니, 마감 시간이 다 되었다면서도 "멀리서 오셨을 텐데, 여기까지 오셨으니 잠시라도 안을 둘러보세요"라며 흔쾌히 안으로 들어서길 허락해 주셨다.

▲마감 직전 도착한 열화당책박물관. 모던한 콘크리트 구조물과 숲이 어우러진 열화당책박물관 입구. 마감 직전 늦은 발걸음에도 흔쾌히 안으로 들어서길 허락해 준 따스한 친절을 만났다. ⓒ 홍영미
아, 이 따스한 친절함이라니. 늦장 부린 아쉬움과 조급함으로 동동거리던 마음이 그제야 안정을 찾았다. 감사한 마음을 안고 박물관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동서양의 희귀 고서와 예술 서적들이 서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와 서책이 담아낸 장정의 미학 그리고 오래된 종이 냄새가 공간 전체를 기품 있게 채우고 있었다. 특히 제1전시실 안쪽에 전시되고 있는 소장 도서 수선 프로젝트가 눈에 띄었다. 엄마가 평소 즐겨 읽으시던 이야기책이 있는데 너무 낡아 수선해 드리고 싶어 집에 가져다 두고도, 어디서 수선해야 하는지 몰라 마음만 분주했던 터였다. 수선이 필요한 책이 있거나, 작업을 제안하고 싶다면 편하게 연락하라는 메시지를 보니 너무도 반가웠다. 오늘 여기서 받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오늘 마주한 최고의 선물. 소장 도서 수선 프로젝트 안내와 함께 정갈하게 전시된 책들. 낡은 책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 홍영미
파주출판도시에 자리한 열화당책박물관은 지난 시대 사람들의 영혼을 살찌운 동서양 고서부터 세계 각국의 정갈한 현대 예술 서적까지 4만여 권을 품고 있는 '도서관이자 책방 그리고 박물관'이었다. 2004년 '갤러리 로터스'로 출발해 2012년 현재의 모습으로 개관한 이곳은 1980년대 이후의 예술 도서가 상설 전시된 제1전시실(새책 공간)과 희귀 한적 및 근현대 고서가 채워진 제2전시실(옛책 공간)로 이루어져 있었다.

▲세월을 견뎌낸 고서의 아름다움. 정교한 금박과 화려한 장정이 돋보이는 희귀 양장 고서들.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 열하당책박물관
여기에 음악과 함께 서가를 내려다보는 음악 공간, 강릉 선교장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다실 '활래 포티코', 선조들을 기리는 작은 기도실 '기억의 공간'까지 어우러져 출판 문화의 발자취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특히 2층 서가에서 1층을 내려다보는 실내 풍경과 서가 사이 창 너머로 들어오는 바깥 풍경의 차경(借景)은 박물관의 격조를 한층 더해주었다. 뮤직 라운지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음악은 관람객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2층에서 내려다본 제1전시실 전경. 높다란 서가와 은은한 조명이 어우러진 제1전시실(새책 공간). 출판 문화의 깊이와 장정의 미학이 공간 전체에 흐른다. ⓒ 홍영미
정조와 괴테, 시공간을 넘어 책으로 만나다
입구에 들어서니 <정조와 괴테의 시대: 책으로 만나는 사람과 풍경>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1776년 즉위해 규장각을 중심으로 학문과 출판을 일으키며 백성의 삶과 당대 실학자들의 사유를 다듬었던 정조. 그리고 정조보다 3년 먼저 태어나 수많은 문학 작품은 물론 식물학·광물학 등 자연과학까지 탐구했던 독일의 대문호 괴테.
한반도와 유럽이라는 지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동시대를 살았던 두 인물, 사람과 자연, 생명의 가치를 열정적으로 탐구했던 두 선인의 기운이 서가 가득 넘쳐났다.
제1전시실에는 최근 연구되어 간행된 정조 시대 관련 현대 서적들이 '정조 시대의 책', '수원화성 축조 및 행사 기록', '조선 실학자들의 교류와 실학 연구서', '다산 정약용의 책들', '정조 시대 삶의 풍경들'이라는 다섯 주제로 나뉘어 전시되고 있었다. 전시 도록, 의궤 영인본, 번역된 백과사전류, 연구서, 인물 평전뿐 아니라 편지글과 소설, 시집,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화성성역의궤> 영인본과 다산 정약용의 저술, 조선 실학자들의 기록이 인상적이었다.

▲정조 시대의 기록과 서책들. ?'정조와 괴테의 시대' 전시가 열리고 있는 제1전시실 한편에 전시된 정조 시대 학문과 출판 기록 및 병풍, 의궤 영인본. ⓒ 홍영미
제2전시실에는 정조 치세에 간행된 고서 원본 여섯 종과 19세기 초 출간된 아름다운 문고본 <괴테 전집> 전 60권이 전시되고 있었다. 소설, 시, 희곡, 평론뿐 아니라 식물학, 광물학, 지질학, 기상학, 색채론, 광학 등 자연과학 저술도 포함된 아름다운 문고본들이었다.
정조와 괴테가 심었던 나무들이 거목이 되고 숲이 되었듯, 그들이 남긴 책들은 시간을 견뎌내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해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선인들의 강건하고 단정한 기운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다.

▲시공간을 넘어 만난 정조와 괴테. 조선의 정조 치세에 간행된 한적 고서 원본과 괴테의 아름다운 문고본 전집. 동시대를 살며 학문과 생명의 가치를 탐구했던 두 선인의 기운이 가득하다. ⓒ 열하당책박물관
박물관을 나오는 길, 오늘도 짧지만 알차게 채울 수 있어서 감사했다. 비록 계획했던 대로 느긋하게 차를 마시지도, 골목골목을 오래 거닐지도 못했지만, 마감 직전에 마주한 따스한 친절과 종이 냄새 가득한 고서의 온기 덕분에 돌아 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다음 파주행은 또 어떤 풍경을 선사할까. 그때는 정말 하루를 비워 두고, 책과 건축물이 건네는 다정한 언어들에 진득하게 귀를 기울여 볼 작정이다.
📌 방문 전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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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시간: 관람시간은 월 ~ 금, 매월 첫째 주 토요일 오후 1시 ~ 5시(단체 관람 사전 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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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슨트: 월·수·금 오후 2시 운영이 기본이나 사전 확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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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관일: 토요일(첫째 주 제외), 일요일, 공휴일, 대체공휴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 블로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