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은 (단순한) 방화치사 사건이 아닙니다. 수십 번의 신호가 있었는데도 구하지 못한 교제폭력 피해자의 이야기입니다."
A씨의 국선변호인이었던 이한선 법무법인 와이앤비 대표변호사가 남긴 말이다. A씨는 2024년 5월 11일 남자친구 B씨의 집에 불을 내 숨지게 했다. 그는 약 5년간 B씨에게 교제폭력을 당했고, 최소 31번 경찰에 신고해 피해 사실을 알렸다. 그는 항소심에서 현주건조물방화치사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아 현재 청주여자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A씨의 사례를 통해 교제폭력의 사각지대를 진단하기 위해, '31번 신고해도 막지 못하는 교제폭력,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가 열렸다. 지난 28일 여성의당과 전진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여성단체 활동가들과 전문가들은 "사법기관이 교제폭력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아 피해자였던 A씨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되레 가해자가 되는 비극에 내몰렸다"고 지적했다.
"국가가 '지켜줄 수 없다'는 감각 줬다"

▲지난 28일 여성의당과 전진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은 서울 영등포구 국회 의원회관에서 '31번 신고해도 막지 못하는 교제폭력,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 이진민
발제자로 참석한 이 변호사는 "A씨는 계속 신고했지만, 신고가 반복적으로 무력화되는 경험을 했다"며 "국가와 경찰이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인식 속에 더욱 고립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교제 기간 경찰에 접수된 신고 중 23건이 형사사건으로 접수됐으나, 상당수가 처벌불원이나 공소권 없음 등을 이유로 종결됐다.
이 변호사는 "장기간 교제폭력을 경험한 피해자는 무기력과 정서적 종속을 학습한다"며 "하지만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는 오히려 '왜 떠나지 않았냐', '가해자와 자발적으로 만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 것이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토론에 참여한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연구관도 반복된 신고가 피해자 보호로 이어지지 않은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31차례 신고는 피해자가 국가의 보호체계를 믿고 반복해서 도움을 요청했다는 증거"라며 "(그러나) 사건이 현장에서 종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아 계속 신고를 해도 보호받지 못할 경우 A씨와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허 조사관은 "현재 국회에 교제폭력 대응을 위한 법안이 16건 계류돼 있다"며 "교제폭력 관련 입법 공백 속에 피해자와 가족들이 위험에 놓여도 국가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A씨만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을 끝내는 것은 국가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A씨의 정당방위 여부, 다시 다툴 기회 필요해"

▲지난 28일 여성의당과 전진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은 서울 영등포구 국회 의원회관에서 '31번 신고해도 막지 못하는 교제폭력,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 이진민
A씨는 항소심 선고 직후 상고장을 제출했지만, 교도소 이감 과정에서 상고취하서를 이감 절차에 필요한 일반 서류로 오인해 서명했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A씨 사건이 대법원의 판단을 거치지 못한 채 확정된 점도 지적했다.
허 조사관은 "확정판결이 항상 실질적 정의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며 "이 사건은 정당방위 여부를 대법원이 실체적으로 검토할 기회조차 없이 확정됐다"고 짚었다. 이어 "국가가 보호하지 못한 시민을 다시 처벌하는 결과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의 회복 조치가 필요하다"며 "이제 국가는 피해자에게 기다리라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이에 피해자에 대한 특별사면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이예은 여성의당 정책위원회 의장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피해자가 자력 구제에 나선 끝에 피고인이 됐다면 단순한 처벌이 아닌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라며 "(A씨에 대한) 특별사면은 범죄에 대한 면죄부가 아니라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한) 국가 책임 인정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A씨를 지원하는 '군산 교제폭력 정당방위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다음 달 4일 A씨에 대한 특별사면을 촉구하는 연서명을 대통령실에 제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