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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을 제주에서 살다가 코로나가 한창이던 그 시절, 잠시 육지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제주로 돌아온 지금, 그동안 마음에만 담아두고 미처 찾아가지 못했던 노포들을 하나씩 다시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제주에 처음 정착할 무렵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곳들이니, 어느새 20년 가까운 세월을 버텨온 가게들입니다. 그 시절의 맛이 여전한지, 그 자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은 반가운 즐거움입니다. 이 여정이 제주 노포의 정보를 나누는 작은 다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소개할 곳은 지난 23일 방문한 용담동의 한 홍어 전문점입니다.
40여 년간 전라도 홍어만

▲홍어회홍어삼합의 홍어회 ⓒ 김태진
이 집이 지키는 원칙은 단 하나, 국산 전라도 홍어만 쓴다는 것입니다. 수입산이 넘쳐나는 요즘 같은 시대에 40년째 한자리에서 어머니를 이어 이 원칙을 지켜왔다는 사실이 새삼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유행을 좇지 않고 처음 마음을 지킨다는 것, 말은 쉬워도 실천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메뉴판영암식당 메뉴판 ⓒ 김태진
자리에 앉아 상을 받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집니다. 이만한 정성과 손맛이라면 값을 더 받아도 아깝지 않을 텐데, 가격표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소박합니다. 오래 장사해온 노포 특유의 뚝심이라고 해야 할까요. 손님의 지갑보다 맛과 재료를 먼저 생각하는 곳이라는 게, 한 입만 먹어봐도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수육과 가오리 무침

▲홍어삼합 한상차림홍어삼합 한상차리 ⓒ 김태진
먼저 상에 오른 건 두툼하게 삶아낸 돼지고기 수육입니다. 겉만 봐도 두툼하게 먹음직스럽게 보이며 속은 결대로 부드럽게 잘 익어 씹을 때마다 육즙이 배어 나옵니다. 홍어는 두께감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살짝 삭힌 향이 코끝을 스치는가 싶더니, 씹을수록 쫄깃하면서도 특유의 알싸함이 은은하게 번집니다.
여기에 묵은지 한 장을 곁들여 함께 싸 먹으면, 수육의 고소함과 홍어의 알싸함, 김치의 새콤함이 입안에서 하나로 어우러지는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삼합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조합입니다. 상에 함께 오른 구운 김에 싸 먹거나, 초장을 살짝 찍어 청양고추와 함께 먹으면 또 다른 얼굴의 삼합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오리무침가오리무침 ⓒ 김태진
이 집의 진가는 가오리무침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새콤달콤하면서도 칼칼한 양념이 가오리살 속속들이 배어 있고, 오이와 미나리 줄기가 아삭한 식감을 더해줍니다. 참기름과 깨가 듬뿍 올라간 빨간 양념 속에서 가오리살을 한 점 건져 올리면, 씹을수록 쫄깃한 식감과 함께 은은한 감칠맛이 살아납니다. 마트나 반찬가게에서 파는 가오리무침과는 맛도, 양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무리 흉내를 내봐도 이 가격으로 만들기 쉽지도 않고 깊은 손맛만큼은 따라잡기 어려울 듯합니다.

▲간판영암식당 간판 ⓒ 김태진
세월이 흐르며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이 집만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같은 마음으로 홍어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유명세보다 원칙을, 화려함보다 정직한 맛을 택해온 노포. 변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반가운 제주 맛집 한 곳을 오늘도 마음에 새기고 돌아섭니다. 나오면서 "가격 좀 올려도 되지 않을까요?"라고 말씀드리니 어머니께서 하시던 대로 음식의 양도 가격도 계속 고수하시겠다는 말씀이 잊히지 않습니다.
위치: 제주 용담동, 서문시장 입구 건너편 영암식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