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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랜스보더링랩(Trans-border-ing Lab)은 국경과 종(種)을 넘은 몸들이 통제와 구금, 박탈과 추방의 위험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주목하고, 난민과 비인간존재의 안전하지 않음이 '국민'과 '인간'인 '우리'의 '안전'을 위한 것으로 정당화되어 온 담론에 문제를 제기하며 실천적인 앎을 모색하는 것을 활동의 비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12화에 걸친 이번 연속 기고는 2025년에 기획한 '디딤돌 걸림돌 애매한 돌, 판례로 만나는 이주/난민 이슈'에서 논의된 결과물입니다. 난민/이주민이 겪는 상황들이 지금-여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함께 질문을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①
<폭행과 살해협박 피해서 왔는데... '그래도 난민은 안 된다'는 사회>에서 이어집니다.
난민의 정의는 미래지향적이다
대법원이 난민인정을 위해 요구하는 수준의 구체적인 박해는 '사실상' 박해를 받은 당사자가 국적국 바깥으로 피신하여 비호국을 찾아 난민신청을 할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 것에 가깝다. 이미 부상을 입었거나 구금되었거나 살해당했는데 도망쳐서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는 없다.
유엔난민기구가 지침이나 의견서 등을 통해 거듭 밝히듯, 난민의 정의는 '미래지향적'이다. 즉, "박해를 당한 과거의 경험이 난민 지위의 전제조건은 아니며, 박해에 대한 두려움이 충분한 근거 있는 것인지는 신청인이 출신국으로 돌아갔을 때 겪게 될 곤란에 대한 평가에 근거"한다(유엔난민기구, 국제적 보호에 관한 지침 제9호: 난민의 지위에 관한 1951년 협약 제1조 제 A 항 제2호 및 1967년 의정서의 맥락에서 성적지향 또는 성정체성에 기반한 난민 지위 신청, 문서 번호 HCR/GIP/12/09, 2012. 10. 23, 난민 지위의 인정 기준 및 절차 편람과 지침, 한국어판 2023, 195쪽).
난민 보호는 "본질상 예방적인 성격을 띠며, 따라서 신청인은 발각되어 박해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 이전에 난민 지위를 주장할 수 있"다(유엔난민기구, 대법원 2016두56080 사건에 대한 의견서 21항, 2018. 03. 05).
난민은 (더) 다치기 전에, (또) 갇히기 전에, (결국) 죽기 전에, 다치고 싶지 않다고, 갇히고 싶지 않다고, 죽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 내가 나로 살 수 있게 그렇게 살아 보게 도와달라고 우리 앞에 살아서 호소하는 존재다. 대법원의 기준은 국제난민규범의 예방적 보호 원칙과 전면 어긋나는 것이다.
한국의 재판부가 박해를 받을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를 입증할 책임을 난민에게만 부과한 것도 난민 보호 규범과 배치된다.
대한민국 난민법 제9조는 "법무부장관은 난민 신청자에게 유리한 자료도 적극적으로 수집하여 심사 자료로 활용하여야 한다"고 적시함으로써 입증 책임을 심사 주체가 나누어지도록 하며, 유엔난민기구 또한 다음과 같이 난민 신청자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원칙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증명 책임이 신청인에게 있다고 하여도 관련 사실을 확인하고 평가할 의무는 신청인과 심사관이 공유한다. 실제로 경우에 따라서는 심사관이 신청을 뒷받침하는 필요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독립적인 조사조차도 성공하지 못할 수 있으며, 진술에 따라서는 증명할 수 없는 성격인 것도 있다. 이 경우 신청인의 주장이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면 달리 볼만한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심사관은 신청인에게 유리한 추정(benefit of the doubt)을 해야 한다."
지난 연재 기사에서 언급했듯, A와 B의 1심 재판부는 대법원판결을 인용하며 신청인들이 진술한 바를 대부분 신청인에게 불리하게 읽어냈다. 2%가 채 되지 않는 난민 인정률, 피의자 심문하듯 진행하는 면접 심사, 난민법 발효 이후 발의되어 온 안들을 보면, 난민 신청자를 절대적인 '비호를 요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제도를 남용하여 체류를 도모하는 '잠재적 범죄자'로 바라보는 관점이 이 사회의 난민 제도를 관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A의 체류 기간 연장 불허 결정 통지서와 출국 기한 유예 허가 통지서2023년 8월 4일 서울출입국외국인청에서 받았다. ⓒ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
난민 지위를 인정할 만큼의 박해란 무엇인가
A와 B는 이처럼 난민 보호 규범에 어긋나는 부당하게 협소하고 엄격한 대법원 기준에도 부합할 박해 경험을 심지어 가지고 있었다. A는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폭행당한 흔적이 몸에 남아 있었고, B는 성별 정체성을 근거로 처벌받은 공식 기록까지 제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A의 경우 자기 서사 속 주요 사건의 정확한 발생 일시나 사건 순서 등에 대한 진술이 일관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그의 진술 신빙성 전체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고, B의 경우 진술을 뒷받침하는 공문서의 존재가 B의 난민 신청 사유를 입증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입증된 사정을 난민 지위를 인정할 만큼의 박해로 여기지 않았다.
재판부는 출신국을 벗어나 신청국에 도착해 난민 신청 절차를 개시할 정도면 난민 지위를 인정받을 만큼 박해 받지 않은 것임을 전제하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A와 B를 이곳에 도착하여 난민 신청을 할 수 있었으므로 '난민 지위를 인정받을 정도까지는 박해받지 않은 사람들'로 보았다.
성별 정체성을 근거로 한 박해를 이유로 난민 지위를 인정한 국내 최초의 판결
다행히 B의 항소심 재판부는 B가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체포되어 처벌받은 것이 확실하고, 그 근거가 된 법령이 출신국에서 여전히 시행 중인 탓에 트랜스젠더로서 곤란에 처했을 때 국가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사정을 가리켜 "원고의 성정체성으로 인한 부당한 사회적 제약 정도에 불과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고, 이를 넘어서 신체 또는 자유에 대한 위협, 인간의 본질적 존엄성에 대한 중대한 침해나 차별이 발생하는 경우로서, 난민협약에서 말하는 박해에 해당한다"고 보아, 1심 판결을 취소하고 B의 난민불인정결정취소 청구를 인용했다(B 사건: 서울고등법원 2022누31961).
위의 판결은 대법원의 문제적 기준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가늠하여 부합한다고 보아 내리게 된 결론이라는 점에서 한계적이나, 성별 정체성을 근거로 한 박해를 이유로 난민 지위를 인정한 국내 최초의 판결로서 기념비적이다
. 반면 A의 항소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의 사실인정과 판단이 모두 정당하다고 보아 A의 항소를 기각했다(서울고등법원 2022누31954).
A는 상고심까지 밀고 갔다. 1심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법률대리인도 없이 활동가 동행도 없이 난민 신청서를 작성하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구사 언어도 아닌 인접 언어 통역으로 면접 심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수십 년 생애 속 사건 사고의 세부 사항과 순서를 향후 번복의 여지 없이 진술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낯선 사회, 낯선 환경에서 낯선 사람을 상대로 자기 서사를 펴놓는 작업이 애초에 쉬울 리 없다. 진술하는 사람에게 완벽한 기억과 정연한 기술을 요구할 일이 아니라 진술을 듣는 사람이 융통성 있게 입체적으로 이해해야 할 일인 것이다.
B의 항소심에서와 같이 원고가 "기존 대법원의 요건을 모두 충족하였다는 판단하에 난민으로 인정된 우간다 양성애자 사건"(
김지림, "1%의 가능성을 붙잡고: 성소수자 난민재판," 디딤돌 걸림돌 애매한 돌 판결문 읽기) 판결은 문제적인 대법원 기준을 따랐다는 한계는 있으나, 난민신청자 진술 내용상의 세부 사항 불일치를 "난민 신청인의 궁박한 심리 상태"(서울고등법원2018누30022)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해하며 진술 전반에서 핵심적인 내용에 모순이 없다면 신빙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판례를 남겼다.
A 사건의 재판부도 A의 진술을 해석하는 데 이같은 접근법을 택했다면, A는 아마도 이곳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고 장기적인 계획도 세우고 우리와도 이태원을 걷고 커피를 마시고 아픈 몸 불평도 해가며 지내고 있을지 모른다.
결국 제3국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A
"한국이 좋다. 한국에 있고 싶다. 한국에서 계속 여러분과 같이 살고 싶다." 난민 심사와 난민위원회 조사와 행정소송의 전 단계를 다 거치고 난민 불인정이라는 최종 결과를 받아 든 A가 몇 번이고 우리에게 한 말이다.
자신을 거절한 정부와 법원이 좋다는 말이었을 리 없다. 동네와 정들었다는 이야기였다. 매일 걷는 산책로가 고맙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모르는 행인들에게 그저 중년 여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한 곳, 그리고 꽤 의지가 되는 친구들과 조력자들과 미더운 주치의들이 생긴 곳, 난민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낼 방법을 익혀가며 난민 신청 절차를 비롯한 난민 제도에 당사자로서 전문가가 다 된 곳 이곳 서울에서 떠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처음부터 모든 과정을 다시 시작할 엄두가 정말이지 안 난다는 이야기였다.
A는 난민인정 재신청을 하고 싶어 했다. 우리도 A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같이 살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A에게 본격적으로 재신청을 해보도록 차마 권할 수 없었다. 그간에도 난민 불인정 결정 취소 청구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는 실낱같은 이유에 기대어 체류 자격을 단기 갱신하며 겨우 버티고 있었다.
재신청을 하게 되면 "중대한 사정 변경 없는" 재신청으로 자동 간주되어 체류 기간 연장 불허 결정을 받고, 외국인등록증을 빼앗기고, 출국 기간 유예 허가를 통해서만 간신히 머무를 수 있게 될 터였다. "미등록(not registered) 체류이지만, 불법(illegal) 체류는 아닌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불안한 지위로 출국 기한을 2~3달마다 연장해 가면서 난민 심사가 진행되는 2~3년의 긴 시간을 대기"하게 된다는 말인데, 지난한 과정 끝에 난민 지위를 인정받으리라는 보장마저 전혀 없었다(김연주, "무엇이 '남용'인가: 난민법 개정안의 문제점."
2026년 세계난민의날 토론회 자료집, 2026. 06. 11).
트랜스젠더 여성이고, 노동시장 기준으로 상대적으로 고령이고, 체류 기간이 짧은 까닭에 형식적으로 취업이 가능한 상황에서도 일자리 찾기가 어려웠는데, 체류 기간 연장이 불허되면 취업이 불가능해진다는 점 또한 작지 않은 문제였다. 이같은 사정을 고려하여 A는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를 단념하고 제3국행을 결정했다.
최종 출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A는 서울 출입국으로부터 체류 기간 연장 불허와 출국 기간 유예 허가를 같은 날 받았다. 당일 동행한 나는 체류 기간 연장 불허 결정 통지서에 적힌 불허 사유를 보고 또 보았다.
"사정변경 없는 난민인정 신청 등 체류 기간 연장 제한 대상"이라는 문구를 부정하고 싶었다. 국적국 사정 변경은 없을 수 있다. 추가 제출할 증거도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제대로 통역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이제 더 확실히 알았다.
자기 삶의 서사를 더 설득력 있게 들려줄 방법도 터득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6년 가까이 생활하며 관계를 형성했다. 사람과 장소를 익히고 생활의 리듬을 만들었다. A의 시간은 난민인정을 받을지 여부가 불투명한 상태로 대기했어야 한다는 차원에서는 수년간 미처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관계의 시간만은 면면히 흘렀다. 사람도 장소도 가볍게 인사하고 쉽게 이별하기 어려울 만큼 소중해져 버렸다.
관계의 형성, 관계의 진도, 관계의 밀도를 중대한 사정 변경 차원에서 해석하면 난민 재신청의 필요와 의의에 다르게 접근할 수 있다. 박해받을 것이라는 공포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국적국의 보호를 받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난민이라면, 난민 본인이 국적국의 보호를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가 난민인정의 중요한 판단 기준이라면, 당사자가 비호 신청국의 보호를 절실히 원한다는 사실 역시 난민인정의 고려 요소가 되어야 맞다.
이곳의 친구들과 못 헤어지겠다는 심정과 자신을 끌어안아 준 동네에서 안 떠나고 싶다는 소망을 보다 귀하게 여겨야 맞다. 에밀리는 본 연재 기사 4화에서 입국할 권리와 관계에 대한 보장을 연결 지었다.
"사회 구성원과 관계를 맺어온 사람에게 분리/분단을 겪지 않"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에밀리의 주장을 나는 난민 지위 인정에도 적용하고 싶다(왕유쉔/에밀리,
"공항에 도착했지만 '도착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 오마이뉴스, 2026. 07. 02).
관계는 난민 지위 인정 여부를 결정하는 데 반드시 살펴야 할 사정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A가 우리와 맺은 관계는 A와 우리에게 중대한 일이었다.
A는 2023년 한국을 떠나 도착한 국가에서 2년 반의 기다림 끝에 최근 난민인정을 받았다. 우리의 안부 인사는 늘 똑같다.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