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미국의 역사를 온몸에 품고 있는 뉴욕. 누군가 살아냈고, 누군가 살아가는 빌딩 숲 사이사이의 이야기를 하나씩 담아 보려 합니다.
북중미 월드컵이 끝났다. 월드컵이 시작될 무렵, 미국에선 축구가 별로 인기가 없는데 얼마나 관심을 받을까 싶었다. 맥도날드에서 월드컵 세트가 출시되어 손흥민 선수 컵이나 얻자하는 마음으로 가보았다. 컵에는 유명 축구 스타가 그려져 있는데, 랜덤으로 주어진다.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의 컵을 뽑기 위해 여러 번 구매한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운 좋게, 손흥민 선수 컵을 바로 뽑을 수 있었다. 개막식을 앞두고 축구 클럽 몇 군데에서 이벤트가 열리긴 했지만 동네가 들썩인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뉴욕 맨해튼 인근 주택가에 살고 있다. 월드컵 초반, 흥이 나지 않았던 건 어쩌면 월드컵 직전의 뉴욕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NBA(미국프로농구)에서 뉴욕 닉스가 53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며 뉴욕이 축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월드컵이 이미 개막했지만(6월 11일) 퍼레이드(6월 18일)를 비롯한 축하이벤트가 많아서 월드컵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조금 밀려나 있었다.

 월드컵 프로모션으로 미국 맥도널드에서는 월드컵 세트를 판매했다. 세트 안에는 랜덤으로 각국의 유명 축구 선수 컵이 들어있다. 우리 가족은 운 좋게, 한 번만에 손흥민 선수의 컵을 얻었다
월드컵 프로모션으로 미국 맥도널드에서는 월드컵 세트를 판매했다. 세트 안에는 랜덤으로 각국의 유명 축구 선수 컵이 들어있다. 우리 가족은 운 좋게, 한 번만에 손흥민 선수의 컵을 얻었다 ⓒ 장소영

달아오른 월드컵 열기... "우리 아들이 달라졌다"

AD
조별리그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토너먼트가 시작되자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스포츠 펍(Pub) 뿐 아니라 일반 펍에도 응원하는 팀의 저지(Jersey)를 입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대형 TV로 월드컵 중계를 하는 음식점과 공원에 방학을 맞아 가족 단위로 나온 경우가 많았다. 응원을 위해 지정된 공원에는 크고 작은 팬서비스와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어 흥을 돋우었다.

뉴욕시는 5개 보로(Borough-뉴욕 행정구역)에 팬 존을 설치해 경기 시청은 물론 다양한 문화 행사를 열었고, 센트럴파크(Great Lawn)에서 결승전 중계와 팬 이벤트를 열었다.

지난 토요일(11일) 맨해튼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난 한 축구 팬은 센트럴파크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티켓 추첨에 응모했단다. 강렬한 초록 저지를 입은 팬은 '멕시코가 탈락해 아쉽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축제 분위기를 느끼겠냐, (결승에서 응원할 팀은) 비밀이다'하고 웃어 보였다.

몇 주 전, 우리 동네 편의점에 들렀을 때다. 마침 손님도 없고 한적하길래 직원에게 월드컵 이야기를 꺼냈다. 직원 A는 잠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시아계 중년 여성이 월드컵 축구 이야기를 꺼낼 줄은 생각지 못했던 거 같다. 그는 웃으면서 "당신도 복권 당첨금으로 경기장 티켓 사려고 하느냐? 어떤 복권을 줄까?" 하고 물어왔다. 그런 고객들이 몇 있었단다. 복권은 필요하지 않고 그냥 축구 이야기나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본국이 어딘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이집트가 결승까지 올라갔으면 좋겠단다. 어린 아들이 축구를 하고 있는데 미국에서의 축구는 온통 돈 드는 일이라고 한참을 투덜댔다. 공 하나 놓고 놀면 되지, 클럽에 가입해야 하고, 훈련에 참석하고, 특정 브랜드의 옷·신발·양말까지 똑같이 입혀야 한다고.

"그런데 말이야 그거 알아? 벤치에 혼자 앉아 있던 우리 아들이, 이집트팀의 경기를 보고 난 후에 같은 클럽 친구들과 말을 하기 시작하더라고."

또한 편의점 직원 A는 힘을 잔뜩 주어 말했다.

"클럽 아이들이 처음으로 살라(이집트 대표팀) 선수를 언급했다고!"

편의점 직원 A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미국에서 축구는 인기가 없다고 가볍게 지나쳤는데, 캐나다와 미국이 '이민자의 나라'라는 사실을 그만 잊고 있었다.

 월드컵 응원을 위해 Pub에 모인 사람들
월드컵 응원을 위해 Pub에 모인 사람들 ⓒ 장소영

ICE로 얼어붙었던 분위기에 각국의 응원가가 흐르다

야구나 농구, 아이스하키 등의 스포츠에 비해 축구는 확실히 미국에서 주목을 덜 받는 종목이다. 남자 축구보다 여자 축구의 인기가 훨씬 높기도 하다.

우리 아이들은 아이스하키 경기와 무관하게 자라왔다. 그런데 뉴욕의 하키팀 아일랜더스(New York Islanders) 경기가 있는 날은 결과를 무척 기다린다. 아일랜더스가 선취점을 넣거나 경기에서 이기면, 우리 동네의 '칙필레(Chick-fil-A:미국의 유명 치킨샌드위치 전문점)'에서 아이스크림이나 브라우니 같은 디저트를 무료로 나눠주기 때문이다.

푸드 체인점은 물론 기업과 가게들은 후원하는 스포츠팀에 다양한 프로모션을 걸고 이벤트와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런데 축구팀과 관련된 프로모션은 뭐가 있었는지 빨리 떠오르지 않았다. 동네 축구용품점에서 여는 이벤트 말고는.

 월드컵 시즌을 맞아 벽화를 새로 그린 동네 축구용품 전용 가게. 아쉽게도 손흥민 선수의 모습은 없었지만 가게 안에는 손 선수와 관련된 용품이 얼마간 배치되어 있었다.
월드컵 시즌을 맞아 벽화를 새로 그린 동네 축구용품 전용 가게. 아쉽게도 손흥민 선수의 모습은 없었지만 가게 안에는 손 선수와 관련된 용품이 얼마간 배치되어 있었다. ⓒ 장소영

그런데 편의점 직원 A와의 대화이후 월드컵이 다른 방향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딸아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일이다.신학기가 되어 자기소개 포스터를 만드는 숙제를 해갔다. 당시 피겨스케이트를 배우던 딸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연아 선수의 사진을 크게 프린트해 붙여갔다. 그런데 선생님이 '미셸 콴이 아니네? 처음 보는 이 선수는 누구지?'하고 묻더란다. 어렸던 아이는 제대로 설명을 못 하고 우물쭈물했는데, 다음 날 선생님이 "퀸유나((Queen Yuna)에 대해 찾아봤다. 일본이 아니라 한국 출신의 대단한 선수더라"라며 친구들 앞에서 치켜세워주더란다. 그 한마디가, 아이에게 큰 힘이 되었다.

아무리 다양성을 존중하는 다민족 사회라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주류 문화'와 '인기 종목'이 있다. 우리 가족이 사는 뉴욕에는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라크로스, 골프, 수영 등이 인기 종목이다.

그런데 월드컵이 열리면서, 아이들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여러 나라의 이름과 전에는 알지 못했던 축구 선수의 이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올림픽은 다른 나라와의 경쟁 속에 '얼마나 미국이 잘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월드컵은 축구라는 한 종목으로 겨루기에 팀과 선수들이 더 눈에 띄는 것 같았다. 아마 방학 기간이 아니었다면 월드컵의 영향은 훨씬 컸을 것이다. 특히 유럽계가 아닌 아이들 속에서 말이다.

내게도 변화가 있었다. 집 앞에 내건 국기와 그들이 입고 있는 저지를 보면서, 그동안 이웃들을 얼마나 뭉뚱그려 생각해 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남미면 비슷한 남미계, 아프리카면 비슷한 아프리카계려니 하고 말이다.

청년 몇몇이 같은 저지를 입고 그들만의 응원가를 부르며 거리를 나다니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결승전이 있던 일요일(19일) 아침 교회 가는 길에, 아르헨티나 저지를 입고 거리를 걷고 있던 분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 가족은 차 안에서, 그분은 거리에서 서로 엄지를 치켜들며 팔을 흔들며 응원을 나누었다.

몇 달 전만해도 ICE(이민세관단속국)의 거침없는 단속으로, 서로 눈이 마주칠까 조심히 지나치던 거리였다. 이민 단속 정보로 긴장이 돌았던 주민 게시판에도 축구를 주제로 한 게시물이 꾸준히 올라왔다. 오랜만에 사람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월드컵 경기를 함께 보며 응원하기 위해 팬들이 모이고 있는 맨해튼의 한 스포츠 펍(Pub)
월드컵 경기를 함께 보며 응원하기 위해 팬들이 모이고 있는 맨해튼의 한 스포츠 펍(Pub) ⓒ 장소영

국가를 대표하지만, 전쟁이 아니라 축제가 되길

"엄마, 일본을 응원해야지. 토너먼트에 올라간 유일한 아시아 국가인데, 아시아의 실력을 보여줘야 할 거 아니에요."

우리 아이뿐 아니다. 어른들의 세계에선 응원하기 껄끄러운 나라도 있지만, 어른들이 그어놓은 선을 개의치 않아 하는 MZ 세대 청년들을 자주 만난다.

지난 11일(토), 맨해튼 거리에서 아버지는 강렬한 초록색의 멕시코 저지를, 아들은 하늘색 줄무늬의 아르헨티나 저지를 입은 부자를 만났다. 등번호 10번, 축구선수 리오넬 메시의 팬이 틀림 없었다.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아들은 '멕시코와 아르헨티나가 필드에서 만나지 않아 다행이다'고 너스레를 떨었고 곁에 선 아버지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린 세대에 보여줘야 할 어른의 모습은 뭘까. 역사적 앙금이 있다고 상대팀 국기를 밟고 침을 뱉는 모습이어야 할까. 자국 축구 선수 11명에게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며 싸우라고, 부상을 입히더라도 이기기만 하라고 밀어붙여야 할까.

다민족 사회 미국에서는 학교에서부터 다양성을 존중하고 즐기는 데 익숙한 어린 세대들이 오래전부터 자라왔다. 젊은 세대는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데 싸울 준비를 시키는 건 어른들이 아닐까.

세계인이 지켜보는 월드컵 필드도 싸움터가 아니라 잔치판이었으면 좋겠다. 신나게 자웅을 겨루고, 새로운 나라와 문화를 알아가고, 역사적 앙금을 담아 미움을 키우는 팬덤 문화가 아닌 즐거운 놀이 같은 응원 문화가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8강에서 지고도 노젓기 응원을 이어갔던 노르웨이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모두에게 박수를 받았던 카보베르데처럼 말이다.

#북중미월드컵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연재

장소영의 숨쉬는 뉴욕

장소영 (u1i1) 내방

의미있는 한 줄을 담아내고 싶습니다.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