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 간송미술관절제된 직선미의 건축과 푸른 산세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미술관에 들어서기 전부터 건축과 자연이 빚어낸 또 하나의 작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 문운주
간송 전형필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에 놓인 문화재를 막대한 사재를 들여 수집했다. 그에게 문화재는 값비싼 골동품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이자 나라의 혼이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당시 거액인 1만 원에 구입한 일화는 그의 신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간송이 지켜낸 것은 해례본 한 점만이 아니다. 고려청자의 걸작과 신윤복·김홍도·정선·김정희의 작품을 비롯해 약 5000점의 문화유산이 그의 손을 거쳐 오늘에 전해졌다. 국보와 보물만도 100건이 넘는다. 간송이 지켜낸 문화유산은 이제 서울을 넘어 대구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한여름 폭염 속, 그 문화유산을 만나기 위해 대구간송미술관을 찾았다.
15일, 대구의 기온은 37도를 기록했다. 밖으로 한 걸음만 내디뎌도 뜨거운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도로 위에서는 열기가 일렁이고, 가로수 잎마저 힘없이 늘어진 채 바람을 기다리는 듯하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는 것은 나만의 피서법 가운데 하나다.

▲대구간송미술관의 수공간. 잔잔한 연못과 현대식 정자, 소나무가 어우러져 작품 감상의 여운을 쉬어갈 수 있는 휴식 공간을 만든다. ⓒ 문운주

▲115년 생 모과나무대구간송미술관 개관을 기념해 식재한 115년생 모과나무. 오랜 세월을 견뎌온 나무는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낸 간송 전형필의 정신을 상징하듯 관람객을 맞이한다 ⓒ 문운주
셔틀버스에서 내리자 대구간송미술관이 시야에 들어온다. 낮고 길게 자리한 미술관은 반듯한 직선과 묵직한 회색 벽면으로 단정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주변의 잔디와 나무가 공간을 포근하게 감싸고, 앞으로는 팔공산 능선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수묵으로 만난 여름

▲옥류동외금강 옥류동의 절경을 담은 산수화다. 각진 암벽 사이로 쏟아지는 옥류폭포와 푸른 옥류담을 담백한 담채로 그려내, 그림 앞에 서면 한여름 계곡의 맑고 서늘한 기운이 전해진다 ⓒ 문운주

▲김홍도의 <기려원유>버드나무 아래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나는 선비의 모습이 한 폭의 여행처럼 펼쳐진다. 작은 부채 위에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조선 선비의 여유와 풍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 문운주
첫 번째 회화 전시의 주제는 '여름 풍경'이다. 폭염 속에서 들어선 미술관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이 계곡과 산을 그린 그림이라는 점이 반가웠다. 이인상의 <옥류동> 앞에 서자 암벽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눈앞에 펼쳐졌다. 금방이라도 물소리가 들려올 듯했다.
<은선대> 역시 깊은 산속에 들어온 느낌을 준다. 이인상은 조선 후기 문인화가답게 화려한 기교보다 자연의 고요함을 담아냈다. 이어 만난 장승업의 <미산이곡>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같은 산수화인데도 먹빛이 한층 짙고 힘이 느껴졌다. 화가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표현된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로웠다.
두 번째 전시실에서는 강과 물가의 풍경이 이어졌다. 이경윤의 <강호어락>에서는 강가에 앉아 낚시를 즐기는 여유가 전해졌다. 윤두서의 <수탐포어>에서는 물속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그림을 잘 몰라도 물가의 시원함만큼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만난 부채그림은 또 다른 즐거움을 안겨준다. 김홍도의 <기려원유>에서는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나는 선비의 모습이 정겹다. 작은 부채 안에 먼 길과 넓은 산수가 모두 담겨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이경승의 <호접탐화>에서는 꽃을 찾아 날아드는 나비가 한여름의 생동감을 전한다.
그림에 담긴 깊은 의미를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화가들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여름을 담아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뜨거운 바깥세상과 달리 그림 속에는 계곡이 흐르고, 강바람이 불고, 나비가 꽃 사이를 날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시원한 여름 피서였다.
천년의 비색과 마주하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맑은 비색 위로 학과 구름이 은은하게 펼쳐진다.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고려청자 특유의 품격과 깊이가 느껴지는 걸작이다 ⓒ 문운주

▲청자양각연당초문매병맑고 은은한 비색 위에 연꽃과 덩굴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긴 고려청자다. 풍만한 어깨에서 잘록한 허리로 이어지는 곡선과 섬세한 양각무늬가 어우러져 단아한 품격을 보여준다. ⓒ 문운주

▲청자상감포도동자문표형주자표주박을 닮은 독특한 형태에 포도넝쿨과 동자들을 섬세하게 새겨 넣었다. 실용성과 예술성이 조화를 이룬 고려청자의 품격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 문운주
회화 1, 2, 3 전시벽을 따라 여름 산수와 풍류를 감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전시장 중앙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고려청자들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은은한 비색은 그림 못지않은 존재감을 품고 있다. 천 년 전 고려 도공들이 빚어낸 빛깔은 지금도 조금도 바래지 않은 듯하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작품은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다. 풍만한 어깨에서 잘록한 허리로 이어지는 유려한 곡선은 한참을 바라보게 만든다. 비취빛 유약 위를 유유히 나는 학과 구름은 정교하면서도 자연스럽다.
그 옆의 <청자양각연당초문매병>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연꽃과 덩굴무늬가 은은하게 떠오르듯 표현돼 있다. 화려하지 않은데도 오래 바라보게 되는 것이 고려청자만의 매력인 듯하다.
이어 <청자상감포도동자문표형주자> 앞에 선다. 포도넝쿨 사이를 뛰노는 동자들의 모습이 정겹다.
한국의 모나리자 미인도

▲미인도혜원 신윤복이 그린 조선 후기 여인의 초상으로, 복식과 머리 모양, 장신구까지 당시의 생활문화와 미의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회화 작품이다. ⓒ 문운주

▲설죽도조선의 3대 묵죽화가로 꼽히는 유덕장의 작품.. ⓒ 문운주
"한국의 모나리자예요."
일행의 한마디에 자연스레 <미인도>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설명을 듣지 않았더라도 왜 이 그림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지 금세 알 것 같다. 화려한 장식 하나 없이 조용히 서 있는 여인은 단아하면서도 품격 있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고운 한복의 선과 차분한 표정, 절제된 몸짓에서는 조선 후기 사람들이 추구했던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왔다. 화려함으로 시선을 끄는 것이 아니라, 오래 바라볼수록 더욱 깊은 매력을 느끼게 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아름다운 초상화에 머물지 않는다. 당시 여성의 복식과 머리 모양, 장신구와 미의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 자료이기도 하다. 역사학자의 눈으로 보면 한 폭의 그림이 아니라 조선 사회를 기록한 사료인 셈이다.
<설죽도>는 이정, 신위와 함께 조선의 3대 묵죽화가로 꼽히는 유덕장의 작품이다. 여름에 그린 눈 덮인 대나무는 보는 이의 더위를 식혀주려는 마음을 담은 듯하다. 폭염 속 미술관에서 만난 가장 시원한 풍경이다.
미술관을 나서자 뜨거운 햇볕이 다시 온몸을 감싼다. 여전히 기온은 37도다. 하지만 마음만은 한결 시원하다. 간송 전형필이 지켜낸 문화유산은 천 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림 한 폭, 청자 한 점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이어주는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