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권순형 작가의 기록들 백운석유를 만들기 위해 실험하고 기록한 기록물들
권순형 작가의 기록들백운석유를 만들기 위해 실험하고 기록한 기록물들 ⓒ 은주연

지난 11일, 마치 과학자의 실험실을 엿본 기분이었다. '색유'를 개발하기 위해 작가가 남긴 수많은 실험 기록과 연구의 흔적은 실로 놀라웠다.

"백운석유를 구성하는 원료의 비율을 조정하는 실험이나, 금속 산화물을 얼마나 첨가해 어떤 색을 만들어낼지 (중략) 가마에서 소성했을 때, 소성온도나 시간, 냉각 속도 같은 요소들에 의해 유약의 결과물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해 두셨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 제자 정연택(명지전문대학교 공예디자인과 교수)의 인터뷰 중

서울공예박물관 전시 1동에서는 오는 8월 2일까지 한국현대도예의 선구자인 권순형(1929 ~2017)의 기증특별전 '색유만개'가 열리고 있다. 권순형은 전통 도자의 형식을 넘어 '색유(색이 있는 유약)'를 도입해 도자에 회화적 요소를 결합한 한국 도예의 1세대 작가이다.

권순형 작가의 가족은 2024년과 2025년 두 차례에 걸쳐 작품과 자료 1301건과 7703점을 서울공예박물관에 기증했고, 이번 전시에서는 그중 대표 작품 130여 점과 아카이브 50건을 선보인다. 전통적인 도자에서 유약은 보통 도자기의 광택을 위한 마감재로 쓰였는데, 권순형은 이 유약을 물감처럼 사용했다. 도자기에 색을 입히기 위해서는 보통 안료(가루)를 쓰는데 권순형은 색을 내기 위한 방법으로 유약에 금속산화물을 섞은 색유를 만든 것이다.

AD
1960년대 후반, 권순형이 개발한 '백운석유'는 백운석을 주원료로 만든 백색 유약으로, 여기에 철, 동, 망간, 코발트 등의 금속산화물을 더하면 녹색과 청색, 갈색 등 다양한 색을 표현할 수 있는 '백운석 색유'가 완성된다.

그의 연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소성온도와 시간을 세밀하게 조절하는 것은 물론, 색유를 기물 위에 그리고 뿌리고 여러 겹 덧바르거나 번지게 하고 흐르게 하는 등의 다양한 효과를 탐구했다. 30여 년 동안 연구와 실패를 반복한 끝에 그의 색유는 1990년대에 이르러 원숙한 경지에 도달했고, 그의 도자는 더욱 풍부하고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졌다.

신비로운 색감에 한없이 빠져들다

권순형 작가의 '백운유대호' 백자표면에 바른 색유가 흐르면서 만든 무늬가 묘하다
권순형 작가의 '백운유대호'백자표면에 바른 색유가 흐르면서 만든 무늬가 묘하다 ⓒ 은주연

권순형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연의 미학으로 피어난 추상 무늬와 깊은 색감에 한없이 빠져드는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도자기가 가진 가장 특별한 매력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작가 자신조차 완성작을 예측할 수 없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작가 권순형은 이를 '불의 심판'이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불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형상을 얻을 수도, 실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나. 그가 불을 다루는 순간의 심정을 낮아짐과 겸손이라고 했던 말, 불을 다룰 때마다 마음을 비우게 된다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권순형은 도예를 한다는 것이 고독과 기다림을 견디는 미학이라고 표현했는지도 모르겠다.

1 전시실에 4대의 모니터로 돌아가는 권순형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자니 도자기를 가마에 넣고 기다리는 과정이 한편의 인생처럼 느껴졌다.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마음, 그 자세가 결국 인생을 대하는 현명한 태도와 다르지 않아서 그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마음이 그렇게나 고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전시가 좋았던 것은 색유가 만개한 도자기들이 뿜어내는 영롱한 아름다움에 있었다. 더위를 잊을 만큼 아름다우니 꼭 한번 다녀오시길 추천한다. 더위와 폭우에 지치는 날이었지만, 아이들 방학을 앞둔 엄마인 나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가 아쉬워 가볍게 들를 수 있는 전시를 하나 더 보기로 했다.

거대한 달 항아리

이날 전시 투어의 주제가 '도자기'인 만큼 한남동 페이스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도예가 박영숙의 개인전 '형태가 행위를 만날 때'로 발걸음을 옮겼다. 박영숙 작가는 조선 시대의 달항아리 전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어오고 있는 작가로, 특히 단색화의 거장인 이우환 화백과 협업한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박영숙 개인전 '형태가 행위를 만날 때' 박영숙과 이우환의 협업이 인상적이다.
박영숙 개인전 '형태가 행위를 만날 때'박영숙과 이우환의 협업이 인상적이다. ⓒ 은주연

40여 년 전,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도 인상적이었다. 취미로 문화센터에서 백자를 배우던 평범한 주부였던 그녀는 자신이 빚은 도자기를 남편의 인사동 가게에 전시해 두었는데 마침 그 도자기가 젊은 도예가를 찾던 이우환 화백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이 화백은 박 작가에게 스승이자 멘토가 되어주었다고 했다.

박영숙 작가의 달항아리는 60~70cm 정도의 높이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달항아리는 한번에 길게 성형할 수 없어 위아래를 따로 만들어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제작되는데, 이 정도 크기의 달항아리가 1300도가 넘는 고열에서 무너지지 않고 완성되었다는 것은 흙과 불을 다루는 박영숙 작가의 뛰어난 기술을 말해준다.

도예가에게 불은 어떤 의미일까. 권순형의 색유도, 박영숙의 달항아리도 결국은 불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것 같다. 서로 다른 작업을 해온 두 사람이지만, 불 앞에 선 도예가가 평생 익힌 것은 어쩌면 겸손해지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박영숙개인전 <서울 페이스 갤러리> 박영숙의 달항아리
박영숙개인전 <서울 페이스 갤러리>박영숙의 달항아리 ⓒ 은주연

순백의 거대한 달항아리가 뿜어내는 존재감 위로 이우환 화백의 푸른 붓질이 더해지니 전시 공간 전체가 압도적인 청량감으로 채워졌다. 흰 백자의 기품과 푸른 선의 고요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조화를 느껴보고 싶으시다면 꼭 한번 방문해 보시길 추천한다. 이 전시는 오는 8월 14일까지 열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권순형기증특별전#박영숙개인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책읽고 글쓰는 일을 좋아합니다. 따뜻한 사회가 되는 일에 관심이 많고 따뜻한 소통을 좋아합니다.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