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화창한 햇살을 벗 삼아 함양 화림동 계곡, 제1구간 거연정에서 농월정까지 6km 트레킹을 했다. 언제 가도 반기는 오감 만족 힐링의 명승지.
이른 아침 출발이라 찰밥 도시락을 준비한 모양이다. 대전통영 고속도로 진입 첫 휴게소에서 옹기종기 모여 식사하니, 벌써 힐링 여행이다. 겉절이 맛이 일품. 일행 중 어느 분이 손수 무쳤다고 한다. 모처럼 까마득히 잊혔던 어머니 손맛이다. 출발부터 입으로부터 행복 힐링이다. 학창 시절 소풍 간 기분. 행복이 밥 먹여주지 않지만, 행복 힐링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새삼 느낀다.
배도 든든하게 채웠겠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목적지 함양으로 달린다. 창밖엔 아침 햇살이 쉼 없이 창문을 두드린다. 창문에 드리운 커튼도 틈으로 살포시 내민 햇살까지 막지는 못했다. 만만치 않은 여행이 될 것 같다. 햇살을 가릴 우산과 생수도 챙겼으니 걱정 없다. 화림동 계곡 선비문화탐방로에 대한 설렘이 앞선다.
한참을 달리는가 싶더니 계곡물이 보이고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이란다. 일행은 본격적인 선비문화탐방로 트레킹을 하기 전, 탐방로 길목 거연정에 들렀다. 조선 선비들이 함양 안의삼동(安義三洞) 중 거연정 주변을 으뜸으로 친 이유를 알겠다. 경치를 증명이라도 하듯, 거연정 처마에 걸린 연재 송병선(1836~1906) 선생 현판 시가 눈에 띈다.
노거유여흥(老去猶餘興)
가진첩유행(佳辰輒有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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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오히려 흥에 겨워서
아름다운 이곳에 문득 오게 되었네
거연정 주변은 태고의 정(情)을 모은 곳이란다. 마치 중국 쓰촨성을 풍요로운 땅,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했듯, 거연정 주변은 하늘이 내린 경치를 보는 듯하다. 거연정은 이름답게 조선 선비들이 자연에 빠져 노닐 만하다. 일행도 거연정 주변 풍경에 취해 떠날 줄 모른다.
건너편엔 일두 정여창(1450~1504) 선생을 기르기 위해 지은 군자정(君子亭)이 있다. 퇴계 이황도 정여창 선생을 흠모했던 대학자로 알려진다. 아쉽게도 군자정은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화림동 계곡 길로 들어선다.
일행은 에움길로 걸었다. 곳곳이 청산이다. 북송 시대 소동파 시인의 인생도처유청산(人生到處有靑山)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이다. 해가 중천에 이르자 예상대로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등줄기에서 땀이 배어온다. 다행스럽게도 계곡을 따라 우거진 숲을 따라 걷다 보니, 신선한 바람이 가끔 불어온다. 들풀들도 나부낀다. 숲의 미학이다.
산 매화 꽃송이도 마주친다. 산딸기도 뒤질세라 붉게 익어간다. 맑은 계곡물을 먹고 자란 산딸기라 그런지 더욱 신선해 보인다. 트레킹을 더할수록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연거푸 내린 장맛비로 너럭바위 위로 흐르는 계곡 물살이 거세다. 삼삼오오 걷는 사람들의 속삭임도 계곡물 소리에 묻힐 정도이다.
람천정을 지나자 푸릇푸릇한 갈대들이 더위에 지친 일행을 바라보며 쉬어가라 너스레를 떤다. 숲길을 벗어나자 온몸에 더위가 밀려온다. 우산을 받치고 걷는 사람들이야 그나마 다행이지만, 모자만으로 작렬하는 태양을 피하긴 쉽지 않았다. 그늘진 계곡 너럭바위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누군가 내놓은 복분자 음료를 한 모금 마셨더니, 더위가 휙 가신다.
농월정 주변에 이르러 시장기를 때우고,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어디를 가나 생각한 것이지만, 그곳엔 고수가 있기 마련이다. 그날도 80 중반이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예상치 않은 농월정 설명과 함께 지족당 박명부 선생이 가르쳤던 서당까지 안내한다. 종담서당(鐘潭書堂)이다. 아쉽게도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담장 너머로 기둥에 걸린 주련을 보라 한다. 지족당 박명부의 시가 기둥에 걸려 있다.
로방수식별구유(路傍誰識別區幽)
산약반회수약유(山若盤回水若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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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옆 별천지 그윽한 곳을 누가 알리요
산이 빙 둘러있고, 물 머무는 듯하네.
그 할아버지는 화림동 계곡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농월정의 뒷이야기까지 쭉 끼고 있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라 했던가. 그 지역의 상수이신 할아버지가 들러 준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 할아버지는 왜 필자에게 농월정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 했을까.

▲화림동 계곡 너럭바위 위로 흐르는 계곡물로 탁족을 하는 모습. ⓒ 김병모
일행은 종담서당 옆 농월정 다리를 지나 농월정으로 향했다. 농월정 옆에 배롱나무 두 그루가 주인을 잃은 채 정자를 지키고 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너럭바위에 새긴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屨之所)이다. 지족당 박명부 선생이 종담서당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 심신이 지칠 때, 지팡이와 신발을 벗어 놓고 제자들과 함께 계곡물에 발을 씻었다는 탁족의 흔적이다.
일행 중 일부도 지족당 선생의 흉내라도 내듯, 신발을 벗고 너럭바위에 줄지어 앉아 탁족을 즐기고 있다. 필자 역시 그들 틈에 끼어 세상의 가시에 찔러 부어오른 마음과 시름을 달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