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침에 일어나면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적어 본다. 이른 아침엔 건강을 위해 만보 걷기를 하고 오전엔 무언가를 배우고, 오후엔 어디를 가야 한다. 이렇게 퇴직 후에도 늘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엔 허무감이 밀려온다. '이렇게 열심히 하다 보면 뭔가가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정신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다 문득 마음 한구석이 삭막해짐을 느끼곤 한다.
우리는 꼭 무언가가 되어야 하는가? 성취와 결과만을 강조하는 직선의 삶 속에서 지치고 숨이 차오를 때 만나게 된 손택수 시인의 시들은 나에게 가만히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손택수 시집나의 첫 소년, 나무의 수사학 ⓒ 최옥화
손택수 시인의 시집 <나의 첫 소년>(2017, 창비)은 청소년 시선집이다. 시인은 "청소년 시기야말로 인생에서 평생 풀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제발 이때부터 벌써 돈벌이나 성공에 관한 질문에만 빠져 있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는 "인간이 왜 인간인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기를 바란다"며 "내 안의 소년을 잊지 않고 내 안의 소년에게 끝없이 귀환하려 한다"라고 시인의 말을 빌어 밝혔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 쓰인 시들은 쉽게 읽힌다. 그렇다고 이 시들이 청소년만을 위한 시는 아니다. 늘 바쁘게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는 어른,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앞만 보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따스한 위로의 시이다.
그리고 <나무의 수사학>(2010, 실천문학)에 담긴 시들 또한 가만히 따라 읽다 보면, 일상적인 사물과 풍경 속에서 시인이 길어 올린 웅숭깊은 시선이 지친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두 시집의 시들 중 존재의 본질과 지혜를 일깨워주는 다섯 편의 시를 통해 삶의 태도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1. 미래라는 강박을 내려놓고 마주하는 현재 : 〈나무의 꿈〉과 〈장래 소망-지금의 노래 2〉
시집 <나의 첫 소년>에 수록된 시들은 자연의 섭리를 통해 인간의 삶을 비추어 내는 시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나무의 꿈〉은 끊임없이 '미래의 쓸모'를 증명하라고 다그치는 사회를 향해 나지막한 브레이크를 건다.
나무의 꿈
자라면 뭐가 되고 싶니
의자가 되고 싶니
누군가의 책상이 되고 싶니
밟으면 삐걱 소리가 나는
계단도 있겠지
그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다락방
별빛이 들고 나는 창문틀도 있구나
누군가 그 창문을 통해 바다를
생각할지도 몰라
수평선을 넘어가는 목선을 그리워할지도 몰라
바다를 보는 게 꿈이라면
배가 되고 싶겠구나
어쩌면 그 무엇도 되지 못하고
아궁이 속 장작으로 눈을 감을지도 모르지
잊지 마렴 한 줌 재가 되었지만
넌 그때도 하늘을 날고 있는 거야
누군가의 몸을 데워 주고 난 뒤
춤을 추듯 피어오르는 거야
하지만, 지금은
다만 내 잎사귀를 스치고 가는
저 바람 소리를 들어 보렴
너는 지금 바람을 만나고 있구나
바람의 춤을 따라 흔들리고 있구나
지금이 바로 너로구나
나무는 자라서 누군가의 의자나 책상이 되고,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나 바다를 건너는 배가 되는 꿈을 꾼다. 어쩌면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채 아궁이 속 장작으로 태워져 한 줌 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말한다. "잊지 마렴 한 줌 재가 되었지만 / 넌 그때도 하늘을 날고 있는 거야"라고. 어떤 결과에 이르든 존재 자체로 고귀함을 일깨운 시선은 곧이어 강력한 현재형으로 수렴된다. "하지만, 지금은 / 다만 내 잎사귀를 스치고 가는 / 저 바람 소리를 들어 보렴 (중략…) 지금이 바로 너로구나"라는 구절은 미래를 저당 잡힌 채 오늘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의 호흡에 집중하라는 다정한 권유로 다가온다. 장래의 거창한 소망이나 결과물에만 매몰되지 않고, 지금 내 잎사귀를 스치고 가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바람에 기꺼이 흔들리는 상태, 그것이 바로 온전한 '나'를 만나는 길임을 시인은 나직하게 노래한다. 흔들림조차 살아있음의 증거이자 현재의 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미래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러한 사유는 〈장래 소망-지금의 노래 2〉의 '나무는 뭔가 되려고 하질 않아/ 아무렇게나 자라도 나무는 나무니까' 구절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 무엇이 되지 않아서 슬퍼할 이유도 없어/ 나무처럼, 새처럼, 바람처럼/ 또 흐르는 강물처럼/ 네가 너 자신일 수 있다면"이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조급한 마음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 자신으로 존재해도 괜찮을 것 같은 위로를 받는다. 더이상 청소년들에게 '꿈'을 강요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어른들에게도 더 높은 자리로 오르지 않아도 된다고 시인은 말해 주는 것 같다. 매일 더 나은 성과를 이루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던 내게도 괜찮다고 어깨를 다독이는 듯이 느껴지는 시여서 한참 마음이 머물렀다.
2. 우리 안의 지지 않는 푸른 마음 : 〈연두의 나이〉
시집 <나의 첫 소년>이 가진 또 다른 매력은 서정적인 기억과 내면의 순수함을 복원하는 데 있다. 〈연두의 나이〉는 봄 한 철 반짝 피었다 사라지는 색이라고 생각했던 '연두'를 사계절 내내, 심지어 모진 한겨울 눈 속에서도 '가시가 될지 잎이 될지' 궁리하며 살아 숨 쉬는 꿈으로 재정의한다. 시인의 시선은 굳은살 박인 어른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간다.
나이가 들고 주름이 깊어져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엄마를 찾고 싶어 하는 아이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뒤란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던 외톨이 소녀가 살고 있다. 시인은 나이라는 숫자에 갇히지 말고 어른들 속에 숨어 있는 그 철들지 않은 연두를, 저답게 존재하는 순수함을 놓치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연두끼리는 격의 없이 / 백 살도 한 살도 / 눈을 맞추며 / 서로를 돌봐 주지"라는 대목처럼, 서로의 연약함과 순수함을 알아채고 돌보는 관계야말로 메마른 세상에서 우리가 푸르름을 잃지 않는 비결일 것이다.
"봄이 가도 / 봄이지"라는 마지막 선언은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따뜻한 불씨 하나를 지펴준다. 짙푸른 여름에도 연두가 들어 있듯이 현실적이고 굳어 있는 내 안에도 여전히 나다운 순수함이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나다운 순수함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상대방도 나의 여린 마음을 알아채고 상처를 주지 않는 관계가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3. 속도를 줄이고 상처를 품는 곡선의 미학 : 〈초승달 기차〉
시집 <나무의 수사학>에 실린 〈초승달 기차〉는 효율을 위해 무작정 직선으로만 내달리던 삶의 방식을 돌아보게 하는 짧지만 강렬한 울림을 주는 시이다.
초승달 기차
기차가 휘어진다
직선으로, 무작정 내달려온 땅을
가만히 안아보는 기차
상처투성이 산허리를
초승달이 품는다
달 속에서 기적이 울린다
목표를 향해 돌진하던 기차가 곡선으로 휜다. 그 휘어짐은 단순히 방향의 전환이 아니라, 직선으로 내달려온 거친 땅을 가만히 안아보는 행위이자 상처투성이 산허리를 보듬는 초승달의 품으로 치환된다. 앞만 보고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주변의 상처와 풍경들이 속도를 줄이고 휘어지는 순간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달 속에서 울리는 기적 소리는 스스로를 소진하며 질주하는 현대인들에게 잠시 속도를 늦추고 주변과 스스로를 안아주라는 치유의 신호처럼 들려온다.
또한, 이 '초승달 기차'는 표현에 있어서도 달을 지칭하는 것과 동시에 산허리를 감싸안은 기차를 가리키는 탁월한 중의적인 표현이다. 기차가 산허리를 휘감고 달릴 때의 풍경을 상상해 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초승달 모양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초승달 기차라는 표현에서 시인의 기발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4.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헌신의 무게 : 〈감자꽃을 따다〉
<나무의 수사학>중 또 한 편의 감탄을 금치 못한 시 〈감자꽃을 따다〉는 일상의 풍경에서 가장 밀도 높은 삶의 지혜와 헌신의 가치를 이끌어낸다. 주말농장에서 예쁘게 피어난 감자꽃을 뚝뚝 끊어내는 형의 모습을 보며 의아해하는 화자에게 형은 말한다. 사람이나 감자나 너무 오래 꽃을 피우면 / 알이 튼실하지 않은 법이여"라고.
꽃을 피우고 뽐내는 일에 정신을 빼앗기면 땅속의 알갱이가 굵어지지 않는다는 이 소박한 농부의 진리는 곧 가족을 향한 묵묵한 사랑과 헌신의 역사로 확장된다. 화려한 꽃시절에 일찍 어미가 되어 자신의 꽃을 꺾어야 했던 어머니, 조카가 생기자 화장품값과 옷값을 말없이 줄여간 누이, 그리고 딸을 위해 좋아하는 술과 담배를 끊어내며 묵묵히 일터를 지키는 형의 모습은 모두 땅속의 결실을 위해 지상에 피어난 꽃을 기꺼이 분지르는 숭고한 행위이다.
눈 질끈 감고 아까운 꽃을 꺾어낸 자리에 토실토실하게 익어갈 알감자를 기다리는 이들의 뒷모습은 눈물겹도록 따스하고 묵직한 감동을 남긴다.
손택수 시인의 시들을 읽는 시간은 내 마음의 온도를 가만히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나의 유용한 미래를 증명하기 위해 오늘의 바람 소리를 놓치고 있지는 않았는지, 내 안의 연두를 외면한 채 너무 현실적인 어른의 표정만 짓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때로는 직선의 질주를 멈추고 굽어 돌며, 소중한 결실을 위해 기꺼이 내 안의 욕망을 끊어내기도 하는 삶. 이 다섯 편의 시가 건네는 정갈한 위로가 포근한 여운이 되어 마음 구석구석을 채워준다. 지친 하루 끝에 따뜻한 마음의 틈을 만들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손택수 시인의 이 아름다운 시들을 권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