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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돌 그룹 리센느의 멤버 원이가 유튜브 '안녕하세요원이입니다잘부탁드립니다'에서 말하는 장면
아이돌 그룹 리센느의 멤버 원이가 유튜브 '안녕하세요원이입니다잘부탁드립니다'에서 말하는 장면 ⓒ 유튜브 캡쳐

말은 사전 속에만 있지 않다. 말은 사용되는 자리에서 의미를 얻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 안에서의 그 사용이다"라고 했다. 그는 이것을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절대 명제로 말하지 않았다. "많은 경우에, 비록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이 단서까지 포함해 읽어야 한다. 말의 의미는 낱말 하나의 형태가 아니라, 누가,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능으로 사용했는가 속에서 드러난다.

언어화용론도 같은 사실을 말한다. 말은 단순히 화자의 머릿속 의도를 전달하는 통로가 아니다. 말은 듣는 사람에게 도달하면서 의미를 형성한다. 화자가 아무리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말해도, 수용자가 그 말이 놓인 상황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조롱이나 모욕으로 받아들였다면 그 해석은 가볍게 밀어낼 수 없다. 말의 의미는 화자의 의도, 수용자의 해석, 그리고 그 둘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 관점에서 보면 배재고 야구부의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데이" 구호가 왜 문제인지 분명해진다. 이것은 단순히 "커피 마시러 가자"는 말이 아니었다. 광주제일고와의 경기에서, 5·18을 떠올리게 하는 "탱크데이"를 함께 외쳤다. 얼마 전 스타벅스의 5·18 관련 판촉 논란이 있었고, 그 기억이 아직 생생한 상황이었다. 그 자리에서 "스타벅스 가야지"는 더 이상 중립적인 말일 수 없었다. 그것은 5·18의 국가폭력과 희생의 기억을 끌어와 상대를 조롱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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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일부 정치인들은 "학생들이 스타벅스 가자고 한 게 왜 문제냐", "그 정도 야유도 못 하느냐", "표현의 자유 아니냐"고 말한다. 참으로 무책임한 말이다. 이것은 말의 문자적 뜻만 붙잡고 실제 사용의 맥락을 지우는 억지다. "스타벅스 가야지"가 문제인 것은 스타벅스라는 단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광주제일고를 상대로, 5·18을 암시하는 "탱크데이"와 함께, 집단 응원 구호로 반복되었기 때문에 문제다. 이것을 모른다면 공인의 언어 감각이 부족한 것이고, 알고도 그렇게 말한다면 비극 조롱을 정치적으로 방조하는 일이다.

5·18은 광주만의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헌법적 기억이다. 그 기억을 경기장의 야유로 사용한 순간, 말은 장난이 아니라 비극 조롱이 된다. 조롱은 피해자의 고통을 지우고, 혐오는 그 고통을 다시 공격한다. 정치인은 이런 문제 앞에서 더 엄격해야 한다. 피해자의 상처를 살피기보다 가해자의 말을 "표현의 자유"로 감싸는 정치인은 민주주의의 언어를 모르는 사람이다. 표현의 자유는 역사적 학살을 조롱할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책임과 함께 있을 때 민주주의의 가치가 된다.

최근 교실에서 '운지', '부엉이바위', 'MC무현', 5·18 조롱,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희화화가 퍼지고 있다는 증언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이 표현들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다. 한 인간의 죽음을 놀이로 만들고, 역사적 비극을 웃음거리로 삼으며, 공동체의 기억을 훼손하는 언어폭력이다. 교사들이 이를 바로잡으려 할 때 "정치 편향"이라는 공격을 걱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교육의 위기다. 죽음을 조롱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일은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 시민을 기르는 교육의 기본이다.

"무섭노"에 대한 문제제기와 '낙인'의 차이

그렇다면 아이돌 그룹 리센느 원이의 "무섭노"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여기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노'라는 형태만 보면 안 된다. 그 말이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어떤 기능으로 사용되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영상에서 PD가 먼저 "무섭노"라고 했고, 원이는 그 말을 받아 "무섭노. 조명부터 무서운데"라고 답했다. 이 말에는 특정 인물의 죽음도, 5·18도, 지역 비하도, 사회적 약자 조롱도 직접 들어 있지 않다. 불 꺼진 방 앞에서 나온 공포 분위기 속 감탄과 맞장구에 가깝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둘러싼 불편함을 모두 "예민함"으로 밀어낼 수는 없다. 일베가 '노'를 노무현 전 대통령 조롱의 암호처럼 사용해온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말끝의 '노'는 단순한 어미가 아니라 상처를 건드리는 소리일 수 있다. 화용론적으로 말하면, 화자의 의도가 전부가 아니다. 수용자가 그 말을 어떤 사회적 기억 속에서 듣는지도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무섭노"가 누군가에게 불편하게, 심지어 혐오의 흔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문제제기 자체는 가능하다.

다만 "불편하게 들릴 수 있다"는 말과 "저 사람의 발화는 일베식 혐오 표현이다"라는 말은 다르다. 전자는 사회적 경고일 수 있지만, 후자는 한 사람에 대한 낙인이다. 특정 개인의 말을 혐오 표현으로 판단하려면 더 많은 근거가 필요하다. 그 말이 누구를 겨냥했는지, 어떤 피해 대상을 불러왔는지, 반복적으로 혐오 코드와 결합했는지, 이전 발언이나 행적에 같은 맥락이 있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공개적으로 알려진 범위에서 원이의 발언에 그런 근거가 충분히 확인되지는 않는다.

영남 방언에서 '나'와 '노'가 구별되어 쓰인다는 설명은 맞다. "밥 먹었나?"와 "어디 가노?"는 다르다. 그러나 실제 언어생활은 문법 설명보다 넓다. 방언은 지역마다 다르고, 세대마다 다르며, 상황마다 다르다. 특히 동남 방언에서 '노'는 의문만이 아니라 감탄, 독백, 한탄, 의외성의 표현으로도 쓰인다. "와 이리 춥노", "재밌노", "무섭노" 같은 말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답을 요구하는 질문만은 아니다. 말하는 사람의 느낌이 흘러나온 표현일 수 있다.

김현지 PD의 문제의식은 이해할 수 있다. 일베식 사회방언이 지역 방언을 오염시켜온 것은 사실이다. 그 오염이 청소년과 청년 세대의 언어생활로 흘러드는 현실도 심각하다. 그러나 특정 개인의 발화를 판단할 때는 더 정확해야 한다. 반대로 김현지 PD를 향해 "해고하라"고 몰아치는 것도 옳지 않다. 부정확한 낙인을 비판하면서 또 다른 낙인으로 갚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이번 논란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보수언론과 우파 정치권이 이 사안을 너무 쉽게 소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원이의 "무섭노" 논란을 곧바로 "경상도 사투리를 일베로 몰았다"는 이야기로 바꾸었다. 그렇게 되자 진짜 중요한 문제는 뒤로 밀렸다. 교실에 퍼진 '운지'와 '부엉이바위', 5·18 조롱, 여성과 소수자 혐오, 온라인 극우 콘텐츠 확산은 사라지고, 논쟁은 "조국이 또 틀렸다"는 조롱으로 바뀌었다.

이것이야말로 혐오 표현과 싸우는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일이다. 부정확한 단정은 혐오 세력에게 도피로를 준다. 그들은 곧바로 "그럼 사투리도 못 쓰냐", "스타벅스 가자는 말도 못 하냐"고 되묻는다. 그러나 이 반문은 교묘하다. 문제는 사투리 사용이 아니며, 커피 브랜드 이름이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어떤 역사적 상처를 불러와 누구를 향해 어떤 효과를 냈는가이다. 말의 맥락을 지우는 순간, 조롱은 장난이 되고 피해자는 과민한 사람이 된다.

기준은 분명해야 한다. 화자의 의도만 보아서는 안 된다. 수용자의 해석도 보아야 한다. 그러나 둘 중 하나만으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 말의 의미는 화자와 수용자, 그리고 사회적 맥락이 만나는 자리에서 형성된다. 이 기준으로 보면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데이"는 조롱이고 혐오다. 피해의 역사, 발화 상황, 수용자의 상처, 사회적 맥락이 모두 그 방향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반면 원이의 "무섭노"는 불편하게 들릴 수는 있지만, 같은 수준의 혐오 발화로 확정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배재고 사태처럼 역사적 비극을 공공연히 조롱한 경우에는 교육만 말해서는 부족하다. 교육은 필요하지만, 책임 없는 교육은 공허하다. 몰랐다는 말도 모든 것을 면제하지 않는다. 모르고 외쳤다면 왜 몰랐는지 물어야 하고, 알고도 외쳤다면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책임을 묻는 것은 학생들을 영구히 낙인찍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해주고, 그에 합당한 책임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 교육이다.

교사들에게도 제도적 보호가 필요하다. 교실에서 역사 왜곡과 죽음 조롱을 바로잡는 일이 왜 정치 편향인가. 그것은 민주주의 시민교육의 기본이다. 교육부와 교육청은 교사 개인에게만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구체적인 대응 매뉴얼과 교사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사투리는 보호해야 하고, 혐오는 교육해야 한다. 지역의 언어를 일베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 동시에 일베가 오염시킨 언어 현실을 못 본 척해서도 안 된다. "무섭노" 한마디로 한 청년을 일베로 몰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반작용으로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데이", "운지", "부엉이바위"까지 별것 아닌 농담처럼 만들어서도 안 된다.

말의 의미는 사용 속에 있다. 그리고 그 사용은 말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듣는 사람, 그 말이 놓인 역사, 그 말을 둘러싼 공동체의 기억이 함께 의미를 만든다. 그러므로 정확히 보아야 한다. 그래야 단호할 수 있다.

'노'를 일베에게 빼앗기지 말자. 사투리를 낙인찍지 말아야 혐오를 제대로 볼 수 있다. 혐오를 제대로 보아야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세종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이자 전 고려대 교수입니다.


#혐오#조롱#역사왜곡#민주시민교육#일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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