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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 대한 책을 읽으며 베란다 텃밭을 돌보는 이야기를 엮어 갑니다.
동네 도서관 근처에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모두가 초록이 옳다고 주장하는 여름에 쨍한 분홍빛을 쏟아내는 나무의 경쾌함이 반가웠다. '아무렴 어때', 하면서 시간과 자연의 질서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자유로움으로 다가왔다.

배롱나무의 꽃은 7월 중순부터 9월 말까지 100일 동안 꽃을 피워 백일홍이라 불린다. 며칠 전 도서관을 다녀오며 이르게 핀 꽃을 발견했다. 나무의 왼편,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 위로 드리운 가지에 서둘러 얼굴을 내민 꽃들이 몰려 있었다.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더 많이 닿는 자리라 이르게 꽃이 돋아난 걸까? 나무도 누군가의 시선을 감지하는 걸까? 왼편에서부터 꽃을 피운 나무의 심경이 궁금했다.

나무와 교감한 작가, 고다 아야

<나무> 고다 아야 식물을 사랑한 일본 수필가의 나무 여행기
<나무> 고다 아야식물을 사랑한 일본 수필가의 나무 여행기 ⓒ 교보문고

나무의 기분과 심경을 살피는데 고수인 사람이 쓴 책을 읽었다. 일본의 소설가이자 수필가 고다 아야(1904~1990)가 쓴 산문집 <나무>(2024년 12월 출간)로, 영화 <퍼펙트 데이즈>(빔 벤더스 감독, 2024)에 등장해 입소문을 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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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 아야는 소설가인 아버지 고다 로한의 영향과 주변 환경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초목에 대한 애정을 키울 수 있었다. 말년의 작가가 십 년 넘게 일본 전국의 나무를 찾아다니며 체험하고 성찰한 기록이 책에 묶여 있다.

"나무란 이처럼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다. 이다음에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나무가 숨긴 감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살짝 바람이 불자 가문비나무 틈새로 자란 활엽수가 노랗고 빨갛게 물든 나뭇잎을 흔들어대며 돌아가는 길을 장식해주었다." - 24쪽 <나무>, 고다 아야, 책사람집

나무에게도 감정이 있다고 믿는 작가는 "벚나무가 아닌데 술벚나무라는 혼동하기 쉬운 이름을 갖게 된 이 나무는 어떤 기분일까"라는 식으로 나무의 기분을 궁금해했다. "붕괴 지대에 뿌리 내리려는 나무는 씩씩한 것 같다"라면서 수목의 외양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을 살폈다. 나무의 처지를 헤아려 나무의 생애를 더듬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몇몇 나무들과 가까워질 수 있다. 가문비나무는 죽어 쓰러진 고목에서 어린 나무가 자란다고 한다.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나무를 어루만지다 저자는 온기를 느꼈다고 전한다. 등나무는 어릴 적 아버지와 같이 바라보았던 추억으로 저자에게 더욱 애틋한 대상이다. 진보라빛 크고 긴 꽃송이가 달리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니 기회가 되면 시기를 맞춰 등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핀 장면을 만나고 싶다.

삼나무에 대해서는 갈색과 회색으로 세로무늬가 들어간 직물로 짠 멋진 기모노를 입고 있는 듯하다고 표현한다. 벚나무에서는 의외의 지점을 찾아낸다. 꽃은 물론이고 어린잎도 수려한 나무인데 사람들 눈에 띄는 맨 겉껍질이 지저분하게 보기 흉하다며 애석해한다.

죽음에 대한 사유가 공존했던 나무 여행

나무의 죽음을 다루는 부분이 기억에 남았다. 굽고 휜 나무는 목재로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을 들은 고다 아야는 그런 평가가 못마땅해 나무를 켜는 장면을 보기로 한다. 휘어진 나무를 향해 톱날이 다가가자 나무는 저항하며 날을 밀어낸다. 끝내 두 동강이 나 버리고 나무 조각이 데굴데굴 굴러떨어진다. 저자는 떨어진 조각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걸 끌어안는다.

나무들이 집단 고사한 지역을 찾는 이야기에서도 숙연함이 풍긴다. 일군의 죽은 나무들이 회백색의 세로줄과 가로줄, 대각선이 되어 선묘화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풍경을 자아낸다. 그런데도 그 아래서 어린나무들이 일제히 태어나 세대교체의 현장을 이룬다. 어떤 거목이더라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쓰러지고 말지만, 다음 세대인 어린나무가 자란다는 확인에 저자는 안도한다.

여든에 가까운 고다 아야가 다음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며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나무를 찾아가는 모습이 유별하게도 보였다. 이 책이 저자의 유작이라는 걸 떠올리면 마음에 품었던 나무를 보러 나설 때마다 작가는 다가오는 죽음을 감지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그에게 나무의 세대교체 장면을 마주하는 일이나 나무는 죽은 뒤에도 목재로 두 번째 삶을 산다는 배움이 위로와 희망을 건네지는 않았을까.

한때 성냥개비의 자재로 기대되었던 포플러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밀려난 이야기가 책의 마지막 장에 실렸다. 급격한 사회 변화로 더이상 성냥개비를 쓰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나무에게도 행운과 불운이 있어 때에 따라 쓰임이 좋던 나무가 순식간에 무용한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시장 가치가 떨어진 포플러를 베어 성냥개비로 처분할 거라는 지인의 이야기에 저자는 목재장을 방문한다.

목재장에서 건조하고 밝은 빛의 나무 조각으로 재탄생하는 포플러를 본 뒤 그의 머릿속에서 불운과 연결되었던 포플러의 이미지가 바뀐다. 경쾌하게 잘려 나오는 나무를 보며 저자는 죽음이란 형태를 바꾸는 일이라는 사유에 다다른다. 성냥개비가 되어 가볍게 떨어지는 포플러를 보며 "격조와 절도 있는 춤을 춘다"고 표현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나무의 죽음이 경쾌하고도 건조한 밝음이자 하나의 춤이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글쓰기와 생활에 즉효하는 솔직함이라는 무기

이 책을 읽으며 그동안 배웠던 산문 쓰기의 공식-(독자에게) 질문하지 말 것, 유기적으로 연결할 것, 결론을 제대로 맺을 것-이 모조리 깨지는 경험도 했다. 저자는 자기 안의 궁금증과 질문을 가감 없이 적고, 앎을 속단하지 않으면서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둔다. 우연히 떠오른 소재를 연결해 성글게 짜인 니트처럼 글을 엮거나 문을 활짝 열어 둔 채 집을 나간 사람처럼 명료하게 글을 닫지 않는다. 그럴수록 저자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돋아났다. 여운이 길었다.

자유분방하고 솔직한 글을 쓰려면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한 법. 여든의 나이에도 나무를 보러 떠나는 저자에겐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삶을 향한 용기가 더 강렬했구나 깨닫는다. 그런 노장의 글에서 수필의 감칠맛을 제대로 맛보았다.

베란다 텃밭의 오이 싱그럽게 자라나던 아기 오이와 잎들이 마르더니 성장을 멈추었다.
베란다 텃밭의 오이싱그럽게 자라나던 아기 오이와 잎들이 마르더니 성장을 멈추었다. ⓒ 김현진

내게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할 것이 있다. 야심 차게 시작했던 베란다 텃밭이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다는 씁쓸한 고백이다. 어느 날 화분에 담긴 흙 위로 허연 가루 같은 게 보였고 그 뒤로 싱그러운 초록의 작물들이 뜨거운 햇볕에 타들어 가듯 가장자리부터 말라가기 시작했다. 작물을 빠르게, 더 크게 키우고 싶었던 남편이 화학 비료를 주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며칠 전 저녁 딸아이가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오이가 왜 저래? 열매가 다 시들어 버렸어."
"아빠가 욕심을 부렸어."

남편은 자신의 과욕을 순순히 인정했고 우리는 말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나무 (가을 에디션)

고다 아야 (지은이), 차주연 (옮긴이), 책사람집(2024)


#나무#고다아야#솔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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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베란다 텃밭 일기

작은 목소리로 소소한 이야기를 합니다. 삶은 작고 작은 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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