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소설을 만났다. '자이니치'(재일조선인)를 다룬 조해진의 소설 <우리 세희>가 그 책이다. 딸애가 '자이니치'에 대해 알았으면 해서 이 소설을 권했는데, 배경 지식이 없어 소설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나 역시 애초부터 '자이니치'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한겨레> 신문에 연재 되던 고 서경식 선생의 칼럼을 통해 그와 '자이니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나의 무지가 부끄러우면서도,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 슬픔과 정체성을 심문 당하는 혼돈을 정직한 고뇌로 전달하는 그의 글이 너무 좋았다. 조해진 소설에 등장하는 '선생님'이 바로 그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소설은 '자이니치'라는 공통성을 중심에 두고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경계인으로 겪어낸 삶의 소외와 슬픔, 쓸쓸함 그리고 연대감을 전한다. 화자인 욘주의 엄마 세희, 그리고 엄마에게서 잠깐 한국어를 배웠던 '선생님'과 그의 아내 '센세', 그리고 런던에서 디아스포라 전시를 하는 제이비 류와 그의 조부 류성철이 오사카 조선인 마을' 이쿠노구'로 이끌린다.
작가는 이들 모두 '이쿠노구(이카이노)'에서 옷깃을 스쳤을 인연이었음을 상상해 내며, 비록 당시 어긋남으로 서로를 알고 지내지는 못했을지라도, 일본에 던져지고 남겨진 '자이니치' 디아스포라가 이들의 딸과 손자를 통해 이어지고 있음을 환기 시킨다.

▲책표지 ⓒ 현대문학
선생님 서정우가 고 서경식 선생을 모델로 했다면, 화자의 엄마 세희는 양영희 작가를 닮아있다. 양영희 작가는 다큐멘터리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그의 가족사가 일제의 압제 그리고 '제주 4.3'의 고통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해방 이후 벌어진 분단과 전쟁이 그녀의 가족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조명했다. 이는 책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로도 상세히 다루어졌다.
소설 속 서정우와 세희의 만남은 '자이니치'라는 공통점에도 이들이 각기 다른 삶에 직면해있었음을 보여준다. 세희가 조선말을 쓰고 배우는 민족학교를 다닌 반면, 서정우는 차별을 겪으며 일본인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녔다. 조선말에 어눌했던 서정우가 세희로부터 조선어를 배우게 되면서 이들의 인연이 시작됐다.
세희는 동료 '자이니치'에게 조선어를 가르치고 조선인 권리 운동에 적극적이었는데, 서정우는 그녀가 "시위에선 그 박력이 더 명료해졌"다고 회고한다. 당시는 일본이 '조선적'을 외국인으로 등록시키고 조선인 민족학교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차별하면서 '한신교육사건'과 같은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던 때였다. 세희는 그 운동의 전선에서 전사처럼 싸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화자이자 세희의 딸인 욘주는 엄마의 그 '박력'이 낯설다. 세희는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그 사건에 압도되어 자신을 죄인 시하기 시작했고 이후 위축되고 생기를 잃었다. 언제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변인으로 살았던 엄마 세희가 그렇게 '박력있는' 젊은 여성이었다니, 그렇다면 어떤 엄청난 일이 있었길래 인생이 송두리째 뒤흔들렸던 걸까.
세희의 부모는 일제 식민의 결과로 일본에 도착했다. 세희의 아버지는 오사카 항만 공사를 위한 인력으로 징집 되어 일본에 던져졌다. 해방 후 이북 출신인 부모는 어떻게든 고향으로 돌아가려 갖은 애를 썼지만 실패한다. 고향을 그리던 부모는 북한이 민단을 통해 북송 사업을 시작하자 반쪽짜리 조국이라도 아들을 보내고 싶어 했다. 부모의 소망을 알았던 세희 오빠는 '우리 세희'만이라도 일본인처럼 교육 받고 성장 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북한행을 선택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어쩌다 전해지는 사진 속 세희 오빠는 몰라보게 야위었고 음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일본에서 조선인 차별이 일상이었어도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나 취미 생활을 하며 가족과 따뜻한 정을 나누며 살았다. 하지만 모든 인민의 삶을 통제하고 살림살이는 점점 궁핍해지는 북에서 어떻게 살만해질 수가 있었겠는가. 부모가 가진 이산의 한은 해원 되지 못하고 이들 가족을 재차 이산의 고통으로 몰아갔다. 실의와 불행에 빠진 세희 오빠는 슬픈 선택을 하기에 이르고, 결국 오빠가 자신 때문에 궂긴 결말에 이르렀다는 세희의 죄책감은 그녀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세희의 이주는 고통과 죄책감으부터의 도주였으나 한국도 그렇게 안락한 피난처는 될 수 없었다, 일본에서 열등한 '조센진'으로 차별 당했다면 한국에선 근본 없는 재일 동포로 하대 당했다. '자이니치'가 되기까지 그 어떤 상황도 그녀나 그녀의 부모가 선택한 삶은 없건만, 일본도 한국도 그들에게 눈에 띄지 말 것을 요구했다. 능숙하지만 어색한 조선말이 그녀의 '조선적' 만큼 이질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 그녀는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말이 사라지자 존재도 빛을 잃기 시작했다. 욘주가 사랑했던 엄마는 그렇게 점점 작아지고 퇴색되다 마침내 소멸했다.
엄마의 소멸을 겪은 욘주가 런던까지 출장을 가며 제이비 류의 전시에 관심을 가졌던 의구심은 그의 조부가 제주 사람이자 '이쿠노구' 사람이라는 연결감으로 해소된다. 제이비 류의 조부 류성철은 '4.3'의 격랑 속에 오사카에 던져졌다. 4.3으로 모든 가족을 잃고 '이쿠노구'에 정착한 류성철의 모습은, '다랑쉬굴 유해사건'을 파헤친 허호준의 논픽션 <4.3, 기억의 폭풍 속으로>에서 이명복이 겪은 환난과 겹친다. 식민과 분단과 전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고통이 개인의 인생에 올올이 새겨져 잊힐 수 없음을 알려준다.
류성철의 아내가 겪은 비통한 죽음의 맥락은 지혜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목소리들>을 통해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 제주 여성 다수가 '4.3'으로 고통 당했지만 이들은 이를 발설할 수조차 없었다. 잔혹한 학살의 고통을 확인하는 과정에서도 여자들이 겪은 고통은 제대로 발화 되지 못했다. 류성철의 아내가 겪었을 고통이 정확히 이 맥락에 있다. 학살과 강간과 갈취가 섬을 지배했던 시기, 최소한의 삶은커녕 숨조차 쉬기 어려웠던 이들은 몰래 제주를 떠나 오사카에 도달했다. 소설 속 '오사카 제주인 마을, 이쿠노구'가 공간적 이정표인 이유다. 이들의 생활사, 노동사 등은 <오사카의 제주인 마을, 이카이노 이야기>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고 서경식은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활력 넘치고 생명력 왕성한 재일조선인의 정형화된 이미지에 불편함을 토로한 바 있다. 번뜩 책과 드라마로 알려진 <파친코>의 '선자'가 떠오를 것이다. '선자'의 삶이 거짓이라는 것도, 나쁘다는 것도 아니다. '선자'라는 단일한 이미지로 상상되는 '자이니치'가 굴곡지고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때로는 위태롭고 가끔씩 조금 행복했을 그들의 삶을 결코 반영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한반도의 역사와 결코 무관할 수 없지만 우리가 타자화한 그들의 초상이 <우리 세희>에 담겨 있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 게시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