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네스코 선정 로고유네스코 선정 ‘김구 탄생 150주년 기념해’ 로고 ⓒ 유네스코
2026년은 유네스코(UNESCO)가 제43차 총회를 통해 '김구 탄생 150주년 기념해'로 지정한 해이다. 김구 선생이 유서 대신 썼던 자서전 <백범일지>의 맨 끝부분에는 부록이 있다. 선생의 핵심 사상을 보여주고 있는 <나의 소원>, 그것은 명문으로 이름나 있다. 그 내용에는 문화와 평화의 가치가 담겨 있는데 이것이 전 세계가 공유해야 할 보편적 가치임을 유네스코가 인정한 것이다. '문화의 힘'을 말했던 김구의 소원을 음미해 본다. 나는 어떤 문화 속에서 성장해 왔을까?
내가 자란 곳은 왕십리와 신당동의 산동네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그 불빛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는 산동네. 나의 연작 소설집 <모경의 빛>에는 그곳에서 일곱 식구가 보냈던 지난 시대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단편 중, <모경>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 방에 누워 카세트 라디오로 <지고이네르 바이젠>을 듣고 있으면……" 그랬다. 나는 산동네에서 카세트 라디오로 클래식을 듣는 학생이었다.
문화의 힘
초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마다 보았던 높은 담장 위, 흰색 바탕에 붉은색 글씨로 '피아노'라고 쓰인 간판과 장미 넝쿨 늘어진 담장 밖으로 흘러나오던 체르니 연습곡. 피아노를 치는 친구 여동생의 가늘고 흰 손가락을 부러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반에서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이 서너 명 정도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집에 있는 낡은 풍금의 건반을 두드려 보기는 했지만, 내가 독학으로 칠 수 있는 곡은 '젓가락 행진곡' 정도였다.
6학년 때였던가? 어느 날 큰언니가 음대에 다니는 친구 집에서 피아노 소품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왔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와 바다르체프스카의 <소녀의 기도>. 피아노를 배우는 친구들이 으레 자신의 실력을 뽐내기 위해 치던 곡. 나는 카세트 라디오로 그 곡을 들었다. 언젠가는 내 손가락이 음반 위에서 춤추게 될 날이 오기를 소망하면서.
중학생이 되어 언니가 사다 놓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을 읽다가 한 대목에서 목에 가시가 걸리듯 탁, 걸렸다. 표제작인 <난쏘공>에서 대학생 윤호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 짓는 능력은 마비 당하고, 또 상실 당한 것은 아닐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표지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초판 표지 ⓒ 문학과지성사
그 대목이 왜 껄끄러운 인상을 남긴 것일까? 당시에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리고 한참 지난 뒤 알게 되었다. 모차르트로 대변되는 문화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들킨 것 같은 마음 때문인 것을.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중학생 시절에는 클래식을 들었던 기억이 없다.
고등학생이 되어 앞날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을 때, 다시 클래식이 내게로 왔다. 전혜린의 에세이를 읽다가, 헤세의 책을 읽다가, 루 살로메의 평전을 읽다가 거기 나온 바그너니, 베토벤이니, 모차르트니 이런 이름들에 꽂혔을 것이다. 삭막한 입시 생활에서 클래식은 달콤한 위안이 되었다.
성음에서 나온 카세트테이프를 사 모았다. 가벼운 소품집부터 시작했다. 쥘 마스네의 <타이스의 명상곡>은 소품 중 가장 쉽게 다가왔던 곡이었다. 이 곡이 고급 창부가 나오는 유럽의 3대 오페라 중 하나의 간주곡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또, 책장에 꽂혀 있던 작가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 <타이스>가 오페라의 원작인 것도. 신앙심 깊었던 수도사는 고급 창부를 만나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반대로 고급 창부인 타이스는 수도사를 만나서 바로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다는 이야기. 고등학교 때 떠올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서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헤르만 헤세의 책을 읽다가, '음악을 라디오로 듣는 것은 신성한 음악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하는 대목을 읽고 또 생각에 잠겼다. 공연장은 꿈도 꿀 수 없었던 나의 형편에 맥이 빠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카세트테이프를 하나, 둘 사 모으면서 음악을 들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같은 곡들을.
대학생이 되어서는 클래식을 가까이할 틈이 없었다. <난쏘공>의 윤호가 했던 말처럼 '이웃의 절망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현실의 아픔과 시대의 우울, 역사의 상처를 말하는 노래들을 부르기에 바빴다. 귀족들의 예술로 출발한 클래식이 과연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를 대변할 수 있는가, 이런 고민 속에 클래식과는 완전히 멀어졌다.
교사로 발령이 난 뒤 다시 클래식을 들었다. 전교조가 막 창립했을 무렵이었다. 교장, 교감 같은 관리자들은 분회가 창립하는지 감시하느라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나에게는 학교가 감옥 같았다. <학교 없는 사회>를 쓴 이반 일리치 같은 급진적인 교육 사상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학교는 너무 낡고 구태의연하고 형식적이고 불평등하다고 느꼈다. 나는 수업이 없는 시간이면 귀에 리시버를 꽂고 클래식을 듣는 것으로 학교와 담을 쌓았다.
십여 년이 지난 뒤 드디어 나는 공연장을 찾아다니는 호사를 누렸다. 물론 내가 갔던 공연장이 클래식 공연장만은 아니었다. 교사 시절에도 판소리계 소설을 가르칠 때 <수궁가>니 <심청가>니 하는 판소리를 카세트테이프 전집으로 사다 놓고 들었듯이 국립극장에서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하는 국악 공연이나 연말 안숙선 명창 특집 같은 공연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국악 공연장이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느껴질 때면 국악이 홀대받는 것 같아서 속이 상했다. 국악이 서양 음악과 같은 자리에 놓일 수는 없는 걸까? 하는 갈증도 느꼈다.
윤이상에 눈 뜨다

▲고 윤이상 선생(1917~1995) ⓒ 윤성효
윤이상. 그 이름은 오래전부터 귀에 익었다. 부당하게 내려진 정치적 박해. 통영에서 해마다 열리는 윤이상 국제 음악제. 현대 음악의 상징적인 존재. 막상 그의 음악은 별반 들어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난해한 현대 음악의 느낌이 벽처럼 나를 가로막았다. 그런데 얼마 전 음악을 좋아하는 지인이, 윤이상 음악의 출발점이 쇤베르크라고 말해서 귀가 번쩍 뜨였다.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에 반해서 같은 제목의 단편을 쓴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 윤이상 관련 자료 찾기에 몰두했다. 자료가 쌓일수록 이제야 전모를 알게 된 나의 무지와 게으름이 죄스러웠다.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만행 중 하나인 동백림사건의 희생자. 독일 망명 이후 평생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디아스포라. 현대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40세의 늦은 나이에 파리를 거쳐 베를린에서 음악을 공부한 그가 데뷔작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하자 유럽 음악계는 깜짝 놀랐다. 그 이후 겪게 된 투옥, 고문, 사형 구형, 국제적 구명 운동, 사면, 망명, 통일 운동, 디아스포라로 생의 마감. 이렇게 요약된 그의 생애는 한 예술가로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시련을 떠오르게 한다.
현대 음악을 열었던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연구하고 이를 발전시켜 동양적이면서 독창적인 자신만의 '주요음 기법(Hauptton-Technik)'을 완성했던 그는 유럽 음악계와 평론가들 사이에서 '현존하는 세계 5대 작곡가' 안에 빈번하게 손꼽힌 거장이었다. 그는 감옥에서는 혹한의 추위와 사형 선고의 공포 앞에서 <첼로협주곡>이나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을 작곡했고, 망명 이후에는 고국에 발을 한 번도 내딛지 못했으면서도 80년 5.18을 추모하는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와 90년대 분신 정국 속 열사를 추모하는 <화염 속의 전사>를 작곡했다.
그가 작곡한 곡은 모두 150여 곡. 그에게는 음악이 현실에 등을 돌린 아름다움이 아니라, 역사의 상처를 담아내는 그릇이었다. 유럽의 한 평론가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유럽의 현대 음악을 구출한 사람이 바로 윤이상이라고 말한다.

▲통영 윤이상기념관에 있는 윤이상 선생 흉상. ⓒ 배윤주
그럼에도 그의 음악이 우리에게 아직 덜 친숙한 듯한 이유는 뭘까? 낡고 고루한 정치 세력이 그의 음악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을 다시 떠올린다.
"우리의 부(富)는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윤이상의 음악은 우리의 자긍심을 한껏 높여 준다. 그러니 나의 소원은, 통영에서 해마다 열리는 윤이상 음악제에 한 번 가보는 것. 그리고 연주가 까다롭기로 이름난 그의 음악이 더 자주 국내 무대에서 연주되는 것이다. 시대를 앞서는 음악은 늘 대중들의 귀에는 늦게 도착하는 법. 지금이라도 많은 이들의 귀에 그의 음악이 닿기를. 디아스포라의 역경이 꽃피운 윤이상 음악의 발자취를 새로운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