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펴고 땅을 다지며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서울. 그 이면에 쌓인 시간과 욕망의 변주곡을 따라 잊힌 '서울의 기억'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한 세기라는 시간이 서너 겹의 청계천(개천, 開川)얼굴에 얽혀있다. 맨살을 드러낸 물길이 빈민의 판자촌을 품어냈다. 그러다 철거되어 콘크리트 덮인 복개도로가 되었고, 그 위로 고가도로가 세워졌다. 복개와 고가도로를 걷어냈지만, 제대로 복원하지 못한 역사 유적과 옛 물길에 인공 구조물을 얹어 놓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지난 1일, 청계천 일대를 답사했다.

▲복개공사 준공 개통(1964)광통교~오간수교(청계6가) 까지 도성 안의 청계천 복개가 완료되어, 복개도로 개통을 기념한다며 세운 기념 시설이다. '청계천 은거공사 준공 개통'이라 써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개천은 맑지 못했다. 생활 하수와 공장 폐수가 뒤섞이고, 쓰레기가 넘쳐 났다. 사시사철 냄새가 코를 찔렀고, 장마철마다 범람하기 일쑤였다. 거기서 삶이 꾸려졌고, 아이들은 썩은 물에서 헤엄치며 놀았다. 오염과 도시 문제의 대명사였다. 그런 물을 내버려 둘 여유는 없었다(관련 기사 :
아현에서 마포까지 빼곡...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https://omn.kr/2irh9).
거대 공사판이 된 서울
개천이 덮인 건 그때부터다. 꼭 덮었어야 했느냐는 물음보다, 아픈 시대가 내몬 흐름으로 받아들인다. 처참한 환경에 위험한 위생이라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전쟁 상흔이 아물어 갈 즈음, 서울이 또 몸살을 앓기 시작한다. 월남과 귀환, 상경하는 인구가 봇물이다. 집과 식량은 물론 모든 게 부족했다. 서울이 직면한 초유의 과제였다. 이에 권력은 개발독재로 화답한다. 서울이 거대한 공사판이다.

▲복개 공사(1967)개천 바닥을 파며 복개가 진행 중이다. 1967년이니, 청계6가~8가 구간의 복개 모습이다. 사진 좌측 상단에 인왕산과 백악산, 동대문 등이 어렴풋한 것으로 보아, 황학동 부근으로 추정한다. ⓒ 서울역사박물관
근대화 상징이듯 늘어난 자동차가 아우성으로 속도를 요구한다. 흙길에 아스팔트가 깔린다.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도시 하천 곳곳을 콘크리트가 덮어나간다. 가리고 싶은 추레한 민낯마저 지워내는 덮개였다.
위생과 생존, 그리고 새로운 흐름이란 언어로 개천에도 복개라는 메스가 가해진다. 눈부신 변화로 찬사 받는다. 환경 훼손이 아닌 미래 개척이라는 믿음도 철석 같다. 하늘을 가르는 고가차도가 부국으로 가는 구름다리처럼 보였고, 외곽이 도심과 빠르게 연결되었다.
시대적 선택일지라도 상처 또한 깊었다. 햇볕이 막혀 물이 썩었고, 숨 쉬지 못하니 마냥 헐떡거렸다. 그렇다고 엄격한 기준으로 이를 재단하고 싶진 않다. 절박했던 당시가 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내몰았기 때문이다. 배고픔을 극복하고, 전염병을 막고, 홍수를 통제하며, 외국 도시의 꽁무니라도 쫓아가겠다는 강한 욕구가 상흔처럼 남아서다.

▲열린 상류자기 자리에서 상류로 수백 미터 옮겨진 광교에서 바라 본 청계천 상류. 1937년, 일제가 복개한 구간이 지금의 세종대로~광교(무교동 끝)로 추정한다. 가운데 우측 갈색 건물이 옛 '서린호텔'이다. ⓒ 이영천
복개 또한 개천의 역사다. 세월이 흘러 물에 햇살이 반짝이는 지금,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발전과 보존은 대립이 아니라 조화로워야 한다는 걸, 무작정 덮어버리는 게 능사가 아니란 걸 말이다. 그건 가난과 속도, 열망을 좇는 덮음이었고, 끙끙 성장통을 앓던 시대의 서울이 치러낸 값비싼 유산이어서다.
개천 복개의 시작
상류 일부이나, 맨 처음 개천을 덮은 건 일제다. 1937년, 경성시가지 계획 명분으로 무교동 일대를 정비 하면서다. 개천을 가로질러 구조물을 걸치고, 흐르는 물 위로 근대라는 무거운 강압을 얹었다. 일제가 강제한 건 복종과 비굴, 그리고 침묵이었다. 도성의 젖줄로써 청정한 흐름보다, 감시와 통제 대상물로 개천을 전락시켰다.

▲복개도로(1976)모 신문사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청계천 상류 구간의 복개 도로. 가까운 좌측이 '서린호텔'이고 멀리 가장 높다란 빌딩이 '삼일빌딩'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본격화는 1958년이다. 광교~청계6가까지 근대화의 망치 소리가 탕탕 거리기 시작했다. 개천은 태생부터 도성의 물줄기라지만, 그땐 도로라는 효용으로 더 무겁게 써야만 하는 도심 한가운데였다. 서울은 전화의 포연을 걷어내고, 빠르게 몸집을 불려야만 했다. 이에 더 많은 길과 공간, 토지 이용 고도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거창한 구호보다 근면의 표징으로 도성 안 개천이 말끔히 덮어진다. 보이지 않게 된 물길을 대신해 전혀 다른 흐름이 생겨난다. 쇠 깎는 소리, 퉁탕 철판을 두드리는 망치 소리, 윙윙 거리는 기계 소리가 골목을 채워 나갔다.
개천 양쪽으로 손에 기름 묻힌 기술자가 유난히 많던 곳이다. 전통적으로 인쇄 메카였다. 맞은편은 작은 선반 하나만으로 부품을 깎고, 고장 난 모터를 분해해 다시 살려내는 기술자들, 이름 모를 나사를 상자째 쌓아두고 손님을 기다리던 상인의 공간이었다.
도시가 점차 속도를 추종한다. 벌거벗은 물길이 복개도로 밑으로 잦아들자, 그 위에 고가도로가 설 차례를 예비하고 있었다. 위생과 교통, 산업과 수출, 성장과 발전이라는 표어가 공사장 먼지 위로 겹겹이 내려앉았다. 자연을 덮어서라도, 생산이라는 맥박이 펄떡이게 하려는 고육책이었다.

▲세운상가와 개천일제강점기 말의 소개 공지에 들어선 세운상가. 복원된 보행 고가교가 개천을 건너고 있다.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재개발이 중구난방이다. 목적이 다른 퉁탕거림이 수십 년 째 현재 진행형인 셈이다. ⓒ 이영천
지금은 무참히 헐리고 있지만, 훗날 세운상가 일대를 '을지로 산업 생태계'라 불렀다. 서로 의존하는 관계였다. 없어진 건 물론 사라진 부품도 만들어냈다. 산업화 이면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낸 기술자들의 찬연한 나날이 여기서 흘렀다. 물길이 덮인 대신 쇳가루와 땀 냄새가 골목을 채웠다. 보이지 않는 하천 위에 또 다른 흐름, 산업의 강이 그렇게 도도하게 흘렀다.
쫓겨남과 덮음
1965년, 청계6가~8가로 이어지는 물길에도 복개의 삽날이 닿는다. 상류가 덮이자, 그에 잇닿아 덮는 걸 당연한 순서로 받아들였다. 개천이 아래로 잦아들고, 그 위를 콘크리트가 채워 나갔다.

▲오간수교(1968)사진에 '오간수교~제1청계교'라는 글로 보아 오간수교에서 청계8가 까지 복개 모습이다. 양쪽으로 덕지덕지 얽힌 판잣집들이 위태로워 보인다. ⓒ 서울역사박물관
홍수를 막고, 악취를 줄이며, 도로를 늘이겠다는 연속된 계산이다. 개천 변 판잣집들이 속수무책 철거 당한다. 빈한한 삶들이 급속히 내쫓긴다. 먼지와 소음으로 덮여가는 개천을 따라 빈곤의 처절함이 깊이 파이고, 묻혀버린다. 쫓겨나는 아픔을 담아낸 기록조차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이율배반 격으로 권력은 또한 빈곤 탈출을 동시에 시도한다. 개천을 덮은 복개도로가 단순 구조물이 아닌 가난을 걷어내는 시대의 가교인 듯 뻗어나간다. 물길을 깔고 앉은 복개도로 위로 수레와 자동차가 부지런히 오간다. 도시가 한층 여물어가는 듯 보였다.
돌이켜보면 그건 자연을 거스른 오만임과 동시에 합리적 결정이라 규정한 형용모순이었다. 복개는 또한 감추기 위한 부끄러움이자,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청계6가~8가가 덮여가던 시간은, 서울이 속도에 익숙해지는 때와 겹친다. 물의 흐름은 덮어졌지만, 그러나 개천 위를 바삐 오가는 이들의 허덕거리는 삶까지 덮어버리진 못했다.

▲오간수교(2026)열린 개천 양쪽으로 의류 등을 취급하는, 대형 상가가 줄지어 서 있다. ⓒ 이영천
복개로 한때 그들의 삶이 흔들렸지만, 역설적으로 터전이 더 단단하게 다져졌다. 길이 넓어지자 화물차가 드나들었고, 만들어진 물건이 빠르게 팔려나갔다. 임시 좌판이 상설 점포가 되었고, 흩어져 있던 점포가 서로의 필요로 함께 모였다. 청계6가~8가 양쪽으로 대형 상가가 줄지어 들어서게 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숨 가쁜 시대
1970년대 서울은 숨 돌릴 틈이 없었다. 공장이 밤낮없이 돌아갔다. 수출이라는 단어가 신조였고 '잘살아보세'라는 강제된 구호가 일상을 지배했다. 와중에 청계8가~신답철교까지 개천 하류가 부산하게 덮어진다.

▲신답철교(1976)청계천 복개도로의 끝단인 신답철교 부근의 복개공사 모습이다. 사진 좌측의 경사로는 막 지어진 청계고가의 시점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신답철교(2026)복개도로와 고가도로를 걷어낸 자리로 또 다른 고가도로(내부순환도로)가 높이 지난다. 사진 가운데 신답철교가 아담하다. ⓒ 이영천
앞선 복개가 위생과 재해였다면, 여기는 그 결이 사뭇 달랐다. 개천을 덮는 일보다, 도시 공간 구조를 재편하는 게 중심이었다. 개천도 흐름에만 머물지 않았다. 산업과 물류, 확장하는 도시를 외곽과 연결하는 기능적 통로이자 기반 시설로 자리매김했다. 행정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고, 공사는 신속했다. 숙의와 토론보다 당연한 책무로 여겼다.
그때 서울은 효율과 능률의 포로였다. 곡선보다 직선이, 여백보다 밀도가, 느림보다 빠름이 미덕이었다. 개천은 치부책 속 비용처럼 취급되었고, 자연은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물은 여전히 흘렀지만, 모두의 시선은 복개를 넘어 더 멀리 확장해나가는 주거지와 공장 지대로 향하고 있었다.
덮인 건 늘 깊은 회한을 남겼다. 거친 속도는 진지한 질문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이주 당한 빈민의 기억, 햇볕을 쬐지 못하는 물, 콘크리트 아래에 갇힌 칙칙한 어둠에는 어떤 시선도 가 닿지 못했다. 분명 성장했고 성과도 뚜렷했지만 그만큼 도시 표정은 칙칙해지고, 냉담해졌으며, 무표정해졌다.

▲복개와 철거(1965)한쪽에서는 복개가, 맞은 편에서는 이유도 모르는 강제 철거가 이뤄지고 있는 이질적인 풍경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청계8가~신답철교까지 복개는 그러나 시대의 자신감과 함께했다.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었고, 더 빨리 움직여야만 한다고 여겼다. 그 선택이 도시를 키웠지만, 동시에 넉넉한 품과 여유도 지워냈다. 보이지 않는 물길을 대신해, 성장이란 숫자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때의 콘크리트 아래엔, 속도를 향한 맹신과 아직도 답을 듣지 못한 황망한 철거와 쫓겨남이 아프게 깃들어 있다.
개천이 다시 열렸다. 그렇지만 수십 년간 복개도로를 누볐던 가빴던 숨결마저 지워낸 건 아니다. 우리는 개천을 덮어 도로를 냈고, 지금은 다시 물을 흘려보내고 있다. 그게 비록 엉성할지라도 흐름이 뒤틀린 건 아니다.
차량도, 물도, 흐름이다. 반복되는 과정에서 도시는 여전히 학습 중이다. 무엇을 우선해야 하고, 무엇을 남겨두어야 하는지 말이다. 청계천은 그래서 단지 되찾은 물길이 아니라, 수백 년 흘러온 서울의 핏줄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