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여돌을 사랑했지만 케이팝을 사랑하지 못한 덕후의 환희와 기쁨, 슬픈, 분노의 축약적인 기록이다.
지금까지 케이팝 고인물로서의 쓴소리를 이어오며 애증을 드러냈다. 현재 케이팝을 향한 사랑은 예전에 비해 많이 사그라 들었다. 물론 지금도 스포티파이 앱을 켜면 '우먼 오브 케이팝 Women of K-pop' 플레이리스트부터 확인하고, 최근 화제 된 아이돌 리센느의 "거제 야호"를 흐뭇하게 바라보지만, 딱 그 정도까지다. 케이팝 여아이돌(여돌)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먼저 내 정체성이 퀴어라는 걸 밝힌다. 여돌을 좋아하는 여덕들의 성 정체성은 당연히 다양하다. 다만, 나는 여성에게 끌리는 퀴어다. 이 정체성은 내가 케이팝 여돌을 사랑한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내가 청소년이던 시절 동성애자, 퀴어, 성소수자라는 말은 지금보다 훨씬 더 금기시됐다. 그 존재에 대한 낙인 역시 강했다. 그러다 보니 당시 내게 여자들로만 이뤄진 '걸그룹'이라는 존재가 특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외로움과 두려움이 있던 시절, 이들의 존재는 한 줄기 빛으로 다가왔다. 여돌을 사랑하며 다양한 사랑의 모습 중에 내 자리도 있을 거 같다는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여돌에 입덕하며 케이팝 문화 속으로 점점 빠져들었다.
퀴어 문화와 케이팝

▲퀴어 커뮤니티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 ⓒ raphi_rawr on Unsplash
하지만 케이팝신은 퀴어 문화를 대변하거나 흡수한 적이 없다. 오랫동안 퀴어문화의 미학과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차용했지만, 그 뿐이었다. 퀴어 문화의 사회적 맥락이나 정체성은 철저히 분리해 내는 전형적인 '문화 전유'(Cultural Appropriation, 어느 한 문화집단이 다른 문화집단의 전통문화를 자신의 것인 양 무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일컫는 말) 양상을 보여왔다. 케이팝 산업은 퀴어 커뮤니티의 생존과 저항의 역사가 담긴 퀴어문화의 유산을 사용하면서도 이를 단순히 '트렌디한 콘셉트'로 가공해 활용했다.
춤의 장르 중 하나인 보깅와 왁킹은 1970~80년대 미국 뉴욕과 LA의 흑인 및 라틴계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만들어진 장르다. 당시 가혹했던 사회의 억압과 폭력 속에서도 이들은 자신의 열정과 욕망을 춤으로 표현했다. 많은 케이팝 아티스트는 이 보깅와 왁킹을 안무에 녹였지만, 이 춤에 담긴 성소수자들의 역사나 저항의 의미를 언급한 경우는 드물다. 기획사 역시 이 안무를 단순히 '세련된 해외 트렌드', '하이패션적인 안무', 혹은 '팔 혹은 손을 이용한 고난도 댄스' 정도로만 포장하여 마케팅했다.
케이팝에서 '패션'으로 등장시키는 '젠더리스'(Genderless)도 마찬가지다. 이는 기존의 성별이분법을 깨는 스타일링과 태도, 젠더 표현으로 '퀴어함'을 드러내려는 퀴어 커뮤니티의 실천이다. 그런데 케이팝에서는 '젠더리스'를 콘셉트 삼아 파격적인 패션을 선보일 뿐, 그 의미를 살피지는 않는다.
케이팝 팬덤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팬덤은 사실 동성만으로 이루어진 아이돌 그룹과 그들 사이의 친밀성·관계성을 '놀이'로 포장해 즐기곤 한다. 하지만 아이돌 멤버 중에 '퀴어/동성애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말은 용납하지 않는다. 멤버 중 나 같은 사람(퀴어)이 있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말하는 팬도 있어 상처 받은 기억이 많다. 그럴 때마다 '퀴어가 뭐 어때서?!'라는 마음이 들었다. 아이돌 멤버를 포함해 누구나 LGBTQ(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퀴어의 첫 글자를 딴 약어로 성소수자를 의미)일 수 있지 않나.
결국 팬덤 내에서도 케이팝 신에서도, 나를 포함한 LGBTQ 존재는 존중받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이런 모습은, 결국 케이팝 여돌을 향한 사랑의 불씨조차 꺼트렸다.
케이팝 덕후가 찾은 다른 길

▲지난 6월 태국 'BB FAN FESTIVAL 2026 콘서트' 현장. ⓒ 박주연
어느 날 내 삶에 태국 여자 배우들이 등장했다. 'GL드라마'(걸즈 러브의 줄임말로, 말 그대로 여성 간의 사랑, 연애를 다루는 드라마 시리즈)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이들이다. 이들은 드라마 내에서뿐만 아니라 그 외의 활동에서도 '두 사람의 친밀성'을 드러내는 걸 주저하지 않고, 이를 상업적으로 활용한다.
사실 태국은 연간 약 100편의 BL(보이즈 러브·남성 간 로맨스) ·GL 드라마를 제작하며 아시아 전체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2025년 기준 태국의 이 시장 가치는 약 49억~50억 바트(한화 약 1800억~2300억) 규모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성장과 더불어 BL·GL드라마는 기본 '로맨스'라는 구조 속에서 시대극, 스릴러, 호러, 타임슬립물 등 그 장르도 넓혀가며 더 많은 시청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이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들은 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 베트남, 멕시코, 이탈리아 등 세계 각지에서 팬 미팅을 열거나 명품 브랜드 행사에 참석하는 등 뜨거운 인기를 누린다. 이들은 언론 인터뷰 등을 할 때도 퀴어, 성소수자, LGBTQ, 레즈비언 등의 단어를 자연스럽게 언급한다. 때때로 정치적인 발언(태국의 동성혼 법제화 전에 법제화를 지지한다고 하는 등)도 한다. 방콕 프라이드 퍼레이드(한국의 퀴어 퍼레이드와 같다)에 참여하거나 LGBTQ 관련 행사에도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의 팬들 대다수가 퀴어 당사자라는 점도 당연히 인지하고 있다. 이들을 보면 '퀴어인 나'가 환대받는 기분이 든다.
케이팝 공연이나 콘서트에서도 동성 멤버의 섹슈얼한 친밀성이 연출되는 순간이 있다. 이를 즐기는 팬들의 반응이 있긴 하다. 다만, 단순히 '판타지적인 동성애'로만 여겨져 아쉬움이 있었는데 지난 6월 태국에서 본 'BB FAN FESTIVAL 2026 콘서트' 공연은 달랐다. 관객과 무대 위의 아티스트 모두 '퀴어'의 의미를 알고 지지하며, 이를 무대 위에서 표현했다. 동성애자 퀴어인 나의 욕망이 투영된 퍼포먼스를 펼쳤고, 이를 매끄럽게 연출했다.
케이팝신의 변화

▲그룹 아이들( i-dle)은 올해 초 발매한 정식 발매곡 "모노"(Mono)에서 직접적으로 퀴어를 언급했다. ⓒ 큐브엔터테인먼트
물론 케이팝신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그룹 아이들(i-dle)은 올해 초 발매한 정식 발매곡 "모노"(Mono)에서 직접적으로 퀴어를 언급했다. 이 노래에는 "네가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동쪽에서 왔든 서쪽에서 왔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너의 진짜 느낌대로 춤을 춰"라는 가사가 나온다. 이외에도 많은 케이팝 아티스트들의 변화도 보인다. 케이팝 아이돌 최초로 커밍아웃한 멤버도 있고, 해외 공연 등에서 퀴어문화로부터의 영향 언급하거나 퀴어팬덤의 지지를 밝히는 이들도 있다.
방탄소년단(BTS)의 멤버 알엠(RM_이 2018년 UN 총회 연설에서 한 "당신이 누구이든, 어느 나라 출신이든, 피부색이 어떻든, 성 정체성(Gender identity)이 어떻든, 여러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라는 발언은 무척 반가웠다. 아이돌이 퀴어 커뮤니티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을 두르거나 흔드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외 콘서트에서의 '무지개 깃발'의 등장에 대해 일부 팬덤은 "내 아이돌을 정치적 도구로 쓰지 마라"면서 퍼포먼스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분리하려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케이팝 산업 그리고 문화, 팬덤이 변화 속도가 여전히 더디다고 느낀다. 이는 한국 사회가 여전히 퀴어혐오가 만연한 사회라는 반증 아닐까.
동시에 글로벌 인기를 누리는,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로서 또 트렌드를 주도하는 케이팝이야 말로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변화시킬 힘이 있다고 믿는다. 전 세계의 팬들을 향해 노래하고 퍼포먼스를 펼치는 케이팝 아이돌 아닌가. 이제는 다양성을 포용하고 혐오 대신 사랑을 외칠 때도 되지 않았나. 아니, 그래야만 하지 않을까.
다시 열정적으로 케이팝을 사랑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케이팝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어느 여돌 덕후의 고백' 시리즈를 통해 내내 이 질문을 던져왔다. 케이팝 신이 퀴어인 나 뿐만 아니라 여성인 나, 여돌을 좋아하는 여덕인 나를 환대하는 공간을 만들 수 있는지, 그럴 생각이 있는지 묻고 싶다.
케이팝은 더 이상 국내에만 영향을 미치는 콘텐츠가 아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인기를 끄는 만큼, 다양성을 포괄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로 노래를 만들고 퍼포먼스 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아이돌, 기획사 그리고 팬을 포함한 케이팝과 관련된 우리 모두는 이 변화를 맞이할 준비가 됐는지 되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