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산에 부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차를 홀짝이고 있노라니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새콤달콤한 석류초콜릿이 너무 강할까 걱정도 했지만 운남대백호 장미 자스민 블렌딩과도 찰떡으로 어울렸다. ⓒ 노시은
여름은 무엇보다 햇빛의 농도와 바람에 섞인 물의 농도로 우리 곁에 당도합니다. 창문을 열면 훅 끼치는 공기의 무게가 점점 묵직해지고, 잎이 넓어진 나무들은 제법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하죠.
절기상으로 초여름에 접어드는 이맘때가 되면, 달력 위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두 개의 굵직한 날이 나란히 놓입니다. 바로 음력 5월 5일 단오(端午, 6월 19일)와 양력 6월 하순경에 찾아오는 하지(夏至, 6월 21일)입니다. 단오의 풍경을 떠올릴 때면 1882년 북관(北關)으로 유배를 떠났던 조선의 문인 정윤영(鄭胤永)의 시 <단오(端午)>를 가만히 곱씹게 됩니다.
곧 찾아올 태양의 맹렬한 기세
夏五留連關外客 (여름 오월, 변방 밖에 오래 머무는 손님)
秋千擾亂巷西童 (골목 서쪽에서는 아이들이 요란하게 그네를 뛴다)
菖蒲葉底溶溶水 (창포 잎 아래로는 물이 질펀하게 흘러가고)
楊柳枝頭澹澹風 (버드나무 가지 끝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인다)
- 정윤영(鄭胤永), <단오(端午)> 중 일부, 1882
변방에 묶인 유배객의 눈에 비친 단오는 쓸쓸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칩니다. 골목에서는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그네를 뛰고, 창포 잎 아래로는 맑은 물이 넉넉히 흘러가며, 버드나무 끝에는 초여름의 부드러운 바람이 붑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시의 끝맛은 조금 깐깐합니다. 시의 후반부에서 그는 '이날 묘소에 제사 지내는 일은 도리어 지나치게 후한 데 빠졌구나(此日祭墳還失厚)'라며 일침을 가하거든요. 명절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도 허례허식을 경계하는, 아주 꼿꼿하고 점잖은 성리학자의 태도입니다.
하지만 그 딱딱한 잣대를 잠시 거두고 혜원 신윤복의 화첩 속 <단오풍정(端午風情)>으로 시선을 옮겨보면, 그 시절 단오가 얼마나 아찔하고 펄떡이는 생명력으로 가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림 속 여인들은 깐깐한 선비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계곡 맑은 물에 찰랑찰랑 창포물로 멱을 감고, 땋아 내린 굵은 트레머리를 손질하느라 여념 없죠. 화면 한가운데서 붉은 치마를 펄럭이며 거대한 그네에 몸을 실은 여인의 자태는 다가올 뜨거운 여름을 향해 돌진하는 단오의 맹렬한 에너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단오가 향기로운 풀냄새가 나는 물로 몸을 씻고 붉은 치마를 펄럭이며 다가올 무더위를 '대비'하는 역동적인 시간이었다면, 며칠 뒤 찾아오는 '하지(夏至)'는 태양의 맹렬한 기세를 온몸으로 '통과'해야 하는 인내의 시간입니다.
1년 중 낮이 가장 길고 태양의 고도가 가장 높은 하지는 양기(陽氣)가 그야말로 폭발하는 절기입니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이 뜨거운 날을 무작정 차가운 얼음으로만 쫓아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 철학에서는 만물이 극에 달하면 반대의 기운이 생겨난다고 보았기에, 하지가 지나면 땅속에서 서늘한 음기(陰氣)가 조용히 태동 한다고 믿었죠. 그래서 극에 달한 열기 속에서도 바깥 기운에 흔들리지 않도록 호흡을 고르고 내면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데 집중했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스스로 서늘해진다는 지혜였습니다.
그러나 에어컨 리모컨 하나면 모든 계절이 평정 되는 요즘, 단오의 펄떡이는 생명력도 하지의 고요한 인내도 모두 옛말이 되었습니다. 그저 "아, 오늘 진짜 덥네" 한마디 툭 던지고 리모컨 한 번 누르면 금세 시원해지니까요. 이 짙은 계절을 쉽게 흘려보낼 수는 없다는 묘한 오기가 발동한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북한산에 차린 찻자리
'신윤복 그림 속 여인들처럼 붉은 치마 펄럭이며 그네는 못 타더라도, 산바람 맞으며 제대로 된 야외 찻자리라도 폼나게 펼쳐보자!'
'가장 긴 낮의 열기를 차 한 잔으로 고요히 식히던 옛사람들의 그 감각을 온몸으로 느껴보자!'
저는 야심 차게 짐을 꾸려 북한산으로 향했습니다. 푸른 산에 어울리는 청자 다구에 찻잎을 미리 넣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분명 머릿속엔 맑고 우아하게 산바람을 맞는 제 모습이 그려져 있었건만, 차 도구,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병, 촬영 도구, 미니 테이블까지 꾸역꾸역 챙겨 넣은 배낭은 징글 징글 무거웠습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완벽한 풍경을 병풍 삼아 차를 마시겠다는 일념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바윗길을 올랐습니다. 풍경이 조금 아쉽다 싶어 무거운 짐을 풀었다가 '아무래도 여기가 아닌가 봐' 하며 다시 짊어지기를 몇 번.
불과 2~3년 전만 해도 이 정도 산행에 찻자리 준비 쯤은 콧노래를 부르며 가뿐하게 해냈던 것 같은데, 헉헉 대며 돌덩이처럼 무거워진 발걸음을 원망하다 보니 새삼 야속하게 흘러버린 세월이 뼈저리게 체감 되더군요. 낭만은 짧고, 현실의 배낭은 무거웠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짙푸른 녹음과 웅장한 북한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완벽한 자리를 찾아내 짐을 풀었을 때, 그 모든 고단함은 툭 불어온 산바람에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기분 좋게 찻자리를 펴고 차를 홀짝이기 시작했지요.

▲운남대백호 2g, 장미 3송이, 자스민 4-5송이로 블렌딩해서 여름의 열기를 향기롭게 식혀보았다 ⓒ 노시은
준비해간 차는 찻잎 겉면에 보송보송한 은빛 솜털이 덮여 있는 운남 대백호에 장미와 자스민을 블렌딩한 것이었습니다.
이 백차(白茶)는 뙤약볕이 쏟아지는 한낮보다는 고요히 세상을 비추는 저녁의 달빛을 더 닮아 있습니다. 인위적 가공 없이 자연의 햇빛과 그늘 아래서 건조해 만든다는 백차는 서늘한 성질을 품고 있어, 땀으로 빠져나간 진액을 보충하고 체내의 열을 은은하게 내려주는 훌륭한 여름 차입니다. 가장 뜨거운 태양의 계절을 가장 서늘하고 순수한 찻잎으로 맞받아치는 셈이죠.
장미꽃과 자스민을 더한 건 대백호가 가진 은은한 꽃향기를 장미와 자스민 향까지 더해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물을 붓는 순간 숲의 피톤치드에 꽃향기가 더해졌습니다. 향긋한 창포물로 멱을 감을 수는 없는 요즘이지만, 맑은 차탕 위로 훅 하고 번지는 꽃향기 한 번에 무거운 배낭에 짓눌렸던 어깨가 사르르 풀리며 눅눅한 불쾌감이 깨끗하게 씻겨 내려갔습니다.
여기에 곁들인 다식은 캐나다 사는 친구가 방문했을 때 건넨 새콤달콤한 석류를 품은 초콜릿이었습니다. 예로부터 땀을 많이 흘려 기운이 밖으로 흩어지기 쉬운 여름철에는 신맛을 먹어 그 기운을 단단히 거두어들였습니다. 조선 시대 궁중에서 단옷날 임금님이 신하들에게 내리던 최고의 청량음료, '제호탕(醍醐湯)'이 대표적입니다. 덜 익은 푸른 매실을 연기에 검게 그을려 말린 오매(烏梅)를 꿀, 향기로운 한약재와 함께 달여 갈증을 씻어냈죠. 민가에서 붉은 앵두로 화채를 만들어 먹은 것도 모두 이 새콤한 산미로 여름의 기운을 다스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몸도 서늘해진다

▲산에 올라 찻자리를 펼치고 마시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제 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올라가는 일은 쉽지 않다는 걸 느끼며 세월의 야속함에 조금은 슬퍼지기도 했다. 싱가포르 한달살이 했을 때 시인 친구가 선물해준 다구에 차를 우렸고, 캐나다 사는 친구가 방문했을 때 건넨 석류 초콜릿을 다식으로 곁들였다. ⓒ 노시은
준비한 석류 초콜릿은 그 옛날 앵두와 오매의 자리를 완벽하게 대신했습니다. 입안에서 톡 터지는 석류의 쨍한 산미가 지친 미각과 몸을 번쩍 깨우고, 초콜릿의 달콤함이 꽃 향기와 기가 막힌 균형을 이루고 힘들다며 성난 근육을 달랬습니다.
땀 흘려 산을 오른 뒤에 맛보는 이 향긋한 새콤달콤함이라니, 갈증과 피로가 한번에 스르르 풀리는 기분. 여름에 신 것을 먹어야 한다는 조상들의 오랜 지혜가 제 몸을 통해 완벽하게 증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맹렬한 무더위는 우리를 꽤 지치게 할 것입니다.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 일상에 불쾌지수마저 높아진다면, 그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어느 구석에 나만의 찻자리를 펼쳐보는 건 어떨까요.
가장 긴 낮의 열기를 피하려 애쓰기보다, 고요히 물을 끓여 좋아하는 혹은 몸이 원하는 찻잎을 우려 보는 건 어떨까요. 혀 끝을 기분 좋게 깨우고 더위에 허해지기 쉬운 기운을 채워주는 새콤달콤한 다식까지 곁들인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계절을 보내는 조상들의 슬기로움은 결코 거창한 데 있지 않습니다.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아스라한 향기를 맡으며 호흡을 고르는 그 짧고 고요한 시간 속에 이미 깃들어 있으니까요. 마음이 고요해지면 몸도 서늘해진다는 옛말처럼, 차 한 잔이 내어주는 여유가 우리 내면의 온도를 다정하게 낮춰줄 것입니다.
단오의 펄떡이는 생명력과 하지의 깊고 짙은 녹음이 교차하는 계절의 문턱. 맑게 우려낸 차 한 잔과 함께 여러분의 여름도 무사하고 향기롭게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돌아오는 길, 산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던 것과 달리 돌아온 일상에서, 날은 덥고 배낭은 무거워 발걸음이 무거웠는데 다리 밑 그늘에서 쉬는 왜가리를 보며 '너도 덥구나!' 싶은 생각에 왠지 위로가 됐다 ⓒ 노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