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우연히 날아든 나뭇잎 따라 떠나는 여행, 차(茶)와 숲이 있는 녹차 수도 보성군 제암산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차와 숲이 있는 교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일행은 첩첩산중으로 둘러친 자연휴양림 제암산 기슭에서 나만의 숲을 찾아 자연 속으로 빠져든다. 제암산 자락 계곡을 따라 자연의 숨결을 느낀다. 깊은 계곡답게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숲 해설사의 목소리마저 청아하게 들릴 정도이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유독 맑은 물이 제법 넓게 흐른다. 계곡물 위에 떠 있는 나뭇잎 밑으로 피라미들이 옹기종기 살랑거린다. 피라미들을 구경하느라 일행의 발걸음이 더디다.
제암산 '더늠길'을 따라 숲속 맨발 황톳길에 들어서자, 고라니와 너구리 발자국 흔적이 곳곳에 찍혀 있다. 이 길은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산짐승들이 내려온다고 한다. 제암산 황톳길은 사람보다 오히려 고라니나 너구리 그밖에 다른 동물들이 다니는 소통의 길 같다. '더늠길'이란 판소리 명창 으뜸 재주를 이르는 말로 우수한 산림자원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휴양림 산책로라고 한다. 잘 정돈된 황톳길은 1Km 정도 된듯해 보였다.
해설사에서 만난 꽃차

▲제암산 자연휴양림 힐링센터 전경 ⓒ 김병모
소중한 순간들이 각자 사랑 가득 행복으로 이어지길 바라며 일행은 맨발 황톳길을 따라 뿔나비 앞세우고 계속 걸었다. 행복과 사랑이 밥 먹여 주지 않지만, 적어도 이 순간 행복과 사랑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느낀다.
일행은 물소리 숲 야영장을 지나 담안저수지 팔각정에 이르자, 해설사는 진달래 꽃차를 내놓는다. 진달래 향기가 코끝을 감돌아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 오감을 힐링하는 느낌이다. 향기가 담안저수지로 날아갈 때쯤, 숲 해설사는 준비한 바늘잎나무 잎들을 나눠준다. 침엽수를 바늘잎나무, 활엽수를 넓은잎나무라고 한다. 꽃차도 마셨겠다. 서둘러 담안저수지 상류 쪽으로 가는데, 물고기들이 저수지 옆 벚나무 가지에서 떨어진 열매 주변으로 몰려든다.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열매를 먹기 위해 몰려든 것이란다. 보기 드문 현상이다.
숲길 따라 하얀 망초꽃이 산들바람에 흔들거린다. 낮에 달을 맞이하듯 낮 달맞이꽃도 숲길에 활짝 피어 일행을 맞이한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낮 달맞이꽃과 망초꽃을 춤추게 한다. 고맙게도 일행 더위마저 식혀준다. 제암산 계곡 물소리,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 들으며 행복 걸음으로 걷는 숲길은 언제 걸어도 오감이 힐링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던가. 전라도 음식 맛이야 잘 알려진 바대로 제암산 기슭 자연휴양림 백반 정식도 일품이다. 반찬들이 한결같이 맛과 풍미를 더 한다. 무슨 쌀로 밥을 지었는지 밥마저 꿀맛이다. 점심 식사한 일행의 행복한 표정들이 지금도 선하다.
오후엔 보성군 제암산 자락 차밭에서 만든 차를 우려 차향을 맡으며 들숨과 날숨으로 차훈(茶熏) 명상을 하니 오감이 즐거웠다. 몸은 허공처럼 비우고 행복한 마음으로 심호흡하니 온몸이 한결 가벼워진다. 몸 상태에 따라 차 맛도 다르다고 한다.
기왕에 차수도 보성에 왔으니 차밭에 들러 찻잎을 직접 채취하여 차(茶)를 만들어 보자고 한다. 호기심에 찬 마음으로 인근 차밭으로 향했다. 뜨거운 햇살을 가리기 위해 밀집으로 만든 모자를 각자 눌러쓰고 차밭에 들어가 배운 대로 일창이기(一槍二旗) 잎을 채취하였다. 채취된 찻잎을 모아 300도와 200도 사이 온도로 살청(殺靑)과 유념 과정을 거듭한다. 쉬운 과정은 아니었지만, 차(茶)를 좋아한 사람으로서 다시없는 경험이다.
입안에 차향이 가득한 채, 돌아오는 길에 보성이 낳은 역사적인 인물, 송재 서재필 박사(1864~1951) 생가에 잠시 들렀다. 보성군 제암산 힐링센터에서 자동차로 출발하면 보성군 문덕면 가내길 18-35 서재필 생가까지 50분 정도 소요된다. 새의 두 날개 품속 같은 가내마을에서 출생한 서재필 박사 일화가 흥미롭다.
어느 날 서재필의 어머니가 친정 가내마을에 기거할 무렵, 커다란 황룡이 초당 옆 뽕나무를 휘감으며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꿈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가내마을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서재필이다.
1884년 갑신정변 주역의 한 사람이었던 송재 서재필은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 양의사가 된다. 그는 평생 조국 독립을 위해 몸 받쳤으며,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광복 후엔 미군정청 고문으로 일한다. 그는 유년 시절을 보낸 가내마을을 평생 그리워하면서 가슴에 담아두었다고 한다.
보성을 벗어나 돌아오는 길가엔 아름드리 벚꽃 나무 가로수가 즐비하고, 음미했던 띄움 차 향기가 여전히 입속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