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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나는 오마이뉴스에 '한 달에 322km를 달리며 내 삶이 바뀌었다'는
글을 썼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저 달리기가 좋아서 달리고 있었다. 달리면 스트레스가 풀렸고, 머릿속이 정리됐다.
러닝 크루 오픈채팅방에 달리기 약속이 올라오면 참석을 누르고, 새벽잠을 이겨내며 달리러 나갔고, 함께 달리면 더 즐겁게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6월 7일, 제30회 제주국제관광마라톤 풀코스에 참가했다. 42.195km. 2월에 생애 첫 풀코스를 경험한 대구마라톤에 이어 4개월 여만에 다시 뛰는 두 번째 풀코스였다.
두 번째 도전 또한 여전히 막연하고, 6월인 만큼 더위를 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평소 긴장을 잘 안 하는 성격이지만 새벽 3시 50분에는 일어나 4시 반에는 출발해야 대회장 근처에 주차가 가능할 듯했고, 경기 전부터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도 많았다.
이번 대회를 돌아볼 때 가장 떠오르는 건 기록보다 남편의 모습이다. 나보다 더 긴장하고, 걱정했다. 준비물은 잘 챙겼는지, 빠뜨린 건 없는지 컨디션은 괜찮은지 묻던 남편은 잠을 설쳐가며 나보다 먼저 일어나 먼 길 운전을 해주었다.
차 안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자라고 해주며, 도착해서는 응원을 아낌없이 해주었다. 그리고 휴대폰도 두고 달리는 내가 언제 들어올지 몰라 무려 50분 넘게 결승선에서 나를 기다려주었다.
제법 마라톤 대회 응원에 익숙해져 요령이 생기기도 했다는 남편은 결승선에 들어오는 나를 멀리서부터 알아보고, 마음으로 크게 응원하며 숨죽여 말도 삼켜가며 영상을 찍어주고, 완주를 축하해주고, 무엇보다 나보다 더 자랑스러워해 주었다.
"대박 대박, 너무 수고했어. 자기 엄청 빨리 들어왔어! 다리는 괜찮아? 진짜 멋있었어!"
마라톤은 흔히 혼자 달리는 운동이라고들 말한다. 마라톤은 혼자인 듯하지만 결코 완주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주로에서 만난 오래도록 기억될 사람들이 있다. 평소 내가 마음속으로 존경하던 러닝크루의 마라토너들. 조용히, 묵묵히, 매일 15km 이상씩 달리는 사람들이다. SNS에서 지켜보며 팬심이 피어나 응원하고 감탄하던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가며 먼저 이름을 불러주었다. 자신만의 속도로 꾸준히 밀며 달리면서 나를 발견해 잊지 않고 인사해주는 '화이팅'이 그 어느 때보다 진심으로 느껴졌다.
'와, 내가 이렇게 멋진 사람들과 함께 달리고 있구나.' 도민체전에서 함께 뛰었던 남자 선수를 초입에서 만났는데, 그는 먼저 나를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김태리 화이팅."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금 속도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그제야 시계를 확인해 보니, 정말 내가 생각한 페이스보다 30초 정도 빠르게 오버페이스로 달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놓치지 않고, 내 페이스를 체크해 준 '강상구 선수'에게 너무너무 고맙다. 돌아보면 출발 2-3km 지점이었을 때 나는 살짝 흥분한 상태였다. 경기가 시작되자 축제분위기와 약간의 긴장과 함께 저절로 페이스가 올라갔다. 오버페이스만 안하면 된다는 말을 수도없이 들어왔는데 나도 모르게 초보의 실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풀코스 초반의 욕심은 후반의 고통이 되어 돌아온다.
나는 경기 초반 속도를 체크해 주던 그 선수의 한마디 덕분에 목표했던 페이스에 맞춰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 한마디가 없었다면 완주 자체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중간 지점을 지나 반대편 코스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기다렸다는 듯 응원을 돌려주었다. 그에게 받은 힘을 조금이라도 꼭 갚고 싶어서였다.
주로에서 만난 선수들 중에는 끝까지 달릴 수 있도록 힘이 되어준 두 명의 러너도 있었다. 한 사람은 내 앞에서 달리던 분. 핑크색 싱글렛 등 뒤에 '기태형'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속으로 다짐했다. '저 이름만은 놓치지 말자.' 그는 내 목표가 되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내 뒤를 바짝 따라오던 초록색 상하의의 여성 러너였다. 앞으로는 핑크색 상의의 기태형을 쫓고, 뒤로는 그녀에게 따라잡히지 않으려 애쓰며 달렸다. 그렇게 이름도 모르는 처음 만난 두 사람 사이에 끼어 30km가 넘는 거리를 함께 달렸다.
38km쯤 되었을까. 결국 다리가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완주는 가능할 것 같았지만 속도가 계속 조금씩 처지며 힘들어졌다. 더 달릴 수 있는지 속도를 더 올릴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물어보며 결정을 내렸다.
'이제는 두 분을 보내드려야겠다.' 마음을 먹고 뒤따라오던 여성 러너에게 길을 내주려는 순간이었다. 속도를 놓으려는 순간 그녀는 내 옆을 나란히 달리며 앞서가지 않고, 손을 내밀어 주었다.
앞으로 손을 저으며 같이 가자며 커다란 눈으로 응원을 보내왔다. 함께 포기하지 말자는 뜻이었다. 나를 뒤따라오며 따라잡고 싶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한마디 말보다 더 강하고 따뜻했던 그 손짓 속에 그 순간 내게 필요했던 모든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녀 역시 힘들었을 텐데 자신의 힘을 나누어주었다.

▲주로에서 만난 사람들대만에서 왔다는 초록 상하의의 그녀, 정말로 그녀의 손짓 덕분에 나는 끝까지 달릴 수 있었다. ⓒ 김태리
덕분에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녀를 바로 앞에 두고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대회가 끝난 뒤 기록을 확인해 보니, '기태형'(실제 이름은 김기태)이라는 이름의 핑크색 싱글렛 남자 러너는 전체 218위, 초록색 여성 러너분은 215위, 나는 221위였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는 사이좋게 나란히 완주를 해냈다. 나중에 SNS를 통해 알게 된 사실도 놀라웠다.
김기태님은 무려 89번째 마라톤에 참가한 베테랑이었다. 나는 감사의 메시지를 남겼고 그는 나를 기억한다고 답했다. 초록색 여성 러너는 대만에서 온 참가자였다. 대회 후 전복죽을 먹으러 간 부스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달릴 수 있었다", "감사하다"라며 뜨거운 포옹도 나누었다. 그렇게 우리는 SNS 친구가 되었고 함께 사진도 남겼다.
본인들의 레이스를 끝내고, 남은 풀코스 주자들을 응원하러 온 동료들
3시간이 넘어가며 두 다리는 무거워졌고 속도는 떨어졌다. 머릿속은 점점 비워지며 아무생각 없이 달리고 있었다. 한 발, 또 한 발. 그 무렵부터 머릿속에는 결승선에서 기다리고 있을 남편과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우리 서귀포 러닝크루 70RC 멤버들이 막 떠올랐다. 그들의 얼굴과 응원이 보이면 마지막 힘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제발 70RC 나타나라. 나타나라'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달렸다.
30분 거리의 다른 위치에서 10km 경기를 마치고 넘어온 크루들, 하프코스를 끝내고 기다려준 크루들이 있었다. 결승선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크루들을 찾았다. 그리고 정말 그들이 보였다. 멀리서 들리는 응원 소리와 익숙한 얼굴들. 예상대로 저 아래에서부터 힘이 다시 차올랐다. 방전된 줄 알았던 배터리가 보조 배터리를 만나 다시 충전을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결승선까지 힘내어 달릴 수 있었다.

▲10k, 하프, 자신들의 경기를 끝내고 끝까지 기다려준 70RC 가족들함께 달리고, 함께 진심을 다해 응원하는 우리가 참 좋다. ⓒ 김태리

▲결승점 들어오는 모습을 담아준 크루원에게 너무나 고맙다.이런 달리는 순간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복이다. ⓒ 김태리
생각해 보면 나는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기록보다 더 큰 선물들을 매일 받고 있다. 함께 달리는 좋은 사람들.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사람들.
나는 오래달리기를 못하는 학생이였다. 학창 시절 체력장 시간이 되면 늘 겁이 났다. 600m, 800m도 힘들었다. 빈혈 때문이었는지, 체력이 약해서였는지 오래달리기 도중 선생님이 멈춰 세우셔서 기록이 늘 비어 있는 학생이었다. 그런 내가 지금은 주 5일을 달린다. 도민체전에 출전하고, 풀코스를 완주하고, 또 다음 대회를 기다린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다. 만약 지금 풀코스 대회를 신청해 놓고 두려워하거나, 신청 자체에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처음부터 잘 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 역시 그랬다. 중요한 것은 재능보다 한 번 더 운동화를 신어보는 용기인지도 모른다.
이번 마라톤을 통해 나는 기록 이상의 것을 얻었다. 42.195km를 달리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길 위를 함께 달려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나는 더 멀리도 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달릴 것이다. 그리고 나도 다른 러너들을 진심을 다해 응원해 줄 것이다.

▲제30회 제주국제관광마라톤축제끝났다!!!! 신발부터 벗고, 완주의 기쁨을 즐겼다. ⓒ 김태리
좋아하는 달리기를 더욱 좋아하기 위해 계속해서 재미있게 달리고 싶다. 10년 뒤의 나 역시 어디선가 달리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부상없이 오래오래 길 위에서 만나자'
오늘도 러닝을 즐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안부와 응원을 보낸다.

▲마라톤 메달이 추가되고 있다.달리기 시작한지 1년 3개월, 메달들이 쌓이고 있다. 인생은 정말 알수없다. ⓒ 김태리

▲제 30회 제주국제관광마라톤축제두번째 나간 풀코스에서 3시간 40분의 기록을 냈다. 이 기록은 결코 혼자 만든 게 아니다. ⓒ 김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