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충관이희호 여사 서거 7주기 추모식장 ⓒ 김정호
2026년 6월 10일은 고 이희호 여사 서거 7주기 추모식 날이다. 김대중 이희호 추모사업회 고문으로서 참석하는 게 당연한 도리이리라. 서울 동작구 동작동 현충원에서 오전 10시에 열리기에 그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원주에서 이른 새벽에 출발해야 하기에 알람을 6시로 맞춰뒀다. 하지만 예사 날처럼 새벽 4시에 깼다. 볼일을 보고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혹이나 실수할까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곧장 일어나 책장을 뒤적이다가 간단히 아침밥을 챙겨 먹고 오전 7시 45분 고속버스를 탔다. 나는 서울 갈 때면 꼭 열차를 탔지만, 꼭 맞는 열차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동작동이 가깝기에 버스를 탔다.
첫 번째 만남
1시간 남짓 서울로 가면서 고인과의 이런저런 추억을 되새겼다. 나는 고인과 학부모와 교사의 인연으로 고인 생전에 꼭 세 번 만났다. 그 첫 번 만남은 1980년 9월 18일로 기억이 된다. 당시 김대중 씨는 그 전날 '내란 음모 사건' 공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나는 이대부고 국어 교사로 그 다음 날, 오전 3교시 교장실 바로 옆 교실인 고 2-1반에서 국어 수업을 마치고 교장실 앞으로 지나는데 문이 뾰족 열리면서 김연옥 교장 선생님과 한 부인이 작별인사를 나누다가 나와 마주쳤다. 신문이나 TV 화면으로 여러 차례 봐온 이희호 여사였다. 그 순간 그분은 나에게 눈인사하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친 후 얼굴을 가리면서 얼른 현관을 거쳐 교문 쪽으로 종종걸음으로 사라지셨다. 문을 열고 있던 교장 선생님이 나에게 말씀했다.
"박 선생님, 다음 시간 수업이 없으시면 잠깐 내 방으로 들어오십시오."
마침 수업이 비기에 교장실로 들어가 소파에 마주 앉았다.
"누구신 줄 아시지요?"
"네. 김대중 씨 부인 이희호 여사가 아닙니까?"
"저와는 대학 시절(서울사대 교육학과) 같은 과 친구입니다."
"네. 그러세요."
"오늘 아침 신문 보셨지요?"
"네. 김대중 씨가 육군 계엄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아마 그 선고가 내리자 밤새 못 주무셨나 봅니다. 오늘 아침 문득 남은 한 남자라도 구해야겠다고 아들 학교로 찾아와 저를 붙잡고 한참 하소연을 하시다가 갔습니다."
"아, 네."
"박 선생님, 그 아드님 잘 아시죠?"
"그럼요."
"박 선생님이 좀 조용한 곳으로 불러 용기 잃지 말라고 등을 두들겨 주십시오."
"교장 선생님!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자칫하다가는 역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말 없는 눈빛으로 격려하는 게 가장 좋을 듯합니다."
"말씀 듣고 보니, 그 방법이 좋을 듯합니다."
두 번째 만남
1994년인가 95년인가 김대중 씨가 영국에서 귀국한 뒤, 정치 재계를 선언한 5월이었다. 어느 날 대학총장실에서 김대중 씨 부부가 우리 학교에 '1일 교사'로 오신다는 말과 함께 편의를 부탁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고1 어느 한 반 수업을 할애하기로 하였다. 그 시간이 되자 정의숙 이화학당 이사장님, 장상 이대 총장님의 안내로 내외분이 교무실로 오셨다. 당시 김대중 씨는 평민당 총재직을 맡고 계셨다. 유독 우리 학교로 오신 것은 아마도 둘째 아드님은 이대부중 졸업생이었고, 셋째 막내는 이대부고 졸업생으로 두 아들이 무사히 졸업한 데 대한 감사의 뜻과 이희호 여사가 장상 총장님과는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웠기에 오신 듯했다. 그리하여 그날 내외 분과 나는 인사를 나눴지만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눈 인사라 아마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 몇 해 후, IMF 사태로 거국적인 구조조정 바람이 불었다. 대학의 부속 학교도 예외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대 후문의 이대 부속 고교와 금화 터널 입구의 같은 재단 금란여고가 합병케 돼 이대부고는 금란여고 교사(校舍)로 이전했다. 마침 그해 초가을 나는 <샘물 같은 사람>이라는 산문집을 펴냈다. 그 산문집에서 '사양하는 마음'이라는 꼭지의 글에서 마침 내 반 두 학생(신유철, 신수 안)이 반장 선거에서 1, 2 학기 서로 양보하면서 번갈아 반장을 하는 것을 보고 양 김(兩金, 김영삼 김대중) 씨를 아주 신랄하고 까칠하게, 고교생보다 못하다고 비판한 바 있었다. 그 책을 당시 오선차랑 교감 선생님이 무려 30부나 구매해 주셨다.
그 며칠 후, 월요일로 출근하자 오 교감 선생님이 내 자리로 오셔서 어제 연대 앞 창천교회에서 이희호 장로님을 만나 내 책을 전달하셨다는 말씀을 했다. 그 순간 나는 교감 선생님에게 감사하다는 말씀도 드리지 않고, 벌레 씹은 듯 "왜 그런 일을 하셨을까?"라는 표정으로 아마도 그 글을 읽은 동교동 가족들은 나와 거리를 두리라고 예측했다. 게다가 내 저서에는 항상 "1945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구미초등학교, 구미중학교를 졸업하다"라는 약력을 빠트린 적이 없었다. 그 댁 가족들은 '하필이면 박정희 후배야!' 얼마나 짜증이 났으랴.

▲성탄카드이희호 여사가 보낸 성탄카드 겉장 ⓒ 박도
그런데, 그해 누군가 연말 청와대에서 온 우편함의 우편물을 전했다. 겉 주소도 이희호 여사의 친필인데 본문 카드 속 글씨도 또박또박 친필로 적어 보냈다. 문안 중 잘못 쓴 글씨 위에는 화이트로 칠을 한 뒤 그 위에 다시 정자로 써서 보냈다. 그 뒤, 2019년 6월 10일 돌아가시던 그해까지 단 한 해도 빠트리지 않고 강원도 횡성군 안흥 산골로 보내주셔서 나는 그 답례로 내가 손수 농사지은 강냉이 스무 자루 한 묶음을 보내곤 했다.
그 세 번째 만남

▲<동행> 초대장이희호 여사 자서전 동행 초대장 표지 ⓒ 박도
2008년 11월 초순, 이희호 여사 자서전 출판준비위원 한 분이 "이희호 여사가 정중히 우리 부부를 초대한다"라며 초대장을 발송하려고 하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 며칠 후 안흥 산골 내 집으로 초대장이 왔다. 그즈음도 우리 집은 연탄불을 가는 일에, 고양이 밥 주는 일 등으로, 어느 한 사람은 집을 지켜야 했다. 사실 그동안 숱한 학부모가 우리 부부를 식사 초대했지만 아내와 동행한 적이 거의 없었다. 언젠가 택시 기사 학부모가 아들 대학 합격에 감격하여 내 집까지 당신 차를 몰고 와 간청해도 아내는 끝내 사양했다. 아내는 예상대로 참석하지 않았다.
내가 세상을 오래 산 탓인지 참 세상은 변화무쌍하고, 사람 팔자 알 수 없었다. 땔감이 없어 낫을 들고 구미 금오산 기슭으로 푸나무를 하러 가서 다 떨어진 고무신을 패대기 치며 신세 타령을 하던 어떤 아낙네(박상희 선생 부인 조귀분 여사)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국무총리 장모에 대통령 형수가 돼 고래 등 같은 큰집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끗발 좋게 사는 것도 봤고, 사형수 아들이 대통령의 아들이 되고, 나는 새도 떨어트릴 대통령 경호실장이 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는 일도 보았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지위에 올랐다는 게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인생을 마무리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날 출판기념식장에는 전직 김대중 정부 요인들이 거의 다 오셨는데 유독 나에게 건배사를 부탁했다. 그래서 "사형수의 아들을 위하여!"라고 제창했다. 그날 마무리 폐회 직전에는 강원 산골 농사꾼인 나를 제1착으로 불러 기념 촬영도 할 수 있었다.

▲악수이희호 여사와 악수하다 ⓒ 박도
이런저런 추억을 더듬는 새 고속버스는 강남 터미널에 멎었다. 10시 10분 전에 도착, 현충원에서 식순에 따라 추모식을 마친 뒤 묘역으로 이동, 헌화를 마쳤다. 이런 날은 조용히 사라지는 게 주최 측에 도와주는 듯하여 슬그머니 준비된 버스를 탔다. 그런데 멀리서 오셨는데 굳이 점심을 들고 가라고 전화 하기에 버스에서 하차 점심을 맛있게 들었다. 옆자리 김홍걸 이사장은 식사 도중 '남북 간의 좋은 징조가 엿보입니다'라는 얘기를 조심스럽게 했다.
석사 후 열차를 타고 귀가하면서 김 이사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모처럼 자네 만나 반가웠네. 염치 없이 점심까지 잘 얻어먹고 귀가하네. 남북 관계가 잘 풀리 면 자네 따라 평양에 가서 시민 기자로 동포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게 나의 마지막 소원일세."
얼마 후 답장이 왔다.
"예, 선생님! 부디 건강하십시오."
덧붙이는 글 | *박도 기자는 김대중 이희호 기념사업회 고문입니다.
*더 얘기를 듣고 싶은 분은 오마이 TV나 유튜브에서 '이희호, 박도'를 검색하시면 영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