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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가장 무섭고 두려웠던 건 시간이다. 아침 기상 시간을 맞춰 놓고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한 세월이 35년이다.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이다. 퇴직을 결정한 이후부터 나는 앞으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끙끙거렸다. 갑자기 주어진 무한한 시간의 자유는 포상이라기보다 시간 앞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길을 잃은 것 같은 막막함을 안겨주는 숙제 같았다.

먼저 퇴직한 선배들이 간혹 하던 말이 있다.

"나오면 다 똑같아. 아줌마, 아저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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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그저 웃어 넘긴 그 말을 퇴직 후 바로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직장에서 어떤 직함을 달았든,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었든 퇴직하는 순간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평생을 일한 직장 밖 세상에서 나는 그냥 아줌마였다.

매일 아침 사무실에 가장 일찍 출근해 서류를 검토하고, 결재하고, 회의에 참석하던 내가 평일 낮에 동네를 걷는 모습조차도 부자연스러웠다. 세상은 어제도, 오늘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바쁘게 잘 돌아가는데 나는 뭔가 세상과 동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은퇴자로 마주한 세상은 생각보다 당혹스러웠다. 거리를 걷는 내 걸음은 뭔가 헛바퀴를 도는 듯 겉돌았다.

그렇게 혼자 겉돌던 퇴직 후의 삶도 어느덧 6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영원히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아 조바심 나던 낯선 낮의 일상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알람 소리 없는 아침의 기상을 즐길 줄도 알게 되었고, 시간에 쫓기지 않는 걸음에도 익숙해지고 있다.

 선배님과의 조우.
선배님과의 조우. ⓒ cbarbalis on Unsplash
지난 10일에는 모처럼 자유 수영을 하기 위해 수영장을 찾았다. 간혹 들르는 수영장도 처음엔 참으로 낯설었다. 비교적 나보다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이 낮에 수영장에 많이 계셨다. 함께 수영을 한지 오래된 분끼리 '언니, 언니'하면서 일상을 나누는 모습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제는 제법 정겹게 다가온다. 직함도, 계급장도 없고, 그저 서로를 "언니"라고 부르며 웃는 그 평범한 일상 속으로 나도 조금씩 녹아들고 있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수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건널목을 건너고 있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 주변을 둘러봤다. 이 시간에 나를 아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분명 내 이름이었다. 몇 초 남지 않은 건널목을 누군가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몇 년 전 먼저 퇴직하신 선배님이었다. 오래 전 같은 부서에서 잠시 근무했던 기억이 있다. 수영장에서 나와 건널목을 건너는 나를 저 멀리서 발견하고 가던 길을 되돌아와 몇 초 남지 않은 건널목을 숨 가쁘게 뛰어오신 것이다.

"어떻게 저를 알아보셨어요. 잘 지내시죠?"

숨을 몰아쉬는 선배님께 반가움과 미안함을 섞어 인사를 드렸다.

"이 사람아, 자네를 어떻게 몰라봐, 이렇게 길에서 보니 너무 반갑네."

"선배님, 저 지난해 퇴직했어요."

"알지, 카카오톡 프로필 보고 알고 있었네."

선배님은 이어서 깜짝 놀랄 말씀을 하셨다.

"퇴직하고 글도 썼더구먼. 이제 마음 편하게 먹고 건강하게 즐겁게 살아. 그게 남는 거야."

그렇게 잠시 길에서 선배님과 근황을 나누고 헤어졌다. 선배님은 같은 부서에서 일할 때처럼 나를 토닥토닥 해주셨다. 우연히 몇 년 만에 만난 후배를 살뜰히 챙겨주시고는 '쿨'하게 돌아서 가는 선배님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가슴 한편 울컥하면서 먹먹해졌다.

선배님이 그동안 나를 잊지 않고 지켜봐 주고 있었다는 사실과 지금 세상과 어울려 천천히 걷고 있는 후배를 따뜻하게 응원해 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가슴 벅찼다. 세상에 나와 낯설고 부자연스러운 시간을 천천히 적응해 가고 있지만, 이렇게 나를 잊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응원해 주는 선배가 있었기에 지난 6개월이 덜 힘들었나 보다. 선배님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리쬐는 오후의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퇴직#선배#일상#두려움#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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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 (noheene) 내방

길었던 직장생활을 끝내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글로 써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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