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원 (연합뉴스TV 캡쳐, 자료사진) ⓒ 연합뉴스
10일 광주지방법원 제4형사부에서는 고 문철태씨에 대한 반공법, 국가보안법 사건에 대한 선고가 열렸다.
고 문철태씨는 1972년 일본 파견 교사 시절 북한 공작원과 접선해 간첩 교육을 받았다는 혐의로 1981년 안기부에 1차 검거됐었다. 안기부에 협조하기로 하면서 겨우 풀려났지만, 이후 아들 문영석씨를 일본에 유학 보내 공작원과 다시 교신하고 기밀을 넘겼다는 '위장 전향' 혐의를 받아 재차 체포되었다. 고 문철태씨는 1985년 8월 15일 안기부 광주분실에 끌려가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수사를 받고 광주법원에서 재판을 통해 1986년 무기징역이 확정됐고, 1998년 가석방으로 출소하실 때까지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24년 2월 이 사건을 '안기부의 가혹행위에 의한 조작사건'으로 규정하고 진실규명사건으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고 문철태씨의 아들이자 함께 체포되어 처벌받았던 문영석씨가 자신과 아버지 고 문철태씨에 대한 재심을 신청했다.
재판부는 재심신청에 대해 영장도 없이 강제 연행되어 불법 구금된 채 강압적 수사를 받았다는 취지로 재심 개시 사유를 인정해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이에 검찰은 재심 개시에 대한 별다른 의견을 밝히지 않았고, 고 문철태님에 대해 무죄를 구형했다.
이날 재판부는 핵심 쟁점이었던 1985년 안기부 수사 당시의 위법성을 전부 인정했다. 재판부는 문 씨 부자에 대한 불법 체포와 구금 사실을 명확히 하며 "수사 과정에서 가혹행위를 당했을 개연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한 "위법한 신체구속 상태에서 이루어진 피의자 신문조서 및 법정 진술은 임의성을 인정할 수 없어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 사건의 유일한 유죄의 근거였던 자백의 증거 능력이 배제됨에 따라 범죄를 증명할 객관적 증거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날 재판에 참석하지 못하고 부친의 무죄선고를 일본에서 전해 들은 문영석씨는 "저는 사건이 일어난 나라인 일본의 법정에서 통역사로서 판사를 마주하고"있었다며, 이날의 무죄를 "국가가 법의 이름으로 짓밟았던 우리 가족의 명예를 법의 이름으로 되찾으라는, 하늘에서 설계한 가장 완벽한 명예회복의 순간"이라며 감회를 밝혔다.
이 사건의 본질은 국가 폭력에 의한 명백한 인권 유린이 핵심이다. 이번 재심의 핵심 요지는 이런 불법 구금과 고문 속에 얻어낸 자백은 증거 능력이 전면 무효라는 재판부의 결정이다. 법무법인 원곡 변호인단은 진화위 결정문과 더불어 체포 날짜가 1985년 8월 15일로 명시된 교도소 '재소자 신분 카드'를 결정적 증거로 제출했고, 이를 통해 영장 집행일과 열흘이나 차이 나는 수사 절차의 위법성을 입증했다.
이번 판결로 인해 안기부의 불법구금과 고문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고 문철태씨가 40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지난 1월 아들 문영석씨의 재심 무죄판결에 이어, 세대를 이어 국가 폭력으로 파괴된 한 가족의 억울함이 마침내 사법적으로 해소됐다. 그러나 역시나 뒤늦은 사법적 정의로 인해 먼저 세상을 떠난 피해자의 명예는 회복되기 어려워졌다.
문영석씨는 "법정에서의 사법적 무죄보다 더 무섭고 넘기 힘든 벽이 바로 사람들의 가슴과 시선에 박힌 '사회적 낙인'"이라며, "가해자인 국가가 심어놓은 편견의 벽을 허물고 완전한 '사회적 무죄'를 받아 내기에는 여전히 요원"하다고 했다. 특히 "군사독재 시절 만들어 놓은 폭력적인 언어들과 그 불신 속에 태어난 혐오의 단어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사회의 숨통을 조이며, 끊임없는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며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우리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꼬집었다.
문영석씨는 마지막으로 "우리가 거부해야 할 것은 국민을 사냥해 '간첩'으로 날조했던 그 비열한 범죄의 언어"라며, 이번 무죄 판결로 "서로를 악마화하는 수많은 폭력적인 언어들이 사라지고, 국가 권력에 의한 상처와 사회적 불신이 치유되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