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억원 금융위원장(가운데)과 참석자들이 8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자본시장의 발전을 위한 한국 스튜어드십 코드 개정 공청회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임을 뜻하는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 10년 만에 전면적인 체질 개선에 나선다. 앞으로는 상장주식뿐만 아니라 채권, 부동산, 인프라 등 대체투자 자산 전반으로 코드 적용 범위가 확대된다. 아울러 모든 가입 기관은 매년 수탁자 책임 활동 보고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한다.
10년 만에 바뀌는 코드... 기관 투자자들, 매년 '활동 보고서' 제출해야
한국ESG기준원은 8일 오후 한국거래소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자본시장 발전을 위한 한국 스튜어드십코드 개정 공청회'에서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개정안을 처음 공개했다. 이번 개정안의 가장 큰 특징은 코드의 적용 범위 확대와 이행 점검 체계의 강화다.
2016년 처음 도입된 후 개정을 거치지 않았던 스튜어드십 코드는 그동안 주로 상장 주식에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이번 개정안은 채권, 부동산, 인프라 등 대체투자 자산까지 코드 적용 범위를 넓힌다. 기관투자자에게 자본시장 모든 영역에서 수탁자 책임을 지키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임 범위도 한층 넓어진다. 기존에는 주주총회 시즌의 의결권 행사나 비공개 면담을 통한 의견 전달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투자 비중 확대나 주식 매각 등 실질적인 투자 의사결정을 통해 기업 경영에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전망이다.
코드를 이행한 뒤 사후 점검 체계도 새로 마련됐다. 개정안 세부지침 6조 4항은 코드 가입 기관이 매년 수탁자 책임 활동 보고서를 한국ESG기준원에 제출하도록 정하고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기업 가치를 결정하는 '비재무적 요소'로 못 박기도 했다. 기관투자자들이 앞으로 기업을 평가할 때 재무제표상의 매출이나 영업이익만큼이나 ESG 데이터를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는 것.
'준수 또는 설명(Comply or Explain)' 방식도 강화된다. 그동안 많은 기업이 ESG 경영을 한다고 선언하면서 실제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앞으로는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면 왜 지키지 않았는지, 그 대신 어떤 보완책을 마련할 예정인지 구체적인 사유로 제출해야 한다. 한국ESG기준원은 이번 개정안과 관련해 오는 26일까지 각계 전문가들과 업계 의견을 수렴해 최종안을 확정할 방침이다.
"ESG '만능 면죄부' 돼선 안 돼"… 'ESG 워싱' 우려도
이날 공청회에는 법학·재무·자산운용·연기금·거래소 등 각 분야 전문가 6인이 토론자로 참석해 개정안의 보완 과제를 언급했다. 전반적인 개정 방향에 공감하면서도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중 전문가들이 가장 먼저 짚어낸 건 ESG의 성격이다. 기관투자자들이 투자를 결정할 때 ESG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 김지안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ESG 등 지속가능성 요소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고객과 수익자의 중장기 이익·투자 자산의 장기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고려되는 수단이라는 점이 개정안에서 강조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또 영국이 올해 스튜어드십 코드를 개정하면서 도입한 '시스템적 위험' 개념을 소개했다. 단순 분산투자로 피할 수 없는, 시장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 위험에도 기관투자자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령 지금까지는 각 기업이 ESG 개별 요소에 집중해 왔는데 개별 기업이 아무리 각 요소에서 뛰어나도 전쟁이나 공급망 붕괴, AI로 인한 산업 구조 변화 같은 거대 위기에 대비하지 못한다면 결국 고객 자산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창환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 대표는 'ESG 워싱' 우려도 제기했다. 그는 "실무에서 기업들이 E(환경)·S(사회)를 강조하면서 G(지배구조)를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며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본질은 기후변화나 사회공헌 부족이 아니라 지배주주 중심의 취약한 거버넌스와 주주환원 결여"라고 강조했다. ESG 세 개 요소를 비슷한 무게로 다룬다면 지배주주가 특수관계자 거래나 불공정 합병으로 주주들에게 손해를 입히고도 친환경 투자나 직원 복지를 내세워 면죄부를 받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다.
기관투자자에게 연 1회 보고서 제출을 의무화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가 나왔다. 다만 이 원칙이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려면 사후 평가제가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동섭 국민연금공단 수탁자책임실장은 "그동안 위탁 운용사들로부터 받아온 이행 보고서를 보면 규정 준수 여부를 체크하는 형식적 수준에 머물렀다"며 "앞으로는 주주관여 활동이 기업 가치 제고와 지배구조 개선에 실질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성과 중심으로 기술돼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국민연금은 앞으로 위탁 운용사의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 수준을 점검하고, 그 결과를 운용사 선정·평가에 반영해 실질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입장이다.
이지윤 연세대 경영학 교수는 영국 사례를 들었다. 그는 "영국은 보고서 내용을 토대로 스튜어드십 활동 이행 수준을 실제로 평가하고, 기준에 미달하면 서명 기관 자격을 박탈하기도 한다"며 "장기간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거나 형식만 갖추는 경우 참여 기관 자격을 재검토하는 방안까지 고려해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한편 조진우 한국거래소 기업밸류업지원부 부장은 "스튜어드십 코드와 밸류업이 지향하는 목표가 같다"면서 두 가지를 연계할 방안을 제시했다. 먼저 기관투자자가 요구한 사안에 적극 응답하는 경우 상장 기업을 대상으로 밸류업 우수 기업을 뽑을 때 정성 평가 요소로 반영하는 안을 제안했다. 또 업종별로 자산 가치 대비 주가가 지나치게 낮은 '저PBR(주가순자산비율)' 기업들을 꼽아 투자자들이 이용하는 HTS(홈트레이딩시스템)와 MTS(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 화면에 이를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붙이는 방법도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