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장 뜨거운 화제작, 드라마 <참교육> 다들 어떻게 보셨나요? 누군가는 현실을 잘 고발했다고 박수를 치고, 누군가는 무리한 설정이라며 고개를 젓습니다. 학교 현장에 있는 교사, 학부모, 학생은 물론이고 드라마를 본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기다립니다.
며칠 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참교육>의 첫 회를 무심코 틀었다가 결국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눈을 뗄 수 없는 전개에 1편부터 마지막 10편까지 내리 달린 뒤, 모니터를 끄고 나니 창밖은 이미 환하게 해가 뜬 낮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졸린 눈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채감이 밀려왔다.
이 작품은 무너진 교권을 바로잡기 위해 가상의 정부 기관인 '교권 보호국' 감독관들이 학교 현장에 투입된다. 이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밤새 시청자를 화면 앞에 묶어두기에 충분할 만큼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교실 짓밟는 일들

▲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 스틸컷 ⓒ 넷플릭스
<참교육>에는 선 넘은 일진 뿐만 아니라 법을 우습게 보며 행동하는 '촉법소년' 아이들, 학교를 쥐고 흔드는 진상 학부모, 사욕을 채우는 비리 교사까지 교실을 짓밟는 무소불위의 부조리들이 그려진다.
지금 무너진 교단에서 고군분투하는 현직 교사들은 내가 학원에서 가르쳤던 제자 세대다. 그렇기에 현실의 무게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그 아이들이 마주한 현실이 너무 답답했던 탓일까, 나 역시 그 순간 만큼은 선생님이 된 제자들을 대신해 매를 드는 듯한 응징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이다 판타지에서 깨어나 환한 햇빛과 마주한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오래된 기억이 있었다. 일본 현지에서 파문과 문화 개방 바람을 타고 국내 언론과 미디어마저 연일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2000년 겨울에 본 일본 영화 <배틀로얄>이었다.
학급 붕괴와 소년 범죄에 공포를 느낀 기성세대가 반항하는 청소년들을 섬에 가두고 서로 죽이게 만드는 'BR법(신세기 교육개혁법)'. 이 법에 따라 국가가 아이들을 사지로 모는 극단적인 설정은, 26년 전 그 겨울의 나를 비롯한 한국 관객들에게는 일본 특유의 세기말적 판타지에 불과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는 정서가 그래도 남아 있던 시절이기에, 영화 속에서 등교를 거부하던 제자가 교정을 나서던 담임 선생님을 칼로 찔러 쓰러뜨리는 장면, 스승의 권위가 피 흘리며 바닥에 내팽개쳐지던 모습은 그저 크리스마스이브에 마주한 '먼 나라의 황당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러나 26년이 흐른 지금, 그 황당했던 디스토피아는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교실에서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고, 무분별한 악성 민원에 내몰린 교사들이 세상을 떠난 비극이 뉴스를 장식하기도 했다.
사이다 응징

▲넷플릭스 <참교육> 관련 이미지. ⓒ 넷플릭스
법과 제도가 교실의 무질서를 방치한다는 무력감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면서, 대중은 드라마 <참교육>이 선보인 거침없는 사이다 응징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설정상 이 작품 속 '교권 보호국'의 응징은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사적 제재가 아니라 국가가 공인한 '공적 제재'다.
작품을 보는 이들은 대부분 '매운맛' 응징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26년 전 스크린 속에서 보았던, 아이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공포와 분노가 이제는 현실의 대한민국 교실에서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고, 나 역시 그 무력감과 분노에 동조했기에 10부작을 정주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학교 폭력이나 일진이 없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어쩌면 물리적인 폭력의 강도는 과거가 더 거칠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더 큰 위기감을 느끼는 이유는, 폭력이 일어나는 양상이 구조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학교 폭력은 학교나 등하굣길 같은 제한된 물리적 공간에 묶여 있었고, 종례 후 집에 돌아가 현관문을 잠그면 최소한의 '시간적 단절'과 도피처가 있었다. 무엇보다 교실 안에는 가해자들조차 감히 넘을 수 없었던 교사라는 통제권자가 존재했다.
아무리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며 기세를 올리던 일진이라도, 담임 선생님이나 학생부장 선생님에게 걸리는 것만큼은 두려워했다. 교사의 눈을 피해 숨어서 악행을 저지를지언정, 그 권위 자체를 정면으로 들이받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하던 시절이었다. 거친 시대였지만, 최소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도록 통제할 '어른'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통제력을 잃은 교실이 가해자들에게 일종의 '치외법권'이 되어버렸다. 교사의 권위가 무력화된 그 공백을 타고, 학교 폭력의 형태는 걷잡을 수 없이 잔인해졌다. 이제 폭력은 스마트폰과 SNS를 통해 24시간 내내 피해자의 영혼을 갉아먹는 디지털 지옥으로 진화했다. 청소년 범죄 역시 불법 사이버 도박, 고리사채, 약물 유통 등 성인 조직범죄의 구조와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다.
문제는 이토록 커진 폭력의 사슬 앞에서, 정작 학교와 공동체는 아무런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구해줄 어른이 없다는 절망감 속에 갇힌 피해자도, 정의감 대신 비겁함을 먼저 배우고 무력감에 갇힌 아이들도, 결국 그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지 못한 채 각자의 자리에서 고립되어 가고 있다.
'상식의 보루'로서의 어른
결국 26년 전의 <배틀로얄>과 지금의 <참교육>은 같은 질문을 던진다. '기성세대가 올바른 가치관과 통제력을 잃었을 때, 공동체는 어떤 파국을 맞이하는가?'
드라마 <참교육>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화진의 힘에 짓눌린 누군가 절망과 분노를 섞어 묻는다. "네가 뭐야, 예수야 부처야?" 구원자라도 되느냐는 그 냉소적인 질문에 나화진은 송곳 같은 한마디를 꽂아 넣는다.
"어른이야."
이 대사는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이자, 밤새 화면을 지켜본 시청자들의 가슴에 깊이 박히는 한마디다. 가해자들을 힘으로 굴복시키는 나화진의 모습에 우리가 환호했던 이유는, 그가 초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여서가 아니다. 붕괴된 교실 속에서 그 누구도 해주지 못했던 '옳고 그름의 경계'를 그어주는 어른의 부재에 우리가 그만큼 목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해 교실이 무법 지대가 되었기에, 대중은 결국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힘의 지배'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열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응징이 주는 쾌감은 잠시일 뿐이다. 이렇듯 힘으로 누르는 법만 가르치는 '참교육'이라는 이름의 판타지에만 머문다면, 그 시스템이 타락하여 교육의 가치는 사라지고 오직 '강한 힘이 약자를 지배한다'라는 생존 논리만 남게 될 것이다. 그 끝에서 마주하게 될 미래는, 결국 아이들을 거친 서바이벌의 전장으로 내몰았던 26년 전 그 <배틀로얄>의 비극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매를 든 영웅이 아니다. 억압이나 방임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교실 안에서 훼손된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세우고, 죄에는 반드시 엄중한 책임이 따른다는 상식과 논리를 몸소 보여줄 수 있는 진짜 어른들의 연대다. 매운맛 응징이 주는 짜릿한 쾌감 뒤에 숨은 공동체의 무력함을 직시하고, 이제라도 아이들 앞에 당당히 "어른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기성세대의 마땅한 책임'을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