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6년 환경의 날을 상상하며
2046년 6월 5일 환경의 날.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앞은 이른 아침부터 북적이고 있다. 방송사와 언론사의 취재진, 수많은 유튜버들의 행렬은 광화문 광장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오랜 투병 끝에 지구의 건강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 전 세계가 이를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레드카펫 대신 초록카펫이 깔렸고, 맞은편 외벽에는 대형 현수막이 펄럭인다.
지구가 살아났습니다
당신 덕분에
포토월에는 오늘의 주인공들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전라도 갑 최용기 여사. 경상도 을 김용기 여사. 충정도 병 박용기 여사. 강원도 정 이용기 여사. 전국 각지에서 모인 '용기' 여사님들은 카메라를 향해 요즘 유행하는 '지구 하트'를 만들며 포즈를 취한다. 잠시 후, 오늘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시상식이 시작된다.
"지구 회복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분들을 소개합니다."
객석이 조용해진다.
"환경의 날을 맞아 말씀드립니다. 지금의 회복은 여러분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객석을 가득 채운 박수가 세종문화회관 천장까지 밀려 올라간다.
"그중에서도 수많은 지구인들의 '용기 있는 생활'을 시작하게 만든 원조 1세대 용기 여사님."
잠시 뜸을 들이는 진행자, 그리고 이름이 호명된다.
"부평의 김효숙 용기 여사님!"
객석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보낸다. 저 멀리 배낭을 메고, 한 손에는 손수건을, 다른 한 손에는 텀블러를 든 여성이 천천히 무대로 걸어 나온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한 사람의 작은 용기가, 이렇게 많은 '용기'를 만들어낼 줄은. 2026년. 모든 것은 그해 여름부터 시작되었다.
만드는 방식까지 고민한 '용기 내는' 책
꿈 깨라고? 낮잠 자다가 횡설수설 잠꼬대도 아니고, 이 황당한 미래를 상상하게 만든 책이 있다. 바로 김효숙 작가의 <용기 있는 생활>(2026년 6월 출간)이다. 세상이 초록초록한 날에, 초록초록한 책이라니. 표지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이 책의 진짜 매력은 겉모습이 아니었다. 본문 종이는 친환경 용지를 사용했고, 표지는 환경을 생각해 최소한의 무광 코팅만 더했다. 내용 뿐 아니라 만드는 방식까지 책이 말하는 가치를 담고 있었다.

▲<용기 있는 생활>초록초록한 배경과 깔맞춤으로 한 컷 ⓒ 정현주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 좀 내보라'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그저 용기(容器)를 내보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마음속의 용기(勇氣)도 함께 자라났다. 비닐봉지 대신 들고 간 그릇은 어느새 나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이름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용기 여사가 되었다.
<용기 있는 생활> 21p
"수저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봐!"
후배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도 수저집을 꺼냈을 때 주변에서 수근거린 말이라고 한다. 사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수저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라니.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주방 서랍 어딘가에 수저집이 있을 텐데... 하며 수저집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유난처럼 보였던 행동이 어느 순간부터는 '생활의 달인'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가족 모임에서는 남편과 아이들이 늘 든든한 응원군이라 용기를 꺼내는 일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친구들이나 지인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는다. 가방 속에서 기회를 엿보던 용기가 조금만 힘을 내 보라고 속삭일 때마다 용기여사는 움찔거린다.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용기를 꺼내지 못하고 애꿎은 손수건만 만지작 거리곤 했다.
<용기 있는 생활> 67~68p
용기 여사는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아줌마다. 그래서 더 공감이 갔다. 처음에는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것도 눈치가 났지만, 작은 용기를 내며 시작한 실천은 반찬 가게 용기, 리필 화장품, 알뜰장에서 사용하는 냄비까지 이어진다. 책에는 거창한 구호 대신 생활 속에서 바로 따라 해 볼 수 있는 작은 실천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망설이고, 실패하고, 눈치를 보고, 다시 시도하는 옆집 언니. 그래서 더 내 이야기처럼 읽혔다.
지난 3일에는 투표를 하러 나가는 길에 동네 무인문구점을 방문할 계획이 있었다. 예전 같으면 동네용 작은 에코백에 핸드폰, 지갑, 무선 이어폰만 들고 나갔을 텐데 이번엔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바로 비닐봉지다. 이 생각을 왜 못 했을까? 집안에 남아도는 비닐봉지를 한 장 챙겼을 뿐인데, 내가 변신한 느낌이 들었다.

▲에코백과 비닐봉지이게 뭐라고. 비닐봉지 한 장 챙겼을 뿐인데. 엄청난 만족이 뿜뿜 ⓒ 정현주
무인문구점에서 선물용 키링 20개와 캐릭터 문구를 샀다. 내가 맡고 있는 독서 논술 수업 1분기 종료 기념으로 학생들에게 줄 작은 선물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젤리 세트와 포장지를 샀다. 포장지는 화려한 모양이나 디자인보다 재활용이 가능한 지퍼백으로 골랐다. 셀프 계산대 화면에서 말똥말똥 쳐다보는 '비닐봉지 X'를 누르는데 묘한 성취감이 느껴졌다.
이게 뭐라고. 바들바들 봉짓값 100원을 아까워하기만 했지 비닐봉지를 가져갈 생각을 못 했다니. 집에서 가져간 비닐봉지 하나로 자존감이 올라갔다. 앞으로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작은 용기가 나를 바꾸고, 나를 바꾼 용기는 또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나부터' 시작하면 꿈적하지 않던 세상에 틈이 생긴다. 그 틈은 결국 변화를 만든다. 지금이 바로 용기 내야 할 때다.
<용기 있는 생활> 저자 서문 중 9p
그렇게 시작된 나의 '용기 있는 생활'

▲바게트 전용 용기와 손수건손수건 한 장 찾았는데 서랍에서 여러 장 득템. 이번 기회로 얻은 게 많다. ⓒ 정현주
나의 '용기 있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비닐봉지 한 장을 들고 나간 경험은 용기 여사로의 뇌를 움직이게 했다. 서랍을 뒤져 손수건을 찾아냈고, 길이 30cm짜리 밀폐 용기는 바게트 전용으로 지정했다. 단골 빵집에 용기를 내밀며 "잘라서 담아주세요"라고 말할 날도 머지않았다. 생각해 보니 제법 괜찮다. 비닐도 줄이고, 보관도 편하고, 빵도 눅눅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재밌잖아.
집에 있던 비닐봉지 한 장을 가방에 넣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거창한 결심도 아니었다. 그저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 하나일 뿐이었다. 어쩌면 용기 있는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2046년 6월 5일 <환경의 날>
생활 쓰레기 발생량 사상 최저치 기록!
누가 아는가. 작은 용기들이 모여 20년 뒤 환경의 날에 정말로 기립박수를 치게 될지. 그리고 세종문화회관 맞은편 어딘가에 이런 현수막이 걸리게 될지.
지구가 살아났습니다.
당신 덕분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