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이라는 제목은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라는 이름도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니었다.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논술 지문이나 인문학 관련 글에서 그의 이름을 종종 접했기 때문이다. 특히 기억과 인식, 현실과 허구를 다루는 문제를 설명할 때 보르헤스가 자주 언급되곤 했다. 다만 그의 작품을 온전히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책을 펼치기 전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표지 삽화였다. 오른손은 연필로 왼손의 소매를 그리고 있고, 왼손 역시 오른손의 소매를 그리고 있다. 서로를 그리는 두 손은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는 순환 구조를 만든다. 현실과 허구가 서로를 만들어내고,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흐려지는 보르헤스의 세계를 상징하는 듯했다. 제목보다 먼저 표지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고, 그 궁금증이 책장을 넘기게 만들었다.

▲책표지 ⓒ 민음사
이야기보다 오래 남은 숨겨진 질문들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의 소설가이자 시인, 수필가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서문과 각주를 여러 번 되짚어 읽어야 했다. 솔직히 말하면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철학과 문학 이론, 역사와 상상이 뒤섞인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책장을 덮을 수 없었다. 작품 하나를 읽을 때마다 이야기보다 그 안에 숨겨진 질문이 더 오래 남았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였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베끼려는 것이 아니다. 수백 년이 지난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이 세르반테스와 똑같은 문장을 다시 써내려 하려 한다. 결과적으로 완성된 문장은 원작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독자들은 그 글을 전혀 다른 작품으로 읽는다.
보르헤스는 이 기묘한 설정을 통해 문학의 의미가 글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같은 문장도 누가, 언제, 어떤 시대에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생각해 보면 현실도 비슷하다. 같은 뉴스 기사, 같은 사건, 같은 영상이라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우리는 사실을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시대를 함께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빌론의 복권" 역시 오래 기억에 남는다. 처음에는 단순한 복권 제도였지만 점차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한 체계로 변한다. 돈을 받는 것 뿐 아니라 처벌과 감옥, 심지어 죽음까지 복권으로 결정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누구도 규칙을 알 수 없게 되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이 작품을 읽으며 인간이 생각보다 많은 우연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미래를 예측하려 애쓰지만 취업, 만남, 건강, 사고처럼 삶의 중요한 순간에는 늘 예상하지 못한 요소들이 개입한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중 상당수는 철저한 계산의 결과라기보다 우연한 만남이나 예기치 못한 선택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보르헤스는 질서와 합리성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 역시 사실은 불확실성과 우연 위에 서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바벨의 도서관"은 오늘날을 가장 정확하게 예언한 작품처럼 느껴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육각형 방들로 이루어진 도서관에는 가능한 모든 문자 조합의 책이 존재한다. 진실이 담긴 책도 있고 완전히 무의미한 책도 있다. 사람들은 평생 진실을 찾지만 대부분 실패한다.
인터넷과 AI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원하고 더 빠른 검색을 원한다. 모든 정보에 가까워질수록 진실에도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보가 넘쳐 날수록 오히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보르헤스는 이미 오래전에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던 셈이다.
"비밀의 기적"에서는 나치에게 붙잡힌 작가 흐라디크가 총살 직전 마지막 기도를 올린다. 미완성 희곡을 완성할 시간을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처형 직전 시간이 멈춘다. 세상은 정지하지만 그의 의식만은 움직인다. 그는 머릿속에서 1년 동안 작품을 완성하고, 그 순간 시간이 다시 흐르며 죽음을 맞는다.
이 이야기는 창조 행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정신은 그 너머를 향한다. 누군가에게 글쓰기나 그림, 음악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작품을 읽으며 나 역시 꾸준히 글을 써온 시간을 돌아보게 되었다. <오마이뉴스>나 글쓰기 플랫폼에 올린 글들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 몰라도 적어도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를 남겨준다. 그래서 글쓰기는 결과보다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삶의 길이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며 살아가는가를 묻는 이야기처럼 읽혔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나타난다. 푸네스는 단 한 번 본 풍경도 잊지 않지만, 너무 많은 정보를 기억한 나머지 일반화하고 사고 하는 능력을 잃는다.
예전에 학생들과 논술 수업에서 "기억의 천재 푸네스" 지문을 함께 읽고 토론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푸네스의 능력을 부러워했다. 본 것을 모두 기억할 수 있다면 시험 공부도 훨씬 수월할 것이고, 여러 과목의 내용을 빠짐없이 기억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문을 따라 내용을 정리하고 작품이 던지는 문제 의식을 함께 짚어가면서 토론이 진행되자 분위기는 조금 달라졌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푸네스는 오히려 개념을 만들고 생각을 확장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존재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기억력이 좋을수록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잊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다. 불필요한 것을 지우고 핵심만 남기기에 개념을 만들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을 다시 읽으며 망각은 결함이 아니라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남부"와 "알 무타심에게 다가가기"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이 평생 추구하는 것을 보여준다. "남부"의 주인공은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만의 의미 있는 이야기를 완성하려 하고, "알 무타심에게 다가가기"의 주인공은 완전한 선과 진리를 찾아 평생을 떠돈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진실과 의미를 향해 살아간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이 책이 지금까지 읽히는 이유
책을 다 읽고 나니 <픽션들>은 단편소설집이라기보다 거대한 사고 실험처럼 느껴졌다. 보르헤스는 끊임없이 현실과 허구를 뒤섞으며 독자에게 되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진짜라고 믿고 있는가. 읽는 동안 나 역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보다, 왜 그것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여러 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도 마지막에 남은 생각은 의외로 단순했다. 내가 직접 경험하며 살아낸 시간들, 기뻐하고 후회하고 사랑하며 지나온 순간들은 적어도 내 삶에서는 분명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추천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믿고 있는 현실과 진실, 기억과 의미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 끊임없이 되묻게 만들면서도, 그 혼란 속에서 인간이 결국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는 존재인지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확실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남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책장을 덮은 뒤에도 오래 남는다. 그것이 <픽션들>이 지금까지도 읽히는 이유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