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작가 김중미 에세이 <엄마만 남은 김미자>, 사계절 출판. 2025년 11월
작가 김중미 에세이 <엄마만 남은 김미자>, 사계절 출판. 2025년 11월 ⓒ 사계절

<엄마만 남은 김미자>란 제목은 직관적으로 안도감을 주었다. 엄마를 떠나보낸 내겐 '아직 엄마가 곁에 있다'는 말로 다가와서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볼수록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뭔가 안쓰럽고 허전해서 그 삶을 따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이 책은 어머니 세대가 감당했던 가난과 희생, 여성에게 집중되었던 돌봄의 책임, 자신을 지우고 가족을 위해서만 살아온 어머니의 삶을 작가 김중미가 딸의 시선으로 엮은 에세이다. 거기엔 원망이 불쑥 끼어들기도 하지만 곧장 이해와 존중이 따라나선다. 엄마의 노년과 질병을 거치는 과정에서 딸의 뒤늦은 이해는 오롯이 엄마를 향하는 모습을 보인다.

4남매를 보살펴 키운 엄마는 김미자 개인의 삶 대신 엄마로서의 역할이 먼저였다. 그 모습은 개인사를 넘어 가부장적 질서가 깊숙이 자리 잡았던 시대를 묵묵히 통과한 여성의 삶을 떠올리게 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 답답한 마음이 들다가도 그 시대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던 사정을 생각하면 송구함이 차올랐다. 형태는 달라졌지만 우리가 사는 오늘도 돌봄과 희생이 특정한 가족에게 집중된 구조가 여전해 씁쓸함이 맴돌았다.

인지장애지만 온화하고 고운 엄마

AD
별반 달라진 게 없는 현실이 답답한 가운데서도 <엄마만 남은 김미자>를 읽는 내내 마음을 붙들었던 건 인지장애를 겪는 엄마의 고운 말씨와 배려였다. 흐린 기억으론 일상생활을 이어가기 곤란해 요양원에서 지내는 중에도 엄마의 따뜻한 언어는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바나나 하나조차 혼자 먹지 못할 만큼 타인을 먼저 챙기는 성품도 그대로 드러났다.

엄마는 손에 들고 있는 바나나를 내려다보며 내게 물었다.
"근데 이걸 나 혼자 먹어요?"
"여기 많아. 그러니까 이건 엄마 혼자 드셔도 돼."(중략)
엄마는 그래도 찜찜한 표정으로 당신 손에 있는 바나나를 들어 보이며 간호조무사를 불렀다.
"선생님, 이리 와보세요. 이거 한번 잡숴봐. 이게 한 개밖에 없네요. 이거라도 드셔봐." (255쪽)

이 짧은 대화만으로도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품위는 잊지 않은 어머니를 '김미자'란 이름으로 불러내고 싶었던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기도 했다.

"기억 못 해도, 다 꺼내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가 기억하고 우리가 알아서 엄마 말을 알아들을게."
"그러면 내가 바보 같지는 않우?"
"아니, 전혀. 전혀 그렇지 않아."
"나는 내가 좋은 엄마가 아니었던 거 같아요."
"엄마, 아니야. 엄마는 좋은 엄마였어."
"그래요? 진짜요?" (307쪽)

<엄마만 남은 김미자>를 읽을 때 마음을 파고들었던 장면이다. 가족을 몰라보는 상태에서도 풍요롭게 키우지 못한 과거, 인지장애로 가족에게 신경 쓰이게 하는 현재를 모두 아는 사람처럼 엄마는 적절한 언어로 자신을 질책하며 미안함을 전했다. 그 솔직함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서 사랑스러움으로 다가왔다.

삭제된 기억으로도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고 걱정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질문 하나가 가슴에 머물렀다. "나에게 인지장애가 온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어머니 김미자처럼 품위를 지킬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미래의 나에게 닿았다. 자녀나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날이 왔을 때 나의 하루는 어떻게 소모될까. 생각만으로도 낯설고 서먹했다. 나 역시 아들과 딸에게 폐를 끼치게 될 거란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웃돌았다. 혹여 함부로 대하며 억지나 부리진 않을지 당혹감과 한숨이 섞여 나오기도 했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인지장애는 더 이상 특정인의 문제가 아니다. 팔십 후반에서 구십 초반이 되신 친구 부모님들도 두 분 중 한 분은 인지장애 판정을 받고 약물치료 중이다. 주변에서도 비슷한 예를 접하다 보니 인지장애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란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내 삶이 60대로 접어든 데다 기억력이 전과 같지 않아 그런가 인지장애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하지만 어머니 김미자를 알게 되어 내심 희망이란 걸 품을 수 있었다. 기억이 희미해진다고 거친 모습만 남는 게 아니라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도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선별하려는 듯 갸웃거리다 내놓는 반듯한 언어와 다정한 모습을 보며 '인지장애가 오더라도 정갈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때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잊을지, 남은 기억은 무엇일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 김미자처럼 아낌없이 주는 마음과 고운 말씨는 끝까지 남아 자녀와 돌보는 이들을 힘들게 하는 일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주변에 덜 미안하기 위해 해야 할 일

엄마 김미자의 삶이 남긴 것은 희생도 돌봄도 주목할 만 하지만 잊힌 기억 속에서도 끝내 저버리지 않은 인품과 인간다움이다. 미래의 내 언어와 처신이 엄마 김미자를 조금이라도 닮으려면 마음의 방향을 자주 점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습관적으로 표현하는 고마움과 미안함, 친절한 한마디, 누군가를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마음씀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과거는 바꾸기 어렵지만 미래를 위한 현재의 마음가짐은 얼마든지 수선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고른 숨을 쉬게 했다.

책은 삶이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자녀나 돌보는 이에게 좀 덜 미안하려면 함께 있기 편안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숙제를 던졌다. 사람이 무엇으로 기억될지, 어떻게 기억될지는 결국 지금의 내가 만들어 가는 것임을 깨닫게 한 책 덕분에 적어도 볼썽사나운 노년으로 남진 않을 것 같다.

<엄마만 남은 김미자>는 어머니 세대 여성의 희생을 기록한 동시에 희생 속에 가려진 엄마 김미자의 삶을 복원하려는 애정 어린 시도로 읽혔다. 그리고 흐려진 기억보다 오래 남아 작동하는 게 무엇인지 묻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할지, 어떤 노년을 맞이해야 할지 돌아볼 수 있게 이끌어 준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


#김중미#괭이부리말아이들#엄마만남은김미자#인지장애#노년과질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순미 (smfive5) 내방

읽고 쓰고 배우며 새로운 길을 찾는 중에 있습니다.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