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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당선언>
<공산당선언> ⓒ 책세상

하나의 유령이 우리 학교를 배회하고 있다. '민원'이라는 이름의 유령이다. 1848년 유럽을 뒤흔들었던 <공산당 선언>의 그 유명한 첫 문장을 빌려오지 않을 수 없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다만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유령이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예고편이었다면, 지금 우리 학교를 떠도는 유령은 '아이들의 생각하는 힘'을 거세하려는 퇴행의 징후라는 점이다.

170여 년 전 유럽의 지식인들을 긴장시켰던 이 문장이, 2026년 대한민국 서울의 한 고등학교 도서관을 뒤흔들고 있다. 최근 우리 학교 도서관에 비치된 이 책을 문제 삼으며 '학생들에게 유해하다'는 민원이 제기되었다.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교 현장에서 특정 교육 활동을 표적 삼은 조직적 민원이 일상화되고 있다. 그들은 '교육의 중립성'을 방패로 내세우지만, 실상은 다르다. 자신의 가치관과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은 '불온'으로 낙인찍어 제거하려는 검열일 뿐이다. 아이들의 독서와 토론을 사상적 오염으로 보는 좁은 시선. 그것이 우리 교육의 진짜 위기다. 우리 학교가 겪은 일은 바로 그것이었다.

민원인가, 공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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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민원이 들어온 것은 5월 29일 오전 8시 47분이었다. 학교 입학·홍보 상담용 카카오톡 채널에 우리 학교 학부모라며 한 사람이 글을 남겼다. 도서관에 <공산당 선언>이 비치되어 있다며 '문제가 있다'는 취지였다. 그로부터 48분 후인 9시 35분, 내 기사가 오마이뉴스에 실렸다(관련기사: 퀴어 동성애 교육 OUT? 34년 차 교장이 묻습니다 https://omn.kr/2iex6).

그날 오후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학교 대표 전화가 울려댔다.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홍보 채널에도 같은 내용의 민원이 연이어 들어왔다. 카카오톡 대화명도 제각각이었고, 내용도 조금씩 달랐지만 핵심은 똑같았다. '<공산당 선언>을 폐기하라.'

주말이 지나고 6월 1일 아침, 교감 선생님이 서울시교육청 담임 장학사로부터 받은 이메일을 내게 건넸다. 교육청에 접수된 민원 5건이었다. 내용은 처음 카카오톡에 글을 남긴 사람의 것과 판박이였다. 거의 동일한 문장 구조, 동일한 주장, 동일한 폐기 요구. 다만 이 민원들은 내 기사가 탑재된 이후에 교육청으로 집중 제기되었다. 심지어 억지로 이 책의 폐기와 성평등 교육을 결부 짓는 궤변까지 늘어놓았다. 선거를 앞둔 시점에, 특정 진영이 조직적으로 달려든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 학교 학부모회장에게 확인했다. 이 책과 관련한 정보가 학부모 밴드나 카카오톡 방에 공유된 적이 있느냐고. 전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도서 담당 선생님이 확인해 보니,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해당 도서 두 권(2016년 1권, 2021년 1권)이 서가에 있고, 금년도에 대출 기록은 없었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 학교 학부모 민원은 단 0건이었다. 학부모라 자처하는 이들은 우리 학교 공동체와 아무런 연결이 없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적대적 언어는 학부모와 멀었다. 걸려온 전화 번호와 학부모 명부를 확인했다. 예상대로다. 좌표를 찍고 몰려온 유령들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대응 방안을 고민하는 나에게 우리 학교 선생님 한 분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핵심은 이것이었다. 민원이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조직적 공격에 대해, 단위 학교가 홀로 감당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육당국이 공적으로 개입하여 적극 대응해야 한다. 선거를 앞두고 학교를 정치 공세의 표적으로 삼는 세력에 대해, 업무 방해 등의 혐의 적용을 포함한 단호하고 엄정한 조치가 필요하다.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한다. 교육 현장을 지키는 일은 교사와 교장만의 책임이 아니다.

책은 위험하지 않다, 무지가 위험할 뿐이다

나는 34년 동안 직업계고 교단에 섰다. 아이들이 기계를 만지고 로봇을 다루는 기술을 배울 때, 나는 그 기술이 세상을 더 따뜻하고 인간적인 곳으로 바꾸는 도구가 되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문학적 토양, 즉 '왜 이 기술이 필요한가'를 묻는 사유의 힘이 필요했다. 나는 역사를 통해 인간의 존엄을 말하고, 관계의 미학을 말해왔다. 교육은 아이들이 타인과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장이어야 한다.

우리 교육이 '금지'로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자문한다. 순수한 우려에서 비롯된 민원이라면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특정 사상이 아이들의 가치관을 흔들지 않을까 하는 염려 말이다. 그러나 학교를 표적 삼아 업무를 마비시키는 행위는 우려가 아니라 공격이다. 금기는 지식을 죽이지 못한다. 오히려 아이들의 호기심만 자극할 뿐이다.

민원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의 당연한 권리다. 하지만 교육의 본질을 훼손하고 교사의 교수권을 위축하며, 아이들에게 '정답만 말하라'고 강요하는 민원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폭력이다. 정답을 강요하는 교육은 아이들을 로봇보다 못한 부품으로 만들 뿐이다.

나는 교장으로서 그리고 34년 차 교육자로서 분명히 말한다. 학교는 세상의 모든 생각과 만나는 곳이어야 한다. 아이들이 자기만의 질문을 던지고, 나와 다른 타인의 생각과 부딪히며 성장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유령은 빛이 강해지면 스스로 사라진다. 그 빛이 바로 우리 아이들의 비판적 사고이자, 인문학적 성찰이다.

나는 이 책을 치우지 않는다

<공산당 선언>은 인류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기록한 고전이다. 국내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에도 널리 소장되어 있으며, 금서로 지정된 바 없다. 이 책을 도서관에 비치하는 것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근대 사상의 흐름을 이해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노동과 자본 그리고 기술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나는 <공산당 선언>을 서가에서 치우지 않는다. 이 결정은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외부의 사상에 휘둘리는 수동적인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그들은 책 속의 활자를 통해 세상과 치열하게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학교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이 책은 읽지 마라'는 금기가 아니라, '어떤 책이든 읽고 자기만의 언어로 질문하라'는 용기다.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아이들이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니다. 아이들이 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는 교육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다. 공동체는 '차이'를 통해 성장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담은 책이 도서관 한구석에 꽂혀 있는 것, 그 낯설고 불편한 공존이야말로 우리 학교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기초다.

나는 오늘 우리 학교 도서관 서가를 다시 한번 둘러본다. 그곳에는 금지해야 할 책이 아니라, 아이들이 미래를 꿈꾸며 읽어야 할 수많은 '질문'들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이 질문들과 함께, 보다 따뜻하고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주역으로 성장한다고 믿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사 채택 후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학교도서관#공산당선언#교육민원#교육감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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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봇고등학교 교장. 『되풀이되는 비극, 따개비 현장실습』, 『디지털 대전환 시대 직업계고 미래는』 등 직업계고 학생들의 삶과 미래를 응원하는 글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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