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역사를 온몸에 품고 있는 뉴욕. 누군가 살아냈고, 누군가 살아가는 빌딩 숲 사이사이의 이야기를 하나씩 담아 보려 합니다.
지난 5월, 스타벅스 코리아가 기획한 '탱크데이 프로모션'으로 공분이 일던 즈음, 딸과 함께 식후 음료를 마시러 미국 뉴욕의 스타벅스 매장에 들렀다.
우리 가족은 뉴욕 맨해튼 인근 롱아일랜드 주택 지역에 산다. 그날 들른 매장은 아시안 인구가 거의 없는 동네에 있었다. 식당에서도 카페에도 우리 모녀 외에는 이용 고객이 백인 주민뿐이었다.주문한 음료를 기다리며 매장을 둘러보다가 작은 포스터에 눈이 갔다.
"5월, 우리는 아시아계 미국인과 하와이 원주민 그리고 태평양 섬 지역 사람들(아시아-태평양 제도 원주민) 문화유산의 달을 기념합니다."

▲미국 스타벅스의 5월은 아시안-태평양 제도 문화 유산을 기념하는 달 ⓒ 장소영
다민족 국가인 미국은 매달 특정 문화유산의 달로 지정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달은 6월로, 성소수자의 인권과 문화적 성취를 북돋아 주는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라 불린다. 그 외에 2월은 흑인 역사의 달(Black History Month), 3월은 여성 역사의 달(Women's History Month), 4월은 아랍 역사의 달(Arab American Heritage Month), 그리고 5월이 아시아-태평양 제도 원주민의 달(AANHPI Heritage Month)이다.
음료를 건네주는 직원에게, "저기 붙은 게시물을 봤다. 나 한국계 시민인데, 5월에 뭐 특별 선물 같은 거 없냐"라고 농담을 했다. 약간 당황한 듯 직원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곁에 있던 다른 직원이 대화에 끼어들더니 손가락을 공중에서 살짝 돌리며 몸으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들려? 피프티피프티(노래인데)! 우리 선물이야!"
그녀의 유쾌한 대답 덕분에 우리 셋은 함께 웃을 수 있었다. 맨해튼에서 뚝 떨어진 한적한 마을에서 한국 아이돌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을 줄이야.
영업 중단까지 이어진 미국의 유사 사례
미국 유력 뉴스매체들도 스타벅스 코리아가 기획한 '탱크데이 프로모션'에 대해 주요 뉴스로 다루었다. 뉴스 하단에 달린 한 한국 누리꾼의 댓글을 읽게 되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미국인들에게 "9월 11일(9.11 테러일)에 테러가 연상되는 상품을 기획·판매하면 어떨 것 같으냐"라고 설명해 주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비슷한 일이 미국에서도 있었다. 10년 전인 2016년, 911 추모일을 앞두고 텍사스의 한 침대 매트리스 판매업체가 911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해당 광고 영상을 보면, 쌍둥이 빌딩처럼 양쪽으로 쌓인 매트리스 앞에 두 남성 직원과 한 여성 직원이 등장한다. 쌓여 있는 매트리스 위로 직원이 쓰러지면서 매트리스를 무너뜨리자, '911을 기억하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라며 '어떤 사이즈의 제품이라도 싱글 매트리스 가격으로 할인해 판매하겠다'라고 광고를 했다.
비난이 쏟아졌고, 기업 소유주의 사과와 해명에도 여론은 계속 악화되었다. CNBC 보도(2016년 9월 11일 자)에 따르면, 결국 회사는 무기한 영업 중지에 들어갔다.
미국에서는 단순한 디스플레이라 하더라도 양쪽으로 물건을 빌딩처럼 쌓아놓고 판매하는 경우가 드물다. 추모의 의미를 제외하고는, 쌍둥이 빌딩을 연상하게 하는 디스플레이는 항의를 받기도 한다.
기업 이미지를 좌우하는 경영진의 행보
경영진이나 기업 소유주가 회사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는 사례는 미국에도 있다. 맨해튼에 본사를 둔 유명 화장품 회사 '에스티로더'도 그중 하나다. 에스티로더는 미술품 기증과 유방암 관련 캠페인과 지원 사업으로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회사다.
창업주의 아들이자 전 회장인 고 레너드 로더(Leonard Lauder)는 유명한 미술품 컬렉터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모았던 엽서 12만 장을 보스턴 박물관에 기증했고, 맨해튼 휘트니 미술관의 든든한 후원자였으며,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입체파 작가 작품 81점을 '더 매트(The MET)' 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동생 로널드 로더(Ronald S. Lauder) 역시 미술품 애호가다. 대형 박물관 '더 매트'의 길 건너에 있는 아담한 고택을 개조해 2001년, '노이에 갤러리(Neue Galerie)'로 오픈했다. 뉴욕에서는 드물게 클림트, 에곤 실레는 물론 독일-오스트리아 작가들의 진귀한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우먼 인 골드>로 더 유명해진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도 노이에 갤러리 소장품이다. 지난 5월 14일 '더 매트'는 절차를 거쳐 2028년, '노이에 갤러리'와 합병한다고 발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맨해튼 노이에 갤러리건물 이정표와 갤러리 정문에 노이에 갤러리의 이름과 설립자 로널드 로더의 이름이 함께 박혀있다. 노이에는 'New'라는 뜻으로 노이에 갤러리는 에곤 쉴레, 클림트를 비롯한 독일-오스트리아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 장소영
에스티로더가 대중의 호감을 얻은 데는 로더 가문의 며느리인 에블린 로더(Evelyn Lauder)의 '유방암 예방과 인식 개선 캠페인(Breast Cancer Campaign)'도 큰 몫을 했다. 1992년, 백화점 화장품 매장을 방문하는 고객에게 핑크 리본을 나눠주며 시작된 캠페인은 유방암 인식 개선과 치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약 30년간 1950억 원 이상의 기금을 유방암 연구를 위해 지원했다.
그러다 최근, 에스티로더 화장품에 대해 환경운동 단체와 소비자들의 불매 운동이 일어났다. 노이에 갤러리 설립자인 로널드 로더가 '그린란드 매입'을 적극 추진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부터다. 로널드 로더는 트럼프 대통령의 와튼 스쿨 친구이자 오랜 후원자이다. 설상가상 에스티로더 코스메틱스사가 지난 2월, 캐나다 정부의 '환경 보호법 위반'에 걸려 75만 캐나다 달러(약 8억 2000만 원) 의 벌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보도되며 불매 운동은 캐나다로까지 번졌다.
함께 즐길 수 없다면
지난 5월 19일, 미국 스타벅스에서는 하루 동안 '미피 캐릭터'와 콜라보한 제품을 판매했다. 미피 캐릭터의 오랜 팬이라 아침부터 동네 스타벅스 매장 두 곳을 방문하며 굿즈를 구입하려 했지만, 매진되었다는 안내 문구만 보고 돌아서야 했다. 그러다 문득, 한국의 이마트와 유사한 '타깃' 매장 내 스타벅스가 떠올랐다. 역시 큰 매대를 가진 그곳에는 약간의 굿즈가 남아 있었다.
머피 머그컵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제품을 살펴보고 있는데, 중년 여성 한 분의 시선이 느껴졌다. 머그컵을 원했던 그분은 나를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며 내 선택을 조용히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흔쾌히 그녀에게 머그컵을 양보하고 대신 빨대 컵을 구매했다.

▲미국 스타벅스 미피 콜라보 굿즈지난 5월 19일, 미국 스타벅스는 미피 콜라보 굿즈를 판매했다. 스타벅스 매장에서 만난 한 미국 중년 여성이 내가 손에 들고 있던 한국 전통 문양 트레블머그에 관심을 보였다. 최근 미국에서는 한국의 전통 문양 특히 달항아리와 자개 제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 장소영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며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 손에 든 트레블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지난해 한국 경주에서 구입한 제품이었다. 그녀는 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있어 보였다. 같은 브랜드인데 한국은 다양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굿즈가 정말 많더라고 소개했다. 한국엔 스타벅스 굿즈 팬들도 참 많던데, 슬픈 역사를 가지고 '탱크데이 프로모션'이라는 행사를 바람에 불매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소식도 전했다. 음료를 건네던 직원은 알고 있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돌아섰고, 그녀는 뉴스 보도를 못 보았는지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천안문 사태를 말하는 거야?"
내가 '천안문'을 바로 알아듣지 못해 주춤거리자 그분은 중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덧붙여 주었다. 아마 탱크라는 말에 천안문 사태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오래전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민주주의의 나라인 한국에서 일어나서 더 비극이었다고 간단히 알려주었다.
주차장으로 향하며 그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커피를 즐기기 위해 사는 제품에 무기 이름을 붙이다니 아무리 그 컵이 튼튼해도 커피를 즐기지는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이어서 다음에 미국 스타벅스에서 한국의 전통문화와 콜라보한 제품이 나오면, 아침 일찍 줄을 서고 싶다고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사용하던 것만 아니면 전통 문양 트레블머그를 주고싶다고 답하고 서로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커피만이 아니라 '문화 공간'을 판다던 스타벅스를 비롯해, 앞으로 여러 기업들이 남길 유산에서 보다 깊은 '인류애'를 음미하게 되길 기대해 본다.